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28화
부인들은 적잖이 난감해했다. 그녀들 역시 확실한 건 알지 못했다. 근거 없이 떠도는 소문을 감히 황후에게 옮겨서도 안 됐고.
헬렌 자작 부인이 말했다.
“확실한 건, 테인 공작이 황제 폐하에게 알현을 자주 신청한다는 점입니다. 엘리제 영애는 워낙 저택 밖 출입을 안 하는 사람이라 당사자들 간에 진행되는 일은 없는 듯합니다.”
결국 일을 벌이는 건 테인 공작이란 뜻이었다. 아우라가 물었다.
“엘리제 영애는 어떤 사람인가요?”
한 부인이 대답했다.
“얌전하고 교양 있는 영애입니다. 특별히 모난 곳도 없고요.”
아우라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흉 하나 잡히지 않는 정도면…… 처세를 잘했거나, 정말 괜찮은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군.’
요나 백작 부인이 분위기를 띄우려는 듯 말했다.
“서, 설마하니 벌써 후궁을 들이시려고요.”
카를이 황위에 오른 지 반년도 되지 않았다. 후궁을 받기에는 일러도 너무 일렀다. 하지만 그녀들도 알고 있었다. 후궁은 정치적 이유로 들어오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을. 특히 카를처럼 황실을 한번 뒤흔들고 즉위한 경우에는 더.
그때 한 시종이 정원으로 들어섰다. 아우라는 그를 알아보았다.
‘카를의 방 시종이잖아? 무슨 일이지?’
시종의 말을 들은 미나가 종종걸음으로 아우라에게 왔다.
“폐하, 황제 폐하께서 선물을 보내셨습니다. 여기서 받으시겠습니까?”
“선물을?”
아우라는 당황했다. 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을 한단 말인가.
반면 부인들 얼굴은 급격히 환해졌다. 그녀들은 분위기를 풀 절호의 기회를 만난 듯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선물이라니. 받아 보세요, 폐하.”
“맞아요. 저희도 무척 궁금합니다.”
이쯤 되면 거절하는 것도 이상했다. 아우라는 하는 수 없이 허락했다.
“받는 거로 하지.”
잠시 후 시종이 직사각형의 녹색 상자를 쟁반에 받쳐 내밀었다. 아우라는 상자의 리본을 풀었다. 부인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시종이 한마디 덧붙였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고르신 겁니다.”
아우라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자를 열자 눈이 시리도록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있었다.
“어머! 너무 아름답습니다!”
“세상에…… 이런 선물을 하시다니. 로맨틱하세요.”
“정말 부럽습니다, 폐하.”
진심 어린 찬탄이 쏟아졌다. 그들은 내심 생각했을 것이다. 당분간 황제가 후궁을 맞을 리는 없겠다고.
한편 아우라는 목걸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둥글게 모양을 고정한 줄의 가운데를. 그곳에는 백금발이 한 올이 있었다. 크림색 리본까지 예쁘게 묶인 상태로.
두말할 것 없이, 이틀 전날 밤 그녀가 카를의 침대에 흘린 것이었다.
아우라는 대뜸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부인들은 서로 눈치를 보더니 함께 웃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들은 황후가 선물이 좋아 웃는 줄로만 알고 있었지만.
탁.
아우라가 상자를 닫았다.
그날 밤 일을 굳이 없던 일로 만든 건 카를을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수면에 도움이 된다는 건,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그 말을 들었을 때 생각했다. 그와 더 가까워져서는 안 된다고. 그래서 끝까지 모른 척하려 했는데.
‘없던 일로 만드는 꼴은 못 보겠다 이건가.’
그 의도라는 건 참, 사람을 놀리는 듯하면서도…… 집착적인 데가 있었다.
티 파티의 웃음소리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
그날 밤, 아우라는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앉았다. 협탁에 촛불을 켜 두고 습관처럼 책을 읽기 시작했다.
‘확실히 카사는 마법 연구는 뛰어나지만…… 제니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어. 실시아의 마법은 거의 다루지 않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미나가 노크도 없이 조심스럽게 방에 들어왔다.
“미나?”
미나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호세에게 편지가 왔습니다.”
“호세에게? 어서 줘.”
아우라는 얼른 책을 덮었다. 미나는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 내밀었다. 편지는 험한 길을 왔는지 많이 구겨져 있었다.
“편지는 북부 국경 너머 실시아에서 왔습니다.”
“호세가 직접 간 건가? 아카데미는 어쩌고?”
아우라가 편지를 받으며 물었다.
“짧게 휴가를 얻은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고마워. 나가 봐.”
“예, 폐하.”
미나가 방에서 나간 후 아우라는 편지를 살폈다. 호세는 이 일의 위험성을 의식한 듯 이름 대신 ‘H’라는 이니셜을 썼다. 아우라는 봉투를 뜯고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황후 폐하, 잘 지내십니까? 저는 율리우스의 흔적을 찾기 위해 실시아에 왔습니다.
이곳은 매우 춥고 삭막합니다. 게다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마법들도 가득해 하루하루 긴장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율리우스는 이곳에서도 꽤 유명 인사더군요. 그 덕에 그가 살던 곳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편지는 유려하게 흘러갔다. 호세는 율리우스가 살았던 저택에 머무르고 있다고 했다. 혼자 남은 집사에게 뇌물을 주고 율리우스의 연구실도 살펴본 모양이었다.
「운 좋게 그의 연구 노트를 발견했습니다. 말년의 율리우스는 수정구 마법에 몰두한 것 같습니다. 또 봉인을 쉽게 풀 수 없도록 고심을 했더군요.
