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32화
카를은 한참 후에야 대답했다.
“정치적인 일이야.”
아우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대신도 아닌 테인 공작을 ‘정치적’으로 볼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공작가의 입장에선 후궁 건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일일 텐데.
아우라는 반쯤 체념하는 마음으로 말했다.
“후궁을 들이고 싶으면 들여. 난 상관없어.”
상관없어.
그 말에 막 마지막 단추를 채우던 카를의 손이 멈칫했다.
“카를?”
이상한 낌새에 아우라가 그를 불렀다. 카를은 단추를 마저 채우고 아우라의 앞으로 갔다.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아우라는 알 수가 없었다. 카를은 왜 이토록 화가 난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그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이내 눌러 참았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할 말이 한 가지 더 있어, 아우라.”
“말해.”
“라이언과 접촉하지 마.”
“저번에는 이센이더니, 이번에는 대공이야?”
“반역 혐의가 있는 사람을 피해야 하는 건 당연해.”
아우라는 피식 웃었다.
“난 황후고, 내가 원하는 사람과 접촉할 수 있어. 내키면 춤도 출 수 있지.”
“라이언과 춤을 추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그럴 수 있는 결정권은 내게 있다는 거야. 네가 테인 공작을 만나듯이.”
그녀는 카를과 거리를 벌리려는 듯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자 카를이 그녀의 팔을 잡아 세웠다.
아우라가 물러나지 않고 그를 똑바로 보며 물었다.
“왜? 내 말이 틀렸어?”
“아니, 맞는 말이야. 하지만 한 가지 놓치고 있는 것 같아서. 저번에 라이언과 한 산책, 누가 제안했지?”
“……대공.”
“그럴 줄 알았어. 대공이 이따금 네 이야기를 꺼내더군. 나는 그 자식의 그런 행동들이 거슬려. 그 개자식이 황족만 아니면 일찍이 어떻게든 해 버리는 건데.”
“…….”
“나는 너와 달리 네가 다른 놈들이랑 어울리는 게 무척이나 상관있는 사람이거든. 그게 황족이건 뭐건.”
그 말에 아우라의 눈이 살짝 커졌다. 카를이 조소하며 물었다.
“왜? 내가 미친놈 같아?”
“……조금.”
“잘됐네. 그러니 기억해 둬. 라이언과 춤을 추면 여기서 더 미쳐 버릴 테니까.”
아우라는 할 말을 잃었다. 그가 이렇게 집착적인 면모를 가감 없이 드러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녀의 목울대가 천천히 오르내렸다. 저 거친 언사에 겁이 났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호기심이 들었다.
‘더 미쳐 버리면? 어떻게 되는 건데? 넌 어디까지 갈 수 있어?’
카를은 그제야 아우라의 차림을 제대로 훑어보았다. 딱 붙는 은빛 드레스가 그녀의 몸 선을 따라 부드럽게 떨어지고 있었다.
“드레스 잘 골랐네. 잘 어울려.”
“……나가자. 시간이 다 됐어.”
아우라는 그의 시선에서. 아니, 제 생각에서 벗어나듯 고개를 돌렸다.
***
연회장은 말도 못 하게 화려했다. 특히 긴 겨울의 추위를 보내 주듯 따뜻한 불빛이 그 안을 환하게 채웠다.
한껏 차려입은 귀족들이 엘리제를 보며 수군거렸다.
“엘리제 영애의 차림 좀 보세요. 평소엔 그렇게 수수하더니. 의도가 훤히 보이네요.”
“테인 공작이 좀 신경을 썼겠어요?”
“뭐, 그래도 예쁘긴 하니까요.”
엘리제의 귀에도 그들의 말이 언뜻언뜻 들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동요하지 않았다. 모욕이나 뒷말은 자존심으로 버틸 수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내내 아우라에게 박혀 있었다. 카를과 춤을 추고 있는 아우라의 드레스가 샹들리에 불빛에 찬란하게 빛났다. 곳곳에서 아름답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그러나 엘리제는 다른 것을 보았다. 아우라의 곧은 자세와 차분하고 단단한 눈빛. 유폐의 고통을 능숙하게 털어 낸 듯한 미소. 그녀가 닮고 싶은 당당함 같은 것들.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대화를 나눠 볼 수 있을까.’
당장은 어려울 것 같았다. 테인 공작이 낸 소문 때문에라도 황후는 자신을 못마땅하게 생각할 테니.
한편 카를과 아우라는 말없이 춤만 추고 있었다. 아우라는 자꾸만 아까 카를이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너와 달리 네가 다른 놈들이랑 어울리는 게 무척이나 상관있는 사람이거든.’
그는 자신을 좋아하니 라이언을 거슬려 하는 게 당연했다. 문제는 ‘너와 달리’라는 부분이었다. 그 말의 바닥에 깔린 마음이 이제야 짐작이 갔다.
‘후궁을 맞아도 상관없다는 말이 서운했나.’
하지만 테인 공작을 만나는 일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건 카를이었다. 그런 그가 이해가 안 갔지만, 아우라는 슬쩍 물었다.
“……엘리제 영애는 어떤 사람이야?”
“그걸 왜 물어? 상관없다며.”
“사람들이 하도 떠들어 대니까 좀 궁금해져서.”
“변덕은.”
카를이 그녀의 등을 좀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그의 손가락이 진주 단추를 살짝 더듬었다.
