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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34)화 (34/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34화

아우라는 순순히 카를을 따라 테라스를 나섰다. 그 앞에는 조쉬와 테오 그리고 테인 공작이 있었다. 카를에게 모든 걸 일러바친 조쉬는 아우라의 시선을 얼른 피했다.

테오가 카를에게 말했다.

“폐하, 이제 테인 공작과 알현실로 가셔야 합니다.”

그러자 카를이 테인 공작에게 말했다.

“알현실에서 조금만 기다리게, 공작.”

“아…… 예. 알겠습니다, 폐하.”

테인 공작이 내키지 않는다는 듯 대답했다.

카를은 아우라를 데리고 연회장을 가로질렀다. 무도회가 마무리된 연회장은 조용하고 쓸쓸한 데가 있었다.

아우라는 앞서가는 카를의 등을 올려다보았다. 이를 꽉 문 듯한 턱도.

그들이 도착한 곳은 휴게실이었다. 그는 문을 닫자마자 아우라에게 물었다.

“말해 봐. 대체 무슨 짓이야, 아우라.”

아우라가 대답 대신 엘리제의 쪽지를 내밀었다. 카를은 그것을 읽더니 단번에 구겨 버렸다.

“이게 왜 너에게 있지?”

“테라스에서 나오는 대로 네게 전해 주려고 했어.”

“나는 이게 왜 너에게 있는 거냐고 물었어. 왜 중간에 쪽지를 가로챈 건지.”

그는 낮고 서늘하게 아우라를 몰아붙였다. 아우라는 말없이 그를 가만히 보기만 했다.

“공작가와 손을 잡는다면 황태자 패거리였던 테인보다는 엘리제 쪽이 나아. 엘리제를 먼저 봐야 했어.”

“…….”

“너도 엘리제를 봤잖아. 제 삼촌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괜찮은 사람이라는 거.”

괜찮은 사람.

그 말에 아우라의 눈빛이 흔들렸다. 말이 없는 아우라를 카를이 비웃었다.

“대체 목적이 뭐야? 설마 질투라도 해? 전혀 아니잖아. 넌 날 좋아하지도 않잖아.”

“…….”

“그런 것도 아니면서 대체 왜 일을 꼬이게 하는 거지? 이것도 사람 상처 주는 일의 일환이야?”

“…….”

“……환장하겠군. 그만두자.”

카를이 손을 휙 내젓더니 휴게실을 나서려 했다. 아우라가 그의 팔을 잡았다.

“가지 마.”

“뭐?”

“알현, 가지 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카를이 그녀의 손을 뿌리치려 할 때였다.

“나, 라이언과 춤 안 췄어.”

그 말에 카를이 뒤를 돌았다. 그녀는 한 치의 동요도 없이 그를 보고 있었다.

“그게 내가 테인 공작에게 가는 것과 무슨 상관이지?”

“엘리제가 거기에 갈 테니까.”

“…….”

“그러니까 가지 마.”

아우라가 그의 팔을 더 꽉 잡았다. 카를은 헛웃음을 짓더니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아우라를 쏘아보았다.

“……상관없다며.”

“사실은 있었나 보지.”

말장난 같은 대답에 그가 이를 꽉 물었다. 아우라에게 진심이냐 물으면 그렇다고 고개라도 끄덕일 기세였다. 이미 그를 여러 번 속였던 그 얼굴로.

분명 그녀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결국 카를은 이렇게 되묻고 말았다.

“안 가면? 안 가면 넌 내게 뭘 해 줄 거지?”

“사랑한다고 해 줄게.”

“……뭐?”

“널 사랑한다고 말해 줄게.”

더는 참아 줄 수가 없었다. 카를은 그녀의 어깨를 꽉 잡고 내려다보았다.

“……그건 거짓말이잖아.”

“거짓말이어도 너는 듣고 싶잖아.”

“하! 기가 막히는군.”

엘리제와 만나는 건 싫다면서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이라니.

카를은 아우라의 어깨를 놓았다. 그리고 그녀가 잡고 있던 팔을 가볍게 뿌리쳤다.

“그런 값싼 거짓말에 휘둘리진 않아, 아우라.”

