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27화
아우라는 정원에서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차와 과자 그리고 책. 완벽한 오후의 휴식이었다. 마법학 책에 집중한 그녀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빈 종이에 간간이 뭔가를 적기도 했다.
사그락.
잔디를 밟는 인기척에 아우라가 종이를 책장 사이에 끼웠다. 만년필 뚜껑을 닫는데 머리에 그늘이 졌다.
살짝 올려다보니 카를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간이나 복장으로 보아 업무를 보다가 산책을 나온 듯했다.
“…….”
아우라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를이 물었다.
“사람을 봐 놓고 인사도 안 해?”
“안녕, 카를.”
카를은 못 당하겠다는 듯 실소했다. 그는 아우라를 마주 보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곁에 있던 미나가 얼른 새 잔을 내어 주었다. 카를이 괜찮다는 듯 손을 젓자 미나는 잔을 물렸다.
카를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려놓곤 손으로 턱을 받쳤다. 그리고 아우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우라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책만 보았다. 여유롭게 차를 한 모금 마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우라가 그러거나 말거나, 카를은 제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
“황궁의가 그러더군.”
“…….”
“누군가가 수면에 도움이 된다는 건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책장이 사락, 넘어갔다. 아우라가 눈을 낮게 뜨고 글자를 읽자 속눈썹이 유난히 도드라졌다.
“나를 못 괴롭혀서 안달인 사람에게 내가 왜 안정감을 느끼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
“내가 그 사람을 지켰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 같아. 너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화를 낼 테지만. 뭐, 내 무의식까지 어찌할 순 없겠지.”
“…….”
“네가 어제 내 상태를 어떻게 알고 내 방에 왔나 했는데 조쉬가 그러더군. 어젯밤에 널 찾아갔었다고.”
아우라가 책을 탁 덮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카를,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글쎄, 감사 인사?”
“난 어제 네 방에 간 적 없어.”
“……뭐?”
카를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아우라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말했다.
“난 조쉬에게 분명히 말했어. 내가 도와줄 건 없으니 가지 않겠다고.”
“아우라, 날 놀리지 마.”
“조쉬가 봤대? 내가 네 방으로 들어가는 걸?”
그건 아니었다. 조쉬에게 물었을 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황후 폐하께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제가 부탁드렸을 땐 거절하셨거든요. 몰래 왔다 가신 모양입니다.’
“이쯤 되니 걱정이 될 지경인데? 제국을 이끄셔야 할 황제 폐하께서 꿈과 현실도 구분을 못 하시니.”
아우라가 책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를의 눈이 그녀를 좇았다. 그녀의 의도를 파헤칠 때 짓곤 하는 바로 그 집요한 시선으로.
그녀는 카를을 스쳐 가며 피식 웃었다.
“내가 설마 널 재워 주러 거기까지 갔을까.”
툭, 그녀의 손이 카를의 어깨로 올라왔다.
“진료는 다른 쪽으로 받으셔야겠어. 이를테면, 망상이라든가.”
놀리듯 가볍게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는 손길. 그 손길을 끝으로 아우라가 유유히 정원을 빠져나갔다.
“하.”
혼자 남은 카를이 헛웃음을 지었다.
무시, 무관심, 걱정의 탈을 쓴 조롱. 그 완벽한 경멸을 받고 있노라니 헷갈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어젯밤 잠에 막 빠져들던 와중이었나.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있었다. 조금 망설이는 듯 서툴게 쓰다듬는 손길.
그리고 지금 그의 어깨를 두들기고 간 거리낌 없는 손길.
그 두 손의 주인공이 정말 같은 사람이냐 묻는다면…… 확신할 자신은 없었다.
‘……꿈이라도 꿨던 건가.’
***
카를은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서류 위를 오가던 깃펜이 멈칫했다.
“흐음…….”
그 소리에 보좌관 자리에 앉아 있던 테오가 카를을 보았다. 카를은 고개를 갸웃한 채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또 저러시네. 벌써 몇 번째…….’
고민이 있으시냐고 물었지만 그때마다 카를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 테오로선 답답할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해.”
카를이 중얼거렸다.
“네? 뭐가 말입니까.”
그때 카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눈이 동그래진 테오를 뒤로하고 샛문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그리고 샛문을 벌컥 열었을 때였다.
“폐, 폐하?”
마침 침대 시트를 갈던 시녀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카를이 나타날 시간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신경 쓰지 말고 해.”
“아, 예…… 폐하.”
카를은 문기둥에 기댄 채 침대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녀는 조금 긴장한 채로 시트를 벗겼다.
분명히, 아우라가 저기에 앉아 있었던 것 같았다. 손을 뻗어 얼굴을 만졌던 것도 같았다.
‘망상? 내가 정말 미친 건가.’
그때, 침대에서 뭔가가 반짝 빛났다.
“잠깐만.”
“예, 예?”
“시트를 내려놓고 물러나라.”
“아…… 예.”
시녀가 영문을 모르고 뒤로 물러섰다. 카를이 침대 시트를 더듬었다. 그리고 이내 그의 손가락에 뭔가가 걸렸다. 기다란 상앗빛 머리카락이었다.
“하.”
그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렸다. 그는 머리카락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시녀에게 물었다.
“시트는 언제 마지막으로 갈았지?”
“어제 오후, 이 시간에 갈았습니다.”
“그렇군. 수고해.”
카를은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는 의자에 풀썩 앉더니 창문으로 몸을 돌렸다.
