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30화
카를은 편지를 다시 접었다.
‘……제법 많이 쫓았네. H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실시아까지 갈 줄이야.’
그는 편지를 봉투에 넣은 후 아우라의 베개 아래로 슬쩍 밀었다.
‘아무리 그래도 절대 안 돼. 핀은.’
카를은 아우라에게 슬쩍 입을 맞췄다. 그녀는 그것도 모르고 색색 숨만 내쉬었다.
카를이 무심코 창밖을 보았다. 저 멀리 보이는 북쪽 탑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저 탑을 홀린 듯 바라보던 아우라의 뒷모습. 그걸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없애 버리고 싶었다. 마음에 걸리고 불쾌한 것들을 굳이 남겨 둘 필요는 없으니까.
‘저 탑을 대신할 방어용 망루를 지어야겠어. 그 뒤에 탑을 철거하자.’
카를은 커튼을 쳐서 탑을 가렸다. 그리고 소리 없이 그녀의 침실을 나섰다.
바로 집무실로 돌아온 그는 이미 기다리고 있던 조쉬와 테오를 만났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폐하.”
“그래. 밤새 별일은?”
테오가 오늘 일정표를 건네며 대답했다.
“무탈합니다.”
“라이언은?”
“별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들은 매일같이 라이언의 동태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는 적어도 황궁을 떠나기 전까진 움직이지 않을 작정인 듯했다.
“다만 봄 무도회가 코앞이라서요. 준비해야 할 게 많습니다.”
카를은 일정표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바쁜 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봄 무도회는 누구 소관이지?”
“보좌관들 일이긴 합니다만, 테오가 일이 많아 제가 총괄하기로 했습니다.”
조쉬가 대답했다. 카를은 잠시 말을 잃었다. 테오면 모를까, 조쉬가 여는 무도회는 어쩐지 믿음이 안 갔다.
“무도회는 귀족 부인들 취향에 맞춰야 하니까 적당히 계획을 짜서 아우라에게 확인을 받도록 해.”
“황후 폐하께요?”
조쉬가 멈칫했다.
“왜 그래?”
“아, 아닙니다.”
조쉬의 머릿속엔 아직도 그날의 일이 선했다.
카를이 불면에 시달리던 밤. 조쉬는 용기를 내어 아우라에게 그의 상태를 전달했다. 그러자 아우라는 팔짱을 낀 채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요?’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렇게 차갑게 대해 놓고는 결국 카를을 재워 줬다.
여자란 원래 그렇게 종잡을 수 없는 동물인가 싶었다. 종잡을 수 없으니 어려웠고, 어려우니 무서웠다.
조쉬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테오가 이어서 보고를 했다.
“폐하, 테인 공작이 알현을 신청했습니다.”
“그랬겠지. 지치지도 않는군. 시간은?”
“봄 무도회가 끝난 직후입니다.”
“왜 그런 시간에?”
“제 생각엔…….”
테오가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조카인 엘리제 영애와 함께 보자는 의미 같습니다. 영애도 봄 무도회에 올 테니까요.”
카를은 참 골치가 아팠다. 꼴이 이러하니 귀족가에 온갖 소문이 다 도는 게 아닌가.
‘뻔뻔하기도 하지. 황태자와 그렇게도 막역했으면서.’
“알현 일정을 잡을까요?”
테오가 조심스레 물었다. 카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잡아.”
카를도 테인 공작에게 볼일이 있었다. 지금껏 애를 태울 대로 태웠으니 슬슬 만날 때가 되기도 했다.
“단, 엘리제를 알현실에 데려오지 않는 조건으로.”
“네, 폐하.”
테오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카를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그에게 덧붙였다.
“만약 엘리제가 따로 날 보자고 하면…… 아무도 모르게 조심스럽게 진행해.”
***
그 시각.
라이언은 황궁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별생각 없이 황궁을 돌아다니다가 카를을 봤기 때문이었다.
카를이 걸어온 방향, 다소 흐트러진 옷차림. 분명 황후의 방에서 밤을 보낸 게 분명했다.
‘사이좋네.’
그는 속으로 빈정거렸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닌 것 같았는데 말이지.’
이센의 장례식 때까지만 해도 카를의 상태는 최악이었다. 지독한 불면에 시달린다는 소문이 사실 같았다. 그런데 오늘 본 카를은 건강을 많이 되찾은 것 같았다.
‘그사이 황후가 뭔가를 해 준 것 같긴 한데. 뭘까…….’
라이언은 문득 그날을 떠올렸다.
대관식 이후 보름이 지났을 때였다. 카를의 부름에 라이언은 황제의 응접실로 갔다. 카를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대공도 들지.”
“감사합니다, 폐하.”
라이언은 공손히 받아들였다. 몇 살 차이도 안 나는 조카가 내민 잔을.
“대공. 수트라 지대는 여전히 살기 척박한가?”
황좌에 올랐다고 바로 말이 짧아진 이 되바라진 조카가 내민 잔을.
라이언은 그 잔을 단번에 비웠다. 술이 말도 못 하게 독했지만 웃으며 대답했다.
“똑같지요, 뭐. 항상.”
카를이 제 술잔의 입구를 손끝으로 빙빙 돌렸다.
“내가 황좌에 올랐을 때, 대공이 내게 군사를 바치며 충성을 맹세했지. 나는 받아들이는 의미로 정벌한 데블라를 수트라에 편입시켜 줬고.”
“그러셨지요.”
“그런 아름다운 우정을 맺었는데, 대체 대공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카를이 대공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더는 이센을 흔들지 마.”