폐하, 역시 그는 좋은 마법사가 아니었습니다. 봉인을 푸는 데에는 ‘적합한 희생’이 필요하다는 그런 말들이 잔뜩 쓰여 있었습니다.」
“적합한 희생……?”
「중요한 정보인 듯하여 일단은 편지로 보냅니다. 혹시 이것만으로 폐하께서 봉인을 풀 방법을 떠올리시진 않을까 해서요.
뭔가를 더 알아내는 대로 다시 편지를 드리겠습니다.
-폐하를 경애하는 H 올림.」
‘봉인을 풀려면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적합하다는 말은 다소 추상적이고.’
희생이니 대가니 하는 말들이 두렵진 않았다. 알기만 하면 어떻게든 가져다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게 무엇이라 하더라도.
똑똑.
노크 소리에 이어 침실 문이 열렸다. 미나인가 싶어 그쪽을 본 아우라가 놀랐다. 복도의 불빛이 만든 그림자가 익숙했다. 아우라가 얼른 편지를 베개 밑으로 넣었다.
이윽고 카를이 방으로 들어섰다.
‘오늘이 합궁일이던가?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카를. 갑자기 무슨 일이야?”
“잠이 안 와서.”
그는 마치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 자연스럽게 침대로 올라오더니 아우라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그의 태연한 모습이 황당했다.
“넌 여기가 여관으로 보여?”
카를이 침대 헤드에 뒷머리를 툭 기댔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돌려 아우라에게 말했다.
“넌 내게 거짓말도 조롱도 실컷 하잖아.”
“내가 언제.”
“정원에서 꿈이니 망상이니 하면서. 까딱하면 정말 속을 뻔했어.”
아우라는 아차 싶었다. 그를 재워 줬단 사실을 숨겼다가 결국 들키지 않았는가.
“그러니 이 정도는 봐줘야 하지 않겠어?”
“……마음대로 해.”
더 따졌다간 그 이야기를 꺼낼 구실만 줄 게 뻔했다.
그는 피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보아하니 어젯밤도 전혀 못 잔 것 같았다.
‘자려면 누워서 잘 것이지.’
아우라는 협탁에 뒀던 책을 다시 펼쳤다. 그런데 카를의 손이 쑥 나타나더니 책을 가져가 버렸다.
“뭐야. 줘.”
“마법학 책은 왜 봐? 정원에서도 내내 이것만 보더니.”
“독서 취미까지 검사를 받아야 해?”
“눈 나빠져. 그만 봐.”
카를이 책을 탁 덮었다. 이쯤 되니 아우라는 대항할 의지를 잃었다. 카를이 갑자기 나타나 침대 옆자리를 차지했다. 읽던 책도 빼앗아 갔다. 차라리 꿈이라고 하면 믿겠다.
‘오늘따라 대체 왜 이래?’
게다가 묘하게 느긋하게 구는 저 태도. 그게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틀 전만 해도 재워 달라고 애걸을 했던 주제에. 어째서 지금은 이토록 당당하게 구는 건지.
“이리 주고 넌 잠이나 자, 카를.”
아우라가 책을 낚아채려 했다. 그러자 카를은 아우라의 반대편으로 손을 뻗었다.
“아, 정말!”
아우라는 오기가 바짝 올랐다. 카를의 어깨를 짚고 손을 뻗었지만 그의 팔이 워낙 길었다. 손끝이 책에 닿을락 말락 했다.
“좀……!”
카를의 허벅지 위로 아우라의 무릎이 올라왔다. 그 순간, 그가 아우라의 허리를 안았다.
“!”
졸지에 아우라는 그의 위로 올라가 안긴 꼴이 되었다. 아우라는 그제야 자신이 당했음을 깨달았다.
“날 놀리려고 온 거야?”
“같은 침대 쓰는 거로는 안 되던데.”
“뭐?”
“닿아야 잠이 와. 그러니 어쩌겠어.”
책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는 아우라의 등을 감싼 채 그대로 스르르 누워 버렸다.
아우라는 마치 곰 인형처럼 그에게 안겨 있었다. 몸부림을 쳐 볼까 했지만 그만두었다. 벗어날 수 없는 건 자명한 일이니까. 화는 좀 나지만 잠들기를 기다리는 게 나았다.
그의 호흡이 점차 가라앉았다. 부드럽고 낮은 숨소리와 규칙적인 심장 박동. 언제나 아우라보다 조금 더 따뜻한 체온과 단단한 가슴. 그런 것들이…….
‘큰일이다. 불편하지 않아.’
사람이란 적응의 동물인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의 품이 익숙해질 리가.
아우라는 고개를 슬쩍 들어 카를을 봤다. 그는 여지없이 잠들어 있었다.
‘정말 후궁을 맞으려나.’
분명 테인 공작과 후궁 건을 논의했을 텐데. 어째서 아무 언질이 없나 싶기도 했다.
‘그게 서운하다기보다는…….’
아우라는 생각을 마무리할 수 없었다. 그냥, 계속 신경이 쓰였다.
대관식에서 봤던 엘리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흔치 않은 분위기의 영애인 것은 분명했다. 얌전하고 순한 눈빛과 처연하고 깨끗한 느낌 같은 것이.
그녀를 떠올리면 예전 생각이 났다. 왕녀 시절의 아우라 역시 그 비슷한 모습으로 카사로 왔으니. 그러니까,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아우라는 문득 궁금해졌다.
“카를.”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자는 모양이었다. 아우라는 그의 가슴에 이마를 툭 기댔다.
“너는 대체 내가 왜 좋아?”
‘네가 좋아하던 그 시절의 나는 이제 없는데.’
그 자조 섞인 질문을 곱씹으며 아우라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때 카를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아우라의 어깨를 잡곤 침대로 부드럽게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