햇빛에 투명하게 빛나는 머리카락. 카를은 그것을 가지고 손장난을 하기 시작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팽팽하게 감기는 기분이 좋았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그 긴장감이. 사람을 감질나게 하는 그 감각이.
좋은 건 그게 다가 아니었다.
시침을 떼며 그를 무시하고 조롱하던 아우라의 표정이. 어젯밤 일을 없는 걸로 만들려 애쓰던 그 노력이.
“하핫.”
웃음이 나올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카를이 의자에 머리를 툭 기댔다. 그리고 손가락 사이에서 빛나는 머리카락을 홀린 듯 보았다.
‘미친놈 같군. 이런 것에 환장을 하게 되다니.’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이제 이 머리카락을 어찌할 것인가.
생각 끝에 카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그편이 좋겠어.”
카를은 그대로 집무실을 나가 버렸다.
“…….”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테오는 눈만 끔뻑거렸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그로선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
다음 날.
황궁 정원에서 작은 티 파티가 열었다. 티 파티를 여는 건 황후의 일 중 하나였다.
요나 백작 부인과 헬렌 자작 부인을 비롯한 귀부인들이 모두 모였다. 상석에 앉은 아우라는 그들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부인들은 대부분 아우라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아우라를 보면 대관식 이야기를 했다.
“저는 그 생각만 하면 소름이 돋는다니까요. 황후 폐하께서 관을 쓰고 딱 일어나셨을 때 말이에요.”
“맞아요. 어떻게 그렇게 분위기만으로 폭도들을 잠재우셨는지.”
“그런데 그 폭도들 뒤에 타샤가 있었다면서요?”
한 부인이 말하자 몇몇 부인들이 놀랐다.
“어머! 황제 폐하의 유모요?”
“네. 몰랐나요? 순혈주의자들을 황궁에 들였단 게 들통나고 즉결 재판을 받아 처형됐잖아요.”
“세상에…… 그게 웬일이람.”
부인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아우라에게 왔다.
“심려가 크셨겠어요, 황후 폐하. 그런 순혈주의자가 황제 폐하의 유모였다니.”
아우라는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차를 마셨다.
‘썩 편하진 않군. 내가 외국인인 걸 의식하지 말아 줬으면 하는데.’
“그래도 제가 시집을 온 걸 보면 타샤가 그리 영향력 있는 사람은 아니었나 봅니다.”
아우라의 말에 부인들이 맞장구를 쳤다.
“그럼요. 황제 폐하께서 확실하게 타샤를 내치신 것만 봐도 그렇죠.”
“맞아요. 그 행동으로 황제 폐하께서도 노선을 확실히 보여 주셨다고 생각해요.”
“노선?”
아우라가 되물었다.
“네. 순혈주의자 같은 극단주의자들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포하신 거나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그녀의 말처럼 순혈주의자들은 모습을 감췄다. 그건 타샤가 그들의 중요한 수뇌부였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하지만 보수적인 신문사들은 그 일을 너무했다고 짚던데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요.”
한 부인이 걱정을 담아 말했다. 아우라가 물었다.
“어떤 면에서 너무한다던가요?”
“황실이 이러다가 카사인보다 제니아인들을 더 챙기는 게 아니냐 하는……. 보수파들 비위를 맞추는 말들이죠.”
아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반응이었다. 제니아인들을 일반 시민으로 올리는 일에도 반대파가 많았으니. 이들이 말은 안 하지만 외국인 황후에 대한 여론도 복잡하리라.
아우라는 분위기를 바꿔 보기로 했다. 그녀는 요나 백작 부인에게 물었다.
“요즘 귀족가엔 별일이 없나요? 요즘 국무 회의도 잦던데요.”
“새 황제가 즉위하셨으니 다들 얼굴을 비치느라 바쁩니다. 얼굴만 비치면 다행이게요? 테인 공작께선-”
요나 백작 부인이 멈칫하더니 입을 가렸다. 아우라는 그 이유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엘리제를 후궁으로 들인다는 소문 때문이군.’
후궁 이야기는 이미 귀족가에서 신나게 돌고 있었다. 그러나 카를은 그녀에게 후궁에 대한 어떤 언질도 주지 않았다.
“말씀해 보세요, 부인. 테인 공작에 대해서.”
요나 백작 부인이 당황한 듯 차만 꿀꺽꿀꺽 마셨다.
“네? 어서요.”
“흠……! 그게…….”
악의 없는 물음이었으나 요나 백작 부인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보다 못한 헬렌 자작 부인이 나섰다.
“풍문을 듣고 저희끼리 짐작한 이야기입니다. 부디 불쾌하지 않게 들어 주세요.”
“엘리제 영애를 후궁으로 들이려 한다는 소문 말인가요?”
티파티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음장이 됐다. 헬렌 자작 부인이 말했다.
“……네, 폐하. 이 자리에서 할 말은 아닌데 저희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요나 백작 부인도 얼른 사과를 덧붙였다.
“저의 실언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폐하.”
“괜찮습니다, 부인들. 티 파티라는 게 원래 이런저런 소문을 나누는 장소 아니던가요?”
아우라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덤덤하게 물었다.
“다만 제게는 들려오는 소식이 아직 없어서요. 만약 그 소문이 정말이라면…….”
달칵, 찻잔이 받침대에 부딪혔다.
“어디까지 진행이 됐는지 궁금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