카를은 그대로 휴게실을 나가 버렸다.

쾅!

있는 힘껏 문을 닫은 카를이 거침없이 복도를 걸었다. 목적지는 단 하나, 알현실이었다.

아우라가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짓을 할 때마다 그는 미칠 것 같았다. 사람을 대체 뭐로 보는 건지 그 머릿속이 궁금할 지경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그는 복도를 걸으며 휴게실에서의 일을 되짚어 봤다.

아우라는 가지 말라는 말을 참 여러 번이나 했다.

‘그 말이 어떤 의미로 들리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사실은 상관이 있다는 말은 또 얼마나 기만적인가.

‘질투하는 척을 해서 일을 꼬이게 만들려는 작정이겠지.’

하지만 이번에도 가장 화가 나는 건, 또 아우라에게 휘말린 자기 자신이었다.

‘안 가면 뭘 해 줄 거냐고? 그런 무의미한 질문은 어쩌자고 던진 건데.’

그가 걸음을 뚝 멈췄다. 저 복도 끝에 알현실이 있었다.

‘사랑한다고?’

안 듣느니만 못한 말을 들었다. 그녀에게 들었던 말 중에서 가장 불쾌했다. 차라리 검으로 옆구리를 찔렸을 때가 나을 만큼.

카를은 천천히 알현실을 향해 걸어갔다.

‘이번에는 절대 속지 않아, 아우라.’

***

아우라는 황후의 방으로 돌아왔다.

“폐하, 휴식을 도와드릴까요? 드레스부터 벗으심이…….”

으레 시중을 들려던 미나가 입을 다물었다. 아우라의 표정이 너무나 좋지 않았다.

“나가 줘, 미나.”

“……네. 필요할 때 불러 주십시오.”

미나는 눈치껏 방을 나섰다. 아우라는 양손으로 테이블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하아…….”

‘대체 내가 왜 그런 소릴…….’

‘사랑한다고 해 줄게.’

아우라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아니, 휴게실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 다 그런 식이었다.

처음에는 상황을 설명하고 카를을 보낼 생각이었다. 엘리제는 그의 말대로 괜찮은 사람 같았으니까. 하지만 카를이 휴게실을 나가려고 할 때,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를 붙잡았다.

모순적인 말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어린애처럼 군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질투? 그럴지도 몰랐다. 엘리제는 자신이 잃은 것들은 가지고 있으니. 그리고 그 사실을…… 카를이 아는 게 싫었다.

“하아…….”

몸에 힘이 빠진 아우라가 천천히 주저앉았다. 휴게실을 나가던 카를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망설임 없이 사라져 가던 구둣발 소리도.

그때였다.

문밖이 소란스러웠다. 미나의 놀란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벌컥 문이 열렸다.

아우라는 방으로 들어온 이를 멍하니 보았다. 자신이 주저앉아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카를이 성큼성큼 아우라에게 다가왔다.

“!”

그는 그녀를 잡아 단번에 일으켰다. 아우라는 높은 구두 때문에 살짝 휘청였다. 그런 그녀의 허리를 카를이 확 감아 안았다.

카를은 들끓는 것 같은 눈으로 아우라를 보았다. 몹시 화가 난 듯도, 조급한 듯도 했다.

“말해.”

“……어?”

“너한테 왔잖아. 그러니까 말해. 거짓말이라도.”

순간 아우라의 눈앞에 뭔가가 생생하게 펼쳐졌다.

알현실 앞에서 멈춰진 걸음.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시선. 자신조차도 스스로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표정. 입술을 씹으며 내뱉는 한숨. 마지막에는 결국 다시 돌아서는 그 몸짓.

사랑스러웠다. 그 걸음과 표정과 몸짓만큼은.

카를이 그녀의 목덜미를 휘어잡았다.

“빨리.”

“사랑해, 카를.”

“한 번만 더.”

아우라는 밤새도록 말해 줄 수 있었다. 지금 이 기분이라면 얼마든지.

“정말이야. 너만을 사랑할 거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를이 입을 맞춰 왔다. 그는 아우라의 입을 먹어 치우려는 것 같았다. 입술을 이로 잘근거릴 때마다 아팠다. 급하게 들어온 혀에 짓눌리는 연한 살도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아우라는 그 입맞춤을 고스란히 받아 주었다.