“……그래서, 말 안 해 줄 거야?”
“엘리제는…….”
카를은 잠시 말을 골랐다.
“안타까운 데가 있지.”
“안타깝다니?”
아우라는 내심 놀랐다. 그의 입에서 그런 감정적인 단어가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선대 공작은 엘리제의 부친이었어. 고명딸인 엘리제를 많이 아꼈고, 많은 걸 가르쳤지. 내 생각엔 공작 위를 물려주려고 했던 것 같아.”
아우라는 엘리제를 떠올려 보았다. 훌륭한 영애 같긴 했지만 가주가 되기엔 다소 유약해 보였다.
“선대 공작이 죽기 전까지 엘리제가 공작가 영지의 실무를 도맡았더군. 그런데 황태자가 정권을 잡고 있을 때 지금의 테인 공작이 황실에 로비를 한 것 같아. 그리고 선대 공작이 죽자마자 자연스럽게 공작 위를 뺏어 갔지.”
“선대 공작의 유언 같은 건 없었대?”
“없었어.”
“이상한 일이네. 가주들은 유언장을 써 두는 게 관례인데.”
“모르지. 엘리제의 불운인지, 어떤 계략이 있었던 건지.”
아우라는 테인 공작의 속내를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엘리제를 후궁으로 밀어 넣으려고 하는 거군. 황실과 연을 만들 수도 있고, 엘리제를 작위 싸움에서 완전히 밀어낼 수도 있으니.’
치졸하기 짝이 없는 수법이었다. ‘안타깝다’는 말의 의미도 이해가 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이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었지만.
툭.
카를의 손끝이 단추를 건드리는 느낌이 났다. 실수인가 싶은 순간 그가 또 장난처럼 단추를 건드렸다.
“조심해. 그러다 풀어지겠어.”
그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아우라.”
“응.”
“이렇게 해. 너나 나나 춤은 이번 한 번만 추는 거야. 공평하게.”
아우라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자신이 라이언과 춤출 수 있는 것처럼 그도 엘리제와 춤출 수 있다는 것을.
마침 첫 곡이 끝났다. 귀족들이 우르르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카를은 아우라를 놓지 않았다.
“대답해.”
아우라는 대답 대신 제 손끝에 입을 맞추고 카를의 뺨에 댔다.
“생각해 보고.”
애교인지 놀림인지 모를 행동에 카를이 멈칫했다. 아우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를 빠져나갔다.
카를이 그녀를 따라가려던 순간이었다. 한 무리의 대신들이 그를 둘러쌌다.
“폐하, 이번 모피 교역 건에 관해서 급하게 의논을 드릴 게 있습니다만, 시간을 좀 내어 주시겠습니까?”
모피는 카사 제국의 주요 수출품이었다. 그 가격과 양, 관리와 품질을 결정하는 건 굉장히 중요했다.
‘지금 시작하면 한나절은 잡혀 있을 텐데.’
하지만 이런 문제를 미뤄 둘 순 없었다. 그는 얕은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야기를 나누지.”
“네. 그럼 잠시 휴게실로 가시지요.”
카를과 대신들이 연회장에 딸린 휴게실로 향했다.
***
아우라는 귀족들의 인사를 받아 주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저 멀리 엘리제와 테인 공작이 보였다. 엘리제에게 눈길을 주는 영식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곁의 테인 공작 때문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라이언이 아우라에게 다가왔다.
“황후 폐하.”
“대공. 무도회는 재미있게 즐기고 있나요?”
“네. 수도의 연회는 역시 좋군요. 다들 활력이 있어서.”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군요. 이제 슬슬 수트라로 돌아가실 준비를 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이 연회만 즐긴 후 바로 떠날까 합니다.”
“아쉽군요, 대공. 이야기를 얼마 나누지도 못했는데.”
라이언이 빙긋 웃었니 아우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음악이 좋습니다. 아직 한 곡밖에 추지 않으신 것 같은데. 저와 이어서 추시죠.”
북부인의 피가 흐르기 때문일까. 그의 손은 유난히 푸르고 창백했다.
라이언은 이미 카를의 눈 밖에 났다. 아마 이번에 수트라로 돌아가면 한동안은 황궁에 오지 못할 거다. 그에게 핀에 대해 알아내야 한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그는 아우라의 갈등을 눈치챈 듯 덧붙였다.
“수다를 나눠 주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춤만 춰 주시면 됩니다.”
아무 조건 없이 모든 걸 말해 주겠단 뜻이었다.
아우라가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대공.”
“네, 폐하.”
“목이 마른다고 바닷물을 마실 수야 있나요.”
라이언의 표정이 굳었다.
그 말의 의미는 분명했다. 당신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의 정보는 듣지도 않겠다는 뜻.
“하.”
라이언이 날카로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끅끅 웃음을 참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부디, 손을.”
“…….”
“떠나기 전에 인사를 드리고 싶어 그럽니다.”
아우라가 그제야 손을 내어 주었다. 라이언의 손은 역시나 차가웠다. 마치 푸른 피가 도는 사람 같았다.
“황후 폐하께서는 화가 날 정도로 재미있으신 분입니다.”
‘또 재미있다는 소리를 하는군.’
라이언이 아우라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만간 절 만나고 싶으실 겁니다. 그러면 수트라로 오십시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라이언이 미소를 지어 보이곤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는 그대로 연회장을 떠나 버렸다. 더는 이곳에 볼일이 없다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