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33화
테인 공작은 초조해졌다. 황제가 황후와 춤을 춘 후 휴게실로 가 버렸기 때문이다.
‘수다스러운 대신 놈들을 생각하면 금방 끝나지 않을 텐데.’
엘리제는 여전히 인형처럼 앉아만 있었다. 엄청난 돈을 들인 드레스가 아까울 지경이었다.
테인 공작이 엘리제에게 속삭였다.
“황제 폐하께서 나타나시면 내가 자리를 마련해 주마. 함께 춤을 한 곡 추렴.”
어차피 후궁 건은 알현 자리에서 논할 작정이었다. 그 전에 사람들에게 눈도장을 박아 놓자는 게 그의 계획이었다. 카를과 엘리제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말이다.
잠잠히 있던 엘리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딜 가려고 그러느냐.”
“춤을 추게 해 주세요.”
“무슨 소리냐. 아무나하고 춤을 추라고 데려온 줄 아느냐?”
“글쎄요. 혹시 저분도 ‘아무나’에 들어가나요?”
엘리제가 가리킨 곳에는 조쉬가 있었다. 그는 연회장 구석에서 테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황제의 기사. 분명 최측근이었다. 황제가 없는 지금 상당히 의미 있는 춤 상대였다.
‘이 녀석이? 숙맥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런 머리를 쓴다고?’
“……저 기사를 데려다주랴?”
“네. 그게 좋겠어요, 삼촌.”
“좋다. 기다려라.”
테인 공작은 조쉬에게 다가갔다. 황제의 최측근 기사들이 고위 귀족을 상대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조쉬는 여유롭게 테인 공작을 맞이했다.
그러나 잠시 후.
“풉!”
조쉬는 입에 있던 샴페인을 내뿜었다. 그는 창백해져서는 엘리제를 보았다.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
딱 그렇게 묻는 표정으로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막무가내인 테인 공작을 이길 순 없었다. 조쉬는 어떻게든 해 달라는 듯 테오 쪽을 보았으나 그는 약삭빠르게 도망친 후였다.
결국 조쉬가 울며 겨자 먹기로 엘리제에게 왔다. 샴페인에 젖은 조쉬의 손을 본 엘리제가 손수건을 내밀었다.
“가, 감사합니다.”
조쉬가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손을 닦았다. 상대가 엘리제인 건 둘째 치고 사실 조쉬야말로 숙맥이었다.
그는 어색하게 말문을 열었다.
“춤을…… 추고 싶으시다고…….”
“네. 실례가 아니라면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아, 예. 그런데 제가 춤을 잘 추지는 못하는데…….”
“괜찮습니다.”
“아…… 네. 그럼 가시죠.”
조쉬가 손을 내밀었다. 엘리제가 그의 손을 잡고 무도회장으로 나갔다.
예상치 못한 조합에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그리고 그 광경은 아우라의 시선을 끌기에도 충분했다.
‘……뭐지, 저 둘은?’
조쉬와 엘리제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엘리제는 눈을 살짝 내리깔고 교과서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반면 조쉬는 내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엘리제를 슬쩍 보다가도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기를 반복했다.
무도곡이 끝났다. 엘리제가 바로 뒤로 물러났다.
“춤 신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사님.”
“아, 네. 영광이었습니다, 영애.”
조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끝이구나 싶었을 때였다.
“손수건을 돌려주시면 좋겠는데요.”
“아, 예.”
조쉬가 얼른 주머니에 넣었던 손수건을 내주었다. 엘리제가 그것을 받는 순간이었다. 조쉬가 움찔했다.
그의 손에 작은 종이가 넘어와 있었다.
***
조쉬가 무도회장을 나서자 테오가 곧장 따라붙었다. 그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얼굴로 조쉬에게 물었다.
“조쉬, 괜찮아? 얼굴이 진짜 이상하던데. 빨개졌다가, 창백해졌다가.”
“닥쳐. 따라오지 마. 바람 좀 쐬고 올게.”
그는 바쁜 걸음으로 기사용 쪽문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한참 걷다가 보는 눈이 없는 걸 확인하곤 소매에서 쪽지를 꺼냈다.
「황제 폐하께 전달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조쉬는 얼마 전 카를이 했던 말을 기억했다.
‘만약 엘리제가 따로 날 보자고 하면…… 아무도 모르게 조심스럽게 진행해.’
올 게 왔구나 싶었다. 물론 순진한 자신을 이용한 엘리제 영애가 좀 너무하단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쨌거나 이 복도를 통해 본궁 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 그럼 몰래 옆문으로 다시 들어와 휴게실 앞으로 가리라.
‘그렇게 하면 테인 공작의 눈에 띄지 않겠지. 폐하가 나오시는 대로 전달하면 되겠어.’
조쉬가 다시 복도를 걸으려 했을 때였다.
“조쉬.”
익숙한 목소리에 그가 입을 떡 벌렸다. 그는 이것이 제발 환청이길 바랐다.
“조쉬, 뒤를 도세요.”
조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고 애써 웃으며 뒤를 돌았다.
아우라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어딜 가시는 길인가요?”
“아…… 네, 황후 폐하. 안의 공기가 답답해서…… 바람이라도 쐬려고요.”
“으흠. 바람이라.”
‘바람’.
조쉬는 자신의 단어 선택을 후회했다. 자신이 가진 건 카를에게 보내는 엘리제의 밀서였다. 황후 입장에선 충분히 바람처럼 보일 수 있었다.
아우라가 싱긋 웃었다.
“엘리제 영애와의 춤은 즐거웠나요?”
“전혀 아닙니다. 춤이야 뭐 다 똑같지 않겠습니까.”
