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31화
봄 무도회는 아우라의 소관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황실 실무진의 몫이었다.
“기획에 어려움이 있어 가져오신 건가요?”
“기획은 끝났으나 황후 폐하께서 마지막으로 확인해 주시면 좋겠다고 하셔서요.”
“누가요?”
“……황제 폐하께서요.”
‘……하필 이런 시기에?’
안 그래도 안센나의 일로 머리가 복잡한 차였다. 속 좋게 무도회 서류를 보고 싶지 않았다.
아우라가 싱긋 웃었다.
“그럼 훌륭하신 황제 폐하께서 확인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조쉬가 바로 서류를 거두며 생각했다.
‘이러실 줄 줄 알았지, 내가.’
“예. 그럼 가 보겠습니다.”
조쉬가 민망한 얼굴로 돌아섰다. 그가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잠깐.”
“……예?”
아우라가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손을 뻗었다.
“주세요.”
조쉬는 생각했다.
‘이것도 이러실 줄 알았지, 내가.’
그는 얼른 다가와 아우라의 손에 서류를 올렸다. 아우라는 서류를 한 장씩 넘기다가 참석자 명단에서 멈췄다.
‘오는군.’
[웨일 테인* / 엘리제 테인]
‘이 표시는 뭐지?’
아우라는 태연하게 물었다.
“테인 공작의 이름 옆에 왜 표식을 넣은 건가요?”
“아, 예. 무도회가 끝난 직후 알현이 잡혔기에 표시해 두었습니다.”
“그렇군요.”
아우라가 담백하게 대답하며 서류를 넘겼다. 그녀는 그 내용을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서류를 다 보면 따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조쉬가 고개를 꾸벅 숙이곤 집무실을 나갔다. 아우라는 다시 참석자 명단을 펼쳤다.
“…….”
톡.
그녀가 손끝으로 엘리제의 이름을 두드렸다.
***
테인 공작은 밤늦게 엘리제를 집무실로 불렀다. 엘리제는 어두운 얼굴로 테인을 찾았다.
“무도회 준비는 잘되어 가고 있느냐?”
“네, 삼촌.”
“잘되어 가긴. 살롱에 넣어 둔 돈의 반도 쓰지 않았다면서.”
테인 공작이 혀를 찼다.
“나는 드레스 따윈 모른다. 살롱 마담에게 최고급 드레스로 준비해 놓으라고 말해 뒀으니 그걸 입고 가거라.”
엘리제가 제 손을 꽉 맞잡았다. 그녀는 뭔가를 꾹 삼키는 듯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네.”
“카를 황제가 너더러는 알현에 오지 말라고 하더구나.”
순간 그녀의 얼굴에 약간의 화색이 돌았다. 테인 공작이 바로 덧붙였다.
“하지만 같이 갈 생각이다. 일단 알현실에 함께 가면 쫓아내진 않겠지.”
“삼촌. 그래도 황명인데요.”
“어허! 말대답은.”
“……죄송합니다.”
“네가 잘해야 한다, 엘리제.”
테인 공작이 다가와 엘리제의 어깨를 툭 잡았다.
“황제 폐하께서 황후를 꽤 아끼신다지. 그래도 네가 황후와 닮은 구석이 있지 않으냐.”
없는 말은 아니었다. 귀족가에서는 이미 한 바퀴 돈 소문이었다. 아우라와 엘리제가 어딘지 비슷한 느낌이 난다는 것.
“네가 여자로서 테인 가문을 빛내야지.”
여자로서. 그 말에 엘리제의 손끝이 움찔했다.
“……네.”
“그래. 가 보거라.”
엘리제가 떠나고 테인 공작은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카를이 즉위한 후 그의 입지가 많이 흔들리고 있었다. 과거 황태자와의 친분이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다.
같은 처지였던 라이언도 얌전히 있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센이 죽었을 때 테인 공작은 눈치챘다. 라이언이 이센을 이용해 반역을 꾀했다는 것을.
‘뭐, 그래도 라이언은 어쨌건 황족이니 덤벼 볼 만하겠지. 하지만 난 아니야. 결국 황제와 줄이 닿아 있어야 한다.’
