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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36)화 (36/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36화

루안은 황당했다. 이 왕녀가 착하다 못해 바보가 된 건가 싶었다.

아우라가 어서 나오라는 듯 루안에게 손을 내밀었다. 루안은 그 손을 살짝 쳐 냈다.

“안 나갈래요. 수영이나 좀 하죠, 뭐.”

“대단해요. 난 수영을 못 하거든요.”

‘못 했구나. 진짜 큰일 날 뻔했네.’

루안은 애써 안도감을 숨겼다. 대신 아우라에게 자랑하듯 수영 실력을 뽐냈다. 간만에 몸에 닿는 물의 느낌이 좋았다.

“……바보 같은 여자애. 친구 따위 되어 줄까 보냐.”

아무리 생각해도 왕녀보다는 자신이 더 잘난 것 같았다. 저 여자애가 내세울 거라곤 트루 블러드라는 핏줄 정도가 아닐까. 아니면 좀 귀여운 얼굴 정도.

그런데 어느 순간, 루안은 다리가 뒤틀리는 통증을 느꼈다.

‘엇…… 쥐가…….’

“으앗!”

당황한 루안이 허우적거렸다. 아우라가 물가에서 벌떡 일어났다.

“루안?!”

“쥐, 쥐가……! 살려…… 윽!”

루안은 속수무책으로 물속에 잠겼다. 코와 입에 마구잡이로 물이 들어왔다. 숨이 고통스럽게 막혀 오고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누군가 물속에서 루안을 붙잡았다. 겨우 눈을 떴을 때, 눈앞에는 거짓말처럼 아우라가 있었다.

아우라가 그를 끌어안고 허우적거렸다. 숨이 막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수면 위를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이.

잠시 후, 루안이 호수 앞에서 깨어났다. 시종들이 흠뻑 젖어 있었다. 시종들이 두 사람을 찾으러 왔다가 그들을 구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루안을 감싸 안았다.

“루안! 루안! 괜찮니?”

“아, 예. 괜찮아요. 왕녀님은…….”

“물을 많이 먹으셨다. 겨우 정신을 차리셨어.”

루안은 시종의 품에 안겨 돌아가는 아우라를 보았다. 칭칭 감긴 담요 사이로 가는 팔이 달랑거렸다.

루안이 아버지의 눈치를 보았다. 왕녀를 물에 빠트리다니. 뺨을 맞아도 할 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뿌듯하다는 듯 루안을 보았다.

“잘했다.”

“……예?”

“네가 물에 빠진 왕녀님을 구하려고 했다며.”

“예? 누가 그런 소릴…….”

“왕녀님께서 말씀해 주셨다. 장하다.”

아버지는 루안을 와락 안았다. 루안은 어안이 벙벙했다.

“루안, 항상 말하는 거지만 우리 집안은 대대로 제니아 왕가를 모셔 왔다. 네 대가 되면 네가 왕녀님을 지켜야 해. 무슨 말인지 알겠니?”

“……네, 아버지.”

수백 번은 들었던 말이고, 역시 수백 번 했던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했던 대답은 달랐다. 루안은 자신이 왜 마이어가에서 태어났는지 비로소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제가 지킬게요.”

루안은 자경단 본부 앞에 서 있었다. 천막으로 된 본부엔 사람 그림자가 가득했다. 저들이 모두 황궁의 말단 기사직을 노리는 이들이리라. 그리고 저들 중 단 한 명만이 황궁으로 갈 수 있다.

그는 만지작거리고 있던 금단추를 꽉 쥐었다.

“후우…….”

루안이 깊이 심호흡을 하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

아우라는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창고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창문으로 다가갔다. 창문 난간 너머로 두 다리를 넘겼다. 저 아래 어둡고 깊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아우라!”

뒤에서 루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우라는 얼른 어둠으로 몸을 던지려 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아우라, 안 돼. 가지 마.”