조쉬가 아우라의 눈을 피했다. 아우라가 팔짱을 끼더니 조쉬의 꽉 쥔 주먹을 보며 말했다.
“손에 쥔 건 뭔가요?”
“으하아…….”
조쉬는 자기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텁 하고 입을 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미친. 아주 그냥 쪽지를 갖다 바쳐라. 이 바보 같은 놈.’
“엘리제 영애가 전하라고 하던가요? 황제 폐하께?”
이쯤 되니 조쉬는 체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예.”
“혹시 제가 봐도 될는지요.”
아우라는 손을 내밀었다.
“지, 진심이십니까? 안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황제 폐하께 갈 쪽지입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한낱 영애가 보냈죠. 작위도 없는. 그 정도는 제가 봐도 괜찮지 싶은데요.”
맞는 말이었다. 황후는 황제의 여자관계를 막을 순 없어도 알 권리는 있었다.
조쉬는 결국 편지를 내어 주었다. 아우라가 쪽지를 열었다.
“…….”
아우라는 다시 쪽지를 접더니 제 소매에 넣어 버렸다.
“아, 안 돌려주시는 겁니까?”
“이건 제가 폐하께 직접 전달하죠. 경은 지금까지 고생 많았어요.”
아우라가 그대로 뒤돌아 가려 했다. 당황한 조쉬가 급히 아우라를 불렀다.
“폐, 폐하!”
“네. 무슨 일인가요?”
아우라가 태연히 몸을 돌렸다. 조쉬는 얼빠진 얼굴로 그녀를 보다가 겨우 한마디 물었다.
“대체 어떻게 아신 겁니까……?”
엘리제는 정말 조심스럽게 종이를 건넸다. 먼 곳에 앉아 있던 아우라가 그것까지 보았을 리 없었다.
아우라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라면 그럴 것 같아서요.”
***
연회장 서쪽의 마지막 테라스.
인적 드문 이곳에서 엘리제는 혼자 서 있었다. 서늘한 밤바람이 불어왔다. 엘리제의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테인 공작에겐 화장을 고치고 오겠다고 말해 둔 참이었다. 그러나 곧 무도회는 끝날 것이다. 그러면 그는 엘리제를 찾기 시작할 게 분명했다.
엘리제는 점점 초조해졌다.
‘시간이 없어…….’
그때, 사락 하는 소리와 함께 등 뒤의 커튼이 걷혔다. 엘리제가 얼른 뒤로 돌다가 흠칫 놀랐다.
“……황후 폐하.”
엘리제가 황급히 예를 표했다. 아우라가 웃으며 다가왔다.
“누구를 기다리고 있지?”
엘리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우라도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연회장 서쪽 가장 끝 테라스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부디 공작과의 알현 전에 저를 만나 주십시오.”
“…….”
“라고, 적었던데.”
엘리제가 고개를 들어 아우라를 보았다.
“그럼 내 남편을 왜 이토록 은밀하게 만나고자 했는지 그 이유부터 좀 들어 볼까?”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재주가 좋군.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짐작할 수 있다니.”
“황공합니다. 하지만 귀족가에 떠도는 소문과는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그 말에 책임을 질 순 있고?”
평범한 영애였다면 울음이라도 터트릴 상황이었다. 일단 황제와의 밀회 시도를 황후에게 들켰다는 점부터가.
그러나 엘리제는 떨림을 누르고 제 이야기를 했다.
“황제 폐하를 그런 식으로 불러낸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제 삼촌인 테인 공작의 눈을 피해야 했습니다. 저는…… 후궁이 되는 걸 피하고자 이번 일을 시도한 것입니다.”
“황제 폐하를 만나면 영애의 상황이 달라지나?”
“제 처지를 밝히고 도움을 받고자 했습니다.”
아우라는 엘리제의 녹안을 가만히 보았다. 순하지만 용기를 아는 눈이었다. 세상을 죽을 만큼 원망해 본 적 없는, 예전의 아우라가 가졌던 눈.
엘리제의 의도를 알았으니 이쯤하고 나갈 수도 있었다. 공작가의 일 같은 걸 상관할 만큼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하지만 아우라는 그녀의 어설픔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영애가 어떤 목적으로 카를을 불러냈는지는 관심 없어.”
엘리제의 눈이 살짝 커졌다. 황제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 그것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후궁으로 만들어 달라고 조르건, 혹은 공작 위를 되찾고 싶어서 후궁이 되지 않게 해 달라고 조르건.”
“…….”
“이토록 조심스럽고, 은밀하고, 은근하고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아우라가 엘리제에게 손을 뻗었다.
“아무도 모르게 도움을 받고자 했다?”
손끝이 엘리제의 귓바퀴를 스치며 머리칼을 넘겼다.
“너무 순진해.”
“……아.”
“나라면 도움을 바랄 게 아니라 거래를 하겠어. 카를이 거부할 수 없는 뭔가를 들고 와서.”
“!”
“왜? 지금 가진 걸 잃을까 봐 두려워? 그럼 그 이상 아무것도 가지지 못해.”
엘리제의 눈빛이 잠시 흔들리더니 이내 똑바로 아우라를 보았다.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명심하겠습니다.”
겸손하면서도 진실한 태도였다. 공작에 어울리는 배포는 갖추지 못했지만 분명 사랑스러운 데가 있었다. 특히 누군가의 ‘부인’이 된다면 아마도 큰 사랑을 받으리라.
‘많은 이들이…… 흠을 안 잡은 이유가 있군.’
그때였다.
“아우라.”
테라스의 커튼을 걷고 카를이 나타났다. 그는 다가와서 아우라의 어깨를 짚곤 무표정하게 말했다.
“황후는 나를 잠깐 보는 게 좋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