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35화
카를의 손이 아우라의 아래를 파고들었다.
“흡…….”
불을 끌 여유조차 없다는 그의 말은 사실인 듯했다. 그의 손이 다급하고 뜨겁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이따금 퍼지는 선명한 자극에 아우라가 신음을 뱉었다.
환하게 밝은 방과 막을 길 없이 터지는 신음. 이 선정적인 분위기에 아우라의 몸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그 모습은 분명 카를을 더 흥분시키고 있었다.
“후우…… 아우라.”
낮게 그르렁대는 그의 목소리에 아우라가 몸을 떨었다. 그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도망이라도 쳐야 할 것 같아서 그의 목을 놓았다.
그 행동에 뭘 느낀 건지 카를이 바짝 따라붙었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는 아우라에게 카를은 순간 약이 올랐다. 그는 아우라의 귓바퀴를 핥았다.
“아아…… 앗!”
그녀의 귓속으로 혀가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몰아닥치는 강한 자극에 아우라가 고개를 내저었다.
“잠……깐……. 아!”
카를은 집요하게 그녀의 귀를 핥았다. 제 가슴을 미는 무력한 손을 붙잡고 그녀가 쾌락에 몸을 맡길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며 움츠렸다. 결국 귀를 내어 주고 있지만 감당하기 어려워하는 건 여전했다.
“제발…… 아!”
기어이 고여 있던 눈물이 흘렀다. 카를은 그제야 혀를 거두고 대신 그녀의 눈물을 핥았다.
그녀가 쾌락과 원망이 뒤섞인 눈으로 그를 봤다. 평소라면 농담이라도 하며 분위기를 풀 법도 했지만 카를도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아우라의 무릎을 잡고 몸을 세웠다.
‘그 맨등을 보지 말았어야 했어.’
햇빛을 받고 서 있던 아우라. 훤히 드러난 맨등. 그걸 봐 놓고도 단추를 잠가 줬다. 무심한 척, 신사인 척.
결국 이렇게 다 뜯어 버릴 거면서.
흩어진 진주 단추들 위에 누운 아우라가 몽롱한 시선으로 그를 봤다. 이 모든 장면이 카를을 더 끓어오르게 했다. 그가 그녀의 다리를 제 어깨에 올렸다.
“……?”
낯선 자세에 아우라가 순간 정신을 차렸다. 이윽고 카를이 움직였다.
“아!”
느낄 수 있었다. 저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쾌락을.
아우라가 놀라서 입을 막았다. 카를은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아떼고 시트에 꾹 눌렀다. 이윽고 아우라의 입에서 신음이 아무렇게나 튀어나왔다. 막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그는 쉼 없이 몰아붙였다.
그녀는 할 수만 있다면 도망치고 싶었다. 이건, 이런 건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쾌락에 모든 걸 내맡긴 이 시간이 아찔하리만치 좋았다.
“아우라…….”
카를이 다가와 갈급하게 입을 맞췄다. 아우라는 그 입맞춤을 받아 주며 눈을 꽉 감았다.
***
“이거야, 원…….”
테인 공작의 얼굴에 못마땅함이 가득했다. 알현실에서 카를을 기다린 지도 벌써 몇 시간째였다.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공작을 이렇게 기다리게 할 순 없었다.
테인 공작이 결국 무릎을 탁 짚곤 일어났다.
“큼…… 저는 이만 가 봐야겠군요.”
옆자리의 엘리제가 그를 따라 일어났다.
알현실을 지키던 테오와 조쉬가 눈빛을 교환했다. 테오가 옷걸이에 걸린 테인 공작의 외투를 가져다주었다.
“외투는 여기 있습니다.”
언뜻 친절해 보이지만 은근한 조롱이 묻은 행동이었다. 테인 공작은 설명 못 할 불쾌감을 꾹 눌렀다.
“……고맙소.”
그가 빼앗듯 외투를 가져갈 때였다. 툭 하고 안주머니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손바닥만 한 벨벳 주머니에서 뭔가가 살짝 튀어나왔다. 엘리제가 그것을 눈여겨보았다.
‘반짝이는 조각……. 금고에 있던 거잖아.’
하지만 그녀는 그 정체를 알지 못했다. 테인 공작이 얼른 그것을 주워 외투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황제 폐하께 정말 유감이라고 전해 주십시오.”
“꼭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밤늦은 길 조심해서 돌아가십시오, 테인 공작님.”
테오가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조쉬도 덩달아 꾸벅 인사를 했다. 테인 공작은 속으로 그들을 욕했다.
‘황제나 그 참모들이나. 사람 놀리는 데에는 도가 텄군!’
“가자! 엘리제.”
테인 공작이 씩씩대며 알현실을 나섰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를 따랐다.
‘다행이야. 알현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황후가 황제를 붙잡아 준 것 같았다. 엘리제를 위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황후에게도 사정이 있었을 터. 하지만 엘리제로선 감사할 따름이었다.
엘리제가 방을 나서며 살짝 뒤를 돌았다. 조쉬와 문득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조쉬가 놀라서 허리를 푹 숙여 인사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여자는 무서워.’
***
수도 외곽 지역, 자유 용병단 기지.
루안은 그곳에서 야간 보초를 서고 있었다.
안센나를 떠난 후 그는 카사의 시골 하급 귀족의 아들로 신분을 세탁했다. 운 좋게 마이어가의 먼 친척이 카사에 살고 있던 덕분이었다. 루안은 그들의 도움으로 신분을 바꾸고 용병단에 들어왔다.
소문에 따르면 황실군이 가끔 이곳에서 기사를 뽑아 간다고 했다. 루안은 그 기회를 노리는 중이었다. 그로선 기사가 되어 황궁에 들어가는 게 가장 좋았다. 일단은 검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점이 그랬다.