황실과 귀족가를 결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혼이었다. 황후의 자리라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아쉬운 대로 후궁이라도 괜찮았다.
‘만약 엘리제를 후궁으로 받아 주지 않는다고 한다면…….’
테인 공작이 집무실 한구석의 금고를 응시했다.
‘저걸 바치는 조건으로라도 밀어붙여야지. 아깝긴 하지만.’
한편, 엘리제는 공작의 집무실 문틈으로 안을 훔쳐보고 있었다.
테인 공작이 금고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는 반짝거리는 그것을 잠시 들여다보더니 다시 금고에 넣었다.
이윽고 엘리제는 복도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봄 무도회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아우라의 방엔 그날 입을 드레스가 도착해 있었다. 드레스는 시폰 소재의 깔끔하고 딱 떨어지는 디자인이었다. 아우라는 마른 편이라 치수를 조금 더 줄이긴 해야 했다.
아우라는 소파에 앉아 마네킹에 걸린 드레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봄 무도회가 다가오자 라이언의 말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황후 폐하. 혹시 핀에 대해 제게 묻고픈 마음이 생기신다면 말입니다. 봄 무도회에서 저와 춤을 한 곡 춰 주십시오.’
‘못 믿을 자인 건 분명한데. 춤을 추는 게 정보를 주는 대가라면 손해 볼 건 없지 않나.’
이윽고 미나가 방에 들어섰다. 미나는 쌍둥이 동생들을 보기 위해 잠시 집에 들렀다 온 길이었다.
그녀는 울상이 되어 아우라의 곁으로 왔다.
“폐하…… 아무래도 드레스를 다시 고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드레스를? 왜?”
미나가 다급히 테이블에 책자를 펼쳤다.
“이게 뭐야?”
“수도에서 제일가는 드레스 살롱 이브제의 신상 도록입니다.”
“내 드레스는 황실에서 만드는데. 이걸 왜?”
“이것 좀 보십시오.”
미나가 도록 한편을 가리켰다. 유려하게 떨어지는 느낌이 고급스러운 새틴 드레스였다. 연한 크림색임에도 여타의 드레스보다 확실히 눈에 띄었다.
“글쎄, 테인 공작가에서 이 드레스를 사 갔답니다.”
“……엘리제가 봄 무도회에서 입을 생각인가 보군.”
“이 드레스에 비해 폐하의 드레스는 너무 수수한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흉흉한 소문이 도는데 드레스를 바꿔 보시는 게 어떨까 싶어요.”
‘웬 호들갑을 떠나 했더니. 드레스 때문이었군.’
아우라가 피식 웃더니 도록을 쓱 밀었다.
“며칠 안에 새 드레스를 만드는 건 무리야. 또 내가 그래야 할 이유도 없고.”
“하지만…….”
“이 도록은 못 본 걸로 하지.”
“네…….”
미나가 울상이 되어 도록을 치웠다.
아우라는 제 드레스를 다시 살펴보았다. 도록의 드레스를 봐서 그런 것일까. 깔끔하긴 해도 확실히 화려한 맛은 떨어졌다.
‘드레스 따위, 무슨 의미가 있다고.’
***
카사 황실의 봄 무도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수도의 모든 귀족은 이날만을 기다려왔다. 봄 무도회는 귀족가의 영식과 영애들이 중요한 사교장이었다. 사교가 결혼과 직결되는 만큼 모두 온 힘을 다해 꾸미고 나타날 거였다.
이른 오후, 카를이 푸른 연미복을 입고 자신의 방을 나섰다. 마찬가지로 차려입은 조쉬와 테오가 그 곁을 따랐다.
“폐하, 출발하기엔 좀 이릅니다.”
테오가 말했다.
“황후에게 잠깐 들러야 해. 전할 말이 있어.”
조쉬와 테오가 시선을 교환했다.
요즘 귀족들 사이에선 카를과 엘리제 이야기의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누가 끊임없이 장작을 넣기라도 한 것처럼.
황후는 이상하리만큼 이 문제에 초연했다. 무도회 관련 서류를 조쉬에게 돌려줄 때도 그랬다.