숨이 버겁다 못해 막혀 왔다. 뜨거운 기운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하아…….”

견디다 못한 아우라가 고개를 돌리고 밭은 숨을 내쉬었다. 카를이 그녀를 번쩍 안아 들더니 곧장 침대에 눕혔다.

그는 그녀를 잡아먹을 듯 보며 다시 입을 맞췄다. 그의 뜨거운 손이 아우라의 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그의 손에 구두가 걸렸다.

“대체 이 높은 걸 아직도 안 벗고 뭘 한 건데.”

“왜 화를 내?”

“화가 안 나겠어?”

카를이 그녀의 구두를 한 쪽씩 벗겨 침대 밖으로 던졌다. 구두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휴게실을 나오면서 겨우 너에게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아우라를 확 일으켜 끌어안았다. 그리고 드레스의 단추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등을 타고 올라오는 손길에 아우라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까 너에게 돌아가고 있잖아.”

“하하…….”

상상이 꼭 들어맞아서 아우라는 웃음을 터트렸다.

“화날 만하네.”

“시끄러워.”

순간 그가 아우라를 꽉 끌어안았다. 그녀는 숨이 턱 막혀 오는 듯했다. 하지만 말해 봤자 놔줄 것 같지도 않았다.

카를이 단추를 위쪽부터 풀기 시작했다. 툭, 툭.

“빌어먹을 단추. 이걸 얼마나 풀어 버리고 싶었는지 넌 모를 거야.”

“언제부터?”

“내 손으로 잠갔던 순간부터.”

카를이 아우라의 목덜미를 아프지 않게 씹었다. 그 자극에 아우라가 몸을 틀었다.

“같이 춤을 출 때도.”

툭, 툭.

“휴게실에서도.”

툭, 툭.

“제기랄.”

단추는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 작은 것들은 조급한 그의 손에서 몇 번이나 미끄러졌다. 그의 손등에 핏대가 올라왔다.

“드레스. 새로 사 줄게.”

“뭐?”

카를이 드레스 양옆을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양쪽으로 잡아 뜯었다.

투두둑…… 투둑.

동그란 진주 단추들이 침대로 우수수 떨어졌다.

갑자기 허전해진 등에 아우라의 눈도 동그래졌다. 카를은 그런 그녀를 그대로 밀어 눕혔다. 카를은 그 진주들 사이에 누운 아우라를 바라보며 자신의 셔츠를 벗기 시작했다. 상처투성이인 상체가 그녀의 앞에 드러났다.

그러니까, 그런 그의 몸이 너무 잘 보였다. 아우라는 비로소 이곳이 너무 환하다는 걸 깨달았다.

“카를, 불이라도 좀 끄고…….”

“그럴 여유가 있었으면.”

카를이 그녀의 드레스를 잡고 단번에 끌어 내렸다. 아우라가 급히 몸을 가리려 했지만 그 손을 저지하는 카를이 더 빨랐다.

“……그랬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뜨거운 손이 허벅지를 타고 올라왔다. 불타는 듯한 카를의 시선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말해 주는 듯했다.

아우라는 시트를 쥐려다가 그의 목에 매달리듯 팔을 둘렀다. 카를이 멈칫하더니 그녀의 어깨에 살짝 입을 맞췄다. 괜찮을 거라는 듯이.

벌써 숨이 달뜬 아우라가 그를 빤히 보았다.

“카를.”

“왜.”

“난 네가 싫어.”

“알아.”

“그런데 말이야. 생각을 해 봤는데…….”

그녀는 그의 목을 조금 더 꽉 안았다.

“네가 날 혼자 두는 건 더 싫은 것 같아.”

카를이 아우라를 말없이 보았다. 그가 그녀의 목덜미를 감싸고는 입을 맞췄다. 두 개의 혀가 부드럽게 얽혔다. 아우라는 그 달콤함이 전신을 통해 퍼지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카를이 말했다.

“그래. 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게, 아우라.”

허벅지에 머물러 있던 그의 손이 다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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