길고 하얀 손가락. 분명 루안의 손이었다.

“…….”

아우라가 눈을 깜빡였다. 루안의 꿈을 꾼 것 같았다.

그녀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

말로 설명 못 할 근육통이 몰아쳤다. 어젯밤, 카를과 감각의 끝까지 다녀온 듯한 기분이었다. 몇 번은 도망치려고도 해 봤다. 그리고 그때마다 카를은 그녀를 붙잡고 결국 끝을 보게 했다.

“하아…….”

아우라는 얼굴을 감쌌다. 부끄러움과 후회가 동시에 몰려왔다. 그러니까 어제는…… 너무 감정적이었다.

‘뭘 원했던 걸까, 나는.’

엘리제에게 느끼는 미묘한 감정 때문에? 카를의 일을 꼬이게 하고 싶은 마음에? 아니면 그저 육체적인 욕망? 어떤 이유를 갖다 붙이더라도 경솔한 선택이었다.

아우라는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카를이 일찍 돌아간 것 정도일까.

여기저기 쑤시는 몸을 힘겹게 움직여 침대에서 벗어났다. 창문을 열려는데 커튼이 반쯤 처져 있었다. 북쪽 탑이 보이는 자리였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다녀갔을 때도 커튼을 치고 갔지.’

그도 북쪽 탑을 의식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우연일지도 몰랐다.

아우라는 창문을 활짝 열고 돌아섰다. 그리고 그때, 침대 협탁에 낯선 것이 있는 걸 발견했다.

사기 접시에 가득 담긴 진주 단추들과 곱게 개어진 드레스. 그것을 보는 순간 아우라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드레스를 잡던 커다란 손. 드레스가 찢기던 느낌. 단추가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 그런 것들이 다시금 느껴졌다.

그리고 상상됐다. 잠든 자신의 곁에서 단추를 하나씩 줍는 손끝. 찢어진 드레스를 접으며 한숨을 쉬는 입술. 마지막으로 커튼을 치는 그 뒷모습.

아우라는 얼른 드레스와 단추들을 서랍에 넣었다. 더 보고 있다간 그 달콤함에 굴복할 것 같았다. 카를의 부인 자리를 받아들이고 핀을 포기할 것만 같았다. 어젯밤 같은 쾌락을 매일같이 기다리면서.

‘단추 때문이야…… 단추가…….’

그때 문득 아침에 꿨던 꿈이 생각났다.

‘아우라, 안 돼. 가지 마.’

아우라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한 루안의 애절한 목소리. 그것을 떠올리며 아우라는 마음을 다잡았다.

루안을 비롯해서 마력을 잃은 이들이 고통받고 있다. 왕녀인 그녀가 핀의 봉인을 풀어 주기만을 기다리면서. 그녀가 포기하면 그들은 희망이 없었다.

‘카를에게 기대려 하다니. 다른 사람도 아닌 카를에게.’

꿈에 루안이 나온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흔들리려는 그녀를 잡아 주려 했을 것이다. 이제 곧 황궁으로 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아우라는 협탁의 서랍을 빤히 보았다.

‘다 버려야겠어. 단추건 드레스건.’

문득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왔다. 그 완연한 봄바람에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기분 좋게 흔들렸다. 그녀를 괴롭게 했던 갈등이 씻기는 듯했다.

똑똑.

노크 소리에 이어 미나가 간단한 아침 식사를 들고 들어왔다. 미나는 테이블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그래. 별일 없었고?”

아우라가 테이블 앞에 앉았다. 커피부터 한 모금 마실 때였다. 미나가 주머니에서 편지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뭐지?”

“어젯밤 라이언 대공께서 떠나시며 제게 맡기셨습니다.”

“……대공이?”

굳이 미나에게 맡긴 건 카를의 눈을 피할 의도였을 것이다. 다른 시종에게 줬다간 바로 카를에게 일러바쳤을 테니.