‘좋네요. 이대로 진행하세요.’
황후는 딱 그렇게만 말했다. 테인 공작의 알현이 잡힌 걸 알았을 텐데도. 카를도 황후의 그 반응에 시큰둥했고.
결국, 보다 못한 테오가 카를에게 어젯밤 조언을 했다.
“황후 폐하께서 걱정하시기 전에 언질을 주시지요. 후궁을 맞을 생각이 없으시다고요.”
카를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왜. 내가 누굴 만나건 신경도 안 쓰는 사람에게.”
“신경을 안 쓰시는 건지, 안 쓰려 하시는 건지 모르지 않습니까.”
“확실해. 안 쓰고 있어. 그 문제는 더 말하지 마, 테오.”
“……옙.”
이렇게 된 이상 테오는 바랄 뿐이었다. 이 봄 무도회가 부디 평안하게 끝나기를.
세 남자는 황후의 방 앞에 도착했다. 시녀가 그들이 왔음을 알리러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시녀장이 나와서 그들을 맞았다.
“들어오십시오.”
“너희는 기다려라. 아니, 먼저 가 있어.”
카를이 두 사람에게 손을 휘휘 저었다. 그리고 홀로 중간 복도를 지나 문 앞에 섰다. 들어오라고 했기에 딱히 노크 없이 문을 열었을 때였다.
“아우라, 저…….”
카를은 미처 말을 끝맺지 못했다.
아우라는 빛이 들어오는 창을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수많은 비즈가 반짝이는 옅은 은색 드레스를 입은 채로. 아니, 사실은 아직 걸치고만 있었다. 허리부터 목까지 올라가는 수많은 진주 단추를 채우기 전이었으니.
훤히 드러난 등에 카를의 입이 순간 말랐다. 그는 몰래 목을 가다듬고 태연하게 말했다.
“……준비가 안 됐으면 말을 하지.”
“시간이 넉넉한 게 아니잖아. 말해. 무슨 일인데.”
그도 그럴 것이, 단추는 정말이지 많았다. 시녀가 아래서부터 급히 채워 올리고는 있었으나 여전히 등이 반쯤 드러나 있을 정도로.
카를은 배 속이 약간 뒤틀렸다. 아무렇지 않게 맨등을 보이는 태도가 일종의 무관심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렇게 상한 자존심은 곧 오기로 뒤집혔다.
“시녀를 내보내. 내가 해 줄게.”
“네가?”
“네 말처럼 그거 다 채우길 기다릴 만큼 한가하진 않아서.”
시녀가 들어선 안 되는 말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아우라가 시녀에게 말했다.
“나가 봐.”
“예, 폐하.”
시녀는 얼른 방을 나섰다.
달칵.
문이 닫혔다. 카를은 마네킹처럼 서 있는 아우라에게 다가갔다.
저벅, 저벅, 저벅…….
그의 발소리가 그녀의 뒤에서 멈췄다. 카를은 말없이 진주 단추를 하나씩 채우기 시작했다.
어설픈 손놀림이었다. 아우라의 옷 단추를 풀기나 해 봤지, 잠그는 건 처음이었다. 손톱보다도 더 작은 단추가 이따금 손에서 미끄러졌다. 그럴 때마다 엇나간 손끝이 아우라의 등에 닿았다.
카를은 생각했다. 이 아름다운 드레스를 완성하기 위해 이 아름다운 등을 가린다는 것. 그건 참 모순적인 일이라고. 또 드러난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싶다고.
아우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요즘 귀족가에 도는 소문 말이야. 나와 엘리제에 관한.”
“네가 후궁을 맞는다고?”
“그래. 테인 공작이 낸 소문일 뿐이라고. 그 말을 하러 왔어.”
카를은 자신도 어이가 없어서 픽 웃었다. 묻지도 않았는데 변명부터 하는 꼴이라니.
아우라는 잠시 말이 없었다. 카를이 괜스레 덧붙였다.
“후궁은 네 일거리기도 하니까 그냥 말해 두는 거야.”
“……그럼 테인 공작을 왜 굳이 만나는 건데?”
카를의 손끝이 멈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