“에밀.”
한 용병이 다가왔다. 에밀은 루안의 가명이었다.
“교대할 시간 됐어.”
“아, 벌써?”
“자식, 넌 혼자 있으면 가끔 멍해지더라.”
용병이 루안의 어깨를 툭 쳤다. 루안이 머쓱하게 웃곤 돌아섰다.
“그럼 난 들어갈게. 고생해.”
“아, 에밀.”
“응?”
“본부에 황궁 기사들이 왔던데. 네가 기사단에 관심이 있다고 했던 것 같아서.”
‘……때가 됐군.’
루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조금. 고마워.”
황실이 자유 용병을 뽑아 가는 건 게릴라식으로 이루어졌다. 난데없이 나타나 실력 검증을 하고 데려가는 방식이었다. 그것도 꽤 거친 방법으로. 출신을 장담할 수 없는 만큼 확실한 실력자를 뽑겠다는 것이었다.
용병이 걱정하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웬만하면 가지 마라. 고작 한 명 뽑는 주제에 수십 명 개싸움을 붙인다더라.”
루안은 말없이 웃으며 돌아설 뿐이었다. 그는 본부를 향해 걸었다. 둥글고 부드러운 눈매 안에서 맑은 눈동자가 담담하게 빛났다.
‘수십 명 싸움을 붙인다면 마음을 단단하게 먹어야겠네.’
그는 습관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작은 금단추가 만져졌다. 그리고 또 습관처럼 아우라를 떠올렸다.
루안이 고작 열 살 때의 일이었다. 고위 귀족인 아버지를 따라 들어간 제니아 왕궁. 그는 그곳에서 아우라를 처음 만났다.
“왕녀님이시다, 루안. 인사드려라.”
아버지의 말에 루안이 성의 없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수수한 원피스를 입고 밝은 금발을 양옆으로 딴 소녀. 그 소녀는 제법 예를 갖춰 인사를 받아 주었다.
“반가워요, 루안. 마이어가의 장남을 만나서 영광이에요.”
루안은 속으로 빈정거렸다.
‘모두가 절절매길래 얼마나 특별한가 했는데. 그냥 예쁘장한 여자애일 뿐이잖아.’
제니아 왕가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 어렸을 적부터 루안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었다.
“이놈이! 왕녀님께 인사를 제대로 해야지.”
아버지는 루안의 머리를 꾹 눌렀다. 아우라가 작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인사는 제가 즐겁게 받았으니 괜찮아요. 혼내지 마세요.”
“아하하…… 왕녀님은 참 마음이 넓으십니다.”
루안은 또 빈정거렸다.
‘착한 척하기는.’
그도 귀족가에서 귀하게 자란 장남이었다. 황제라면 모를까, 동갑내기 여자애를 우러러볼 마음은 없었다.
아버지는 어른들과 어려운 이야기를 시작했다. 엉겁결에 루안은 아우라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루안, 산책할래요?”
아우라가 웃으며 물었다.
‘왜 존댓말을 하는 거야? 만만히 보지 말라는 건가.’
하지만 자신은 선택의 여지 없이 존댓말을 해야 했다. 그 점이 또 자존심이 상하는 루안이었다.
“……원하시면요.”
“동산에 예쁜 곳이 많아요. 제가 데려다줄게요.”
아우라가 앞장섰다. 루안이 뻘쭘하게 뒤따라갔다. 아우라가 뭐라 재잘거릴 때마다 루안은 대충 대답했다.
아우라의 말대로 왕궁 동산은 아름다웠다. 후계자 공부에 치여 있던 루안도 한숨 돌릴 정도로.
이윽고 호수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잠시 그 앞에서 숨을 돌렸다.
“항상 시녀와 함께 왔는데 이렇게 또래 친구와 온 건 처음이에요.”
“친구요?”
“네! 우리 동갑이잖아요.”
아우라가 해사하게 웃었다. 루안은 팔짱을 끼고 오만하게 말했다.
“저는 왕녀님의 친구가 될 수 없을 텐데요.”
“네?”
“기껏해야 부하가 되겠죠, 뭐. 저는 왕녀님의 기사가 될 마음도 없으니까요.”
천진하게 동산을 돌아다니는 이 소녀는 모를 것이다. 고작 그 부하가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부를 하는지. 가끔은 마이어가에서 태어난 게 후회될 정도였다.
아우라가 말이 없자 루안은 뒤늦게 아차 싶었다. 말이 너무 심했을지도 몰랐다. 왕녀가 한바탕 울어 버리면 그런 낭패도 없었다.
그때 아우라가 루안의 손을 잡았다.
“난 부하보다는 친구가 좋은데. 루안은 친구보단 부하가 좋은가요?”
루안이 멈칫했다. 왕녀는 상처를 받기는커녕 할 말을 잃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낯선 상황은 어린 루안을 충동적으로 만들었다.
“친구가 되어 줄 거예요?”
“그럼요!”
아우라가 환하게 웃었다. 루안이 물었다.
“그럼 장난쳐도 돼요?”
“네?”
루안이 아우라를 호수로 밀었다. 욱하는 마음에서였다. 진심으로 그런 말을 제게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풍덩.
아우라가 호수에 빠졌다. 루안은 얼른 호수로 몸을 던졌다.
루안은 수영을 굉장히 잘했다. 여자애 하나를 물 위로 내보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는 바로 아우라를 물 위로 내보냈다. 아우라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서 숨을 몰아쉬었다.
루안은 뒤늦게 후회했다.
‘……아, 아버지한테 죽었다. 뭐라고 변명하지? 왕녀가 다 일러바칠 텐데.’
그러나 아우라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다.
“그럼 우린 이제 친구인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