“……제가 흔들 게 있나요. 제멋대로 사는 놈을.”
라이언은 시치미를 뗐다. 어차피 모든 일은 이센의 움직임으로 꾸려지고 있었다. 군사를 모으고 움직이는 모든 일에 라이언의 흔적 따윈 없었다.
그나저나 제법이었다. 이 젊은 황제가 이센과 자신의 연결 고리를 알아채다니.
‘내 군사는 최대한 빼 둬야겠네. 성공 확률이 높진 않겠어.’
어차피 이번 반역이 성공하리란 기대는 안 했다. 그저 카를의 능력을 가늠해 보고 싶었을 뿐. 이센이야 버리는 패에 지나지 않았다.
“……난 분명히 경고했어, 라이언.”
“친히 이름까지 불러 주시니 감격입니다.”
카를이 몸을 소파에 묻었다. 라이언이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하실 말씀은 그게 다입니까?”
“아니, 한 가지가 더 있지. 그리고 이게 더 중요해.”
“뭔가요? 기대되는군요.”
“핀을 내게 줬으면 해. 대공이 원하는 쪽으로 값은 치르지.”
라이언은 살짝 놀란 듯했지만 이내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재미있었다. 흥미진진해서 미칠 것 같았다. 이 황제는 대체 어디까지 아는 걸까.
“음……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
“핀이라는 게 뭔가요?”
그 순간 카를이 라이언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라이언은 그런 눈을 난생처음 보았다. 차갑게 불타는 눈.
“라이언. 난 이 이상 너를 설득하지 않아. 거래도 하지 않을 거고.”
“뜻대로 하십시오. 필요한 게 있으면 빼앗고 훔치시죠.”
“여유를 부리는 걸 보니 핀은 영지에 두고 온 모양이군.”
“저는 핀이 뭔지 모릅니다.”
“그래? 나는 왠지 알 것 같은데, 네 속을.”
“그런가요? 사람들이 그러던데요. 제 속은 참 알기 힘들다고.”
“네게 전혀 도움도 안 될 핀을 거래도 하지 않고 쥐고 있다는 건…….”
카를이 라이언의 눈을 빤히 보았다.
“너도 핀의 봉인을 풀고 싶은 건가?”
라이언의 눈빛이 흔들렸다. 카를은 그 동요를 알아보고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는 라이언의 멱살을 놔주었다.
“그럼 난 이제부터 대공이 핀을 깨려는 이유를 알아보면 되겠군.”
잠시 침묵이 흘렀다. 타협을 하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임을 라이언은 직감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카를이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나가 봐.”
라이언이 피식 웃었다. 검만 잘 쓰는 애송이인 줄 알았는데. 눈치도 정치술도 보통이 아니었다.
‘황태자가 그렇게 재수 없어 했던 이유가 있었군.’
그는 비죽 웃으며 제 방을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심상치 않은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리엘이 달려오고 있었다. 리엘의 뒤를 쫓는 유모가 외쳤다.
“황녀님! 황녀님! 그렇게 달리시면 안 됩니다!”
“메롱~ 잡아 봐라! 히히!”
라이언의 눈매가 둥글게 가늘어졌다. 그는 정신없이 달려온 리엘을 낚아채듯 들어 올렸다.
“읏차.”
“으앗! 할아버지!”
리엘은 라이언을 알아보고 외쳤다. 숨을 몰아쉬며 발갛게 상기된 볼이 싱그러웠다.
“복도에서 뛰면 안 되지.”
“히히!”
리엘이 활짝 웃었다. 이센의 죽음에 며칠을 울던 모습은 오간 데 없었다. 역시 애들은 애들이었다.
뒤따라온 유모가 헉헉대며 리엘을 받아 갔다.
“대공 전하…… 감사합니다.”
리엘은 유모의 품에 안겨 라이언에게 말했다.
“또 봐요, 할아버지!”
“그래, 우리 소중한 리엘.”
라이언이 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약속 잊지 않았지? 나중에 꼭 할아버지 영지에 놀러 와야 한다?”
그는 리엘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네, 할아버지! 약속!”
리엘이 작은 손가락을 라이언의 손가락에 걸었다. 그는 그 고리를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
며칠 후.
아우라는 황후의 집무실에서 안센나 지방에 관한 보고를 듣고 있었다. 오늘 오후 국무 회의를 참관했던 보좌관이 그 내용을 읊었다.
“안센나는 여전히 빈민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인은 여전히 물 문제인가요?”
“네. 안센나는 우물에만 의존하는 지역이라 이대로는 더 이상의 발전이 어렵습니다. 다만 황실에서 꾸준히 자금이 투자되어 아이들 교육에 힘쓰는 듯합니다. 이번 달에는 도서관을 하나 더 세웠습니다.”
“자경단의 상황은…… 특별한 게 없나요?”
“네. 보고된 바는 없습니다.”
아우라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물 문제도 문제지만 루안이 소식이 없어 걱정이었다. 마법도 잃은 상황에서 대체 어디서 무얼 하는 건지.
똑똑.
노크 소리에 보좌관이 밖을 살폈다.
“폐하, 조쉬 기사단장이 찾아왔습니다.”
“조쉬가요? 들어오라고 하세요. 보좌관은 나가 봐도 좋습니다.”
“네, 폐하.”
보좌관이 나간 후, 조쉬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황후 폐하. 다름이 아니라…….”
조쉬가 머뭇거리며 다가와 서류를 내밀었다. 아우라는 받는 대신 물었다.
“이게 뭔가요?”
“봄 무도회 기획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