아우라가 편지를 받아 펼쳐 보았다.

「핀은 제게 있습니다. 수트라 성으로 오십시오.」

아우라는 편지를 접어 미나에게 내밀었다.

“미나. 당장 태워 버려.”

“아…… 네, 폐하.”

미나는 얼른 초에 불을 붙였다. 종이 끝을 불에 갖다 대자 바로 화르르 타올랐다. 아우라는 그 불빛을 빤히 바라보았다.

핀은 카를에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황태자가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황태자가 라이언에게 핀을 줬다면? 두 사람은 막역한 사이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카를이 날 수트라 성으로 보내 줄 리가 없지.’

그녀는 테이블을 손끝으로 툭툭 쳤다.

‘슬슬…… 카를의 공간을 다시 살펴볼까.’

***

카를은 자신의 침실에서 소매 커프스를 하나씩 잠그고 있었다. 목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머리는 아직 젖어 있었다.

거울 속 그의 안색이 깨끗했다. 수면 리듬이 확실히 정상을 되찾고 있었다. 아우라가 없으면 아직 조금 힘들지만 예전처럼 악몽을 꾸진 않았다.

‘모순적이군. 한편으로는 분명 갉아먹히고 있는데.’

무형의 감옥에 갇힌 건 아우라가 아니라 자신 같았다. 어젯밤에도 그러지 않았는가.

‘사랑해, 카를.’

그 거짓말이 그 안의 뭔가를 또 부숴 버렸다. 조금만 더 가면 그의 심장을 쥐락펴락할 수 있지 않을까.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다. 웬만한 증오가 아니고서야 그런 거짓말도 할 수가 없을 거라고.

‘뭐, 그래도 싫지 않아.’

카를이 타이를 고정하곤 집무실로 갔다. 미리 기다리던 조쉬와 테오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폐하,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그래. 앉아.”

세 사람이 소파에 둘러앉았다. 두 사람은 어젯밤 카를의 소재를 묻지 않았다. 카를의 안색만 봐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테인 공작은 어떻게 됐지?”

테오가 대답했다.

“유감을 표하고 돌아가셨습니다.”

“화가 많이 난 모양이군.”

공작의 유감 표현은 가볍게 넘길 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카를은 후회하지 않았다. 이제부터 어떻게 움직여야 하나, 그 생각을 할 뿐이었다.

테오가 슬쩍 덧붙였다.

“사실은 엘리제 영애도 함께 있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데려오지 말라고 말을 했건만.”

카를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이내 뭔가를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테오, 공작가로 편지를 한 통 보내. 내가 부르기 전까진 입궁하지 말라고.”

“예, 폐하.”

‘엘리제가 날 따로 부른 건 공작 위 이야기를 꺼내기 위함이었을 거야. 차라리 잘됐어. 엘리제가 움직일 의지가 있다면 굳이 테인의 손을 잡을 필욘 없지.’ 

“그리고 테오, 엘리제에게 은밀하게 연락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우라의 반응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회를 봐서 잘 설명하는 수밖에.

조쉬가 입을 열었다.

“폐하, 저번에 주문하셨던 새 검 말입니다. 이제 검집을 제작하려 하는데 특별히 박고 싶은 보석이 있으십니까?”

“아니. 네가 알아서 아무거나 박아 넣어.”

“조쉬의 심미안을 믿으시면 안 되실 텐데요.”

조쉬가 지지 않고 카를에게 일러바쳤다.

“폐하, 테오가 요즘 제게 너무 건방집니다. 분명 제가 기사단에 두 달은 더 빨리 들어왔는데요.”

카를이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싸움은 너희들끼리 해. 말했듯이 검집은 조쉬가-”

그가 멈칫했다.

“검집에 들어가는 보석은 황실 밖에서 제작하나?”

“네, 그렇습니다만.”

“그럼…… 그 보석 세공사를 잠시 들르라 해. 내가 따로 주문할 게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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