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26)화 (26/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26화

그 시각.

아우라는 촛불 앞에서 마법학 책을 읽고 있었다. 장례식에 다녀오는 길에 직접 도서관에 들러 빌려 온 것이었다. 봉인을 푸는 데 작은 힌트라도 얻었으면 하는 그런 마음으로.

똑똑.

웬 노크 소리에 아우라가 고개를 들었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밤에 시중을 드는 시녀가 들어왔다.

“이 밤에 무슨 일이지?

“폐하, 기사단장님이 오셨습니다.”

‘조쉬가?’

아우라는 잠옷 위에 가운을 걸쳐 입고 밖으로 나갔다. 문밖에서 조쉬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조쉬?”

“황후 폐하. 밤늦은 시간에 정말 죄송합니다.”

조쉬가 다급하게 예를 차렸다.

“무슨 일이죠? 그대의 말대로 이 밤늦은 시간에.”

“그게…… 실은 황제 폐하께서 며칠째 악몽에 시달리십니다. 이센 전하께서 돌아가시고 전혀 주무시지 못하고 계십니다.”

‘역시 그랬군. 안색이 안 좋더라니.’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그보다 먼저 산책로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서재에 다시 들어오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그 목소리가.

아우라가 팔짱을 끼곤 문기둥에 어깨를 툭 기댔다.

“그래서요?”

시큰둥한 반응에 조쉬는 조금 당황했다. 아우라가 걱정하는 척이라도 해 줄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 폐하, 혹시 괜찮으시다면 오늘 하루만 황제 폐하의 방에 들러 주시겠습니까?”

“제가 간다고 도움이 될 리가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황후 폐하와 계시면 안정을 찾으실 겁니다.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폐하.”

훌륭한 부하였다. 제 주군을 위해 이렇게까지 하다니.

그러나 아우라는 그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안된 일이지만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없답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제가 그분의 공간에 들어가는 걸 무척 싫어하시거든요.”

“예……?”

“더 드릴 말이 없군요. 그럼 들어가 보겠어요.”

“저, 폐, 폐하!”

조쉬가 애절하게 아우라를 불렀다. 그러나 아우라는 망설임 없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아…… 너무하셔, 정말.”

‘겉으로는 투덕거리셔도 마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나.’

조쉬는 터벅터벅 돌아갔다.

방 안으로 돌아온 아우라는 다시 책을 펼쳤다.

‘악몽을 꾸건 말건. 절대 안 가 줄 거야. 미치지 않는 이상.’

***

한 시간 뒤.

아우라는 카를의 방 앞에 있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내가 미쳤지.’

그녀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카를이 미운 점을 대라면 수도 없이 말할 수 있을 지경인데 왜 자신은 여기까지 온 걸까.

망설이던 끝에 그녀가 노크를 했다.

똑똑.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잠들었나?’

그렇다면 가 버릴까 싶다가도 자는 것까지만 확인하기로 했다. 오후에 본 그의 안색이 정말 안 좋긴 했으니.

아우라가 조심히 문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 침대에 앉은 카를이 보였다.

‘깨어 있었잖아.’

그녀가 슬쩍 안으로 들어갔다.

“카…….”

퍽!

그 순간 아우라의 얼굴 옆으로 쿠션이 날아왔다. 쿠션은 힘없이 그녀의 발치로 떨어졌다.

“나가라고 했잖……!”

카를이 문을 노려보았다. 그곳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어붙은 아우라가 있었다. 그러자 카를도 그녀와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어, 그래. 나갈게.”

아우라가 얼른 뒤돌아섰다. 여기에 있다간 뭐에 맞아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대체 여길 왜 와선…….”

그녀가 중얼거리며 문을 다시 열었을 때였다. 등 뒤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녀의 머리에 그림자가 졌다.

달칵.

그가 긴 팔로 문을 눌러 닫았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닿지도 않았는데 느껴지는 그의 체온 때문일까. 아우라의 심장이 놀란 듯 쿵쿵 뛰었다.

아우라는 여전히 문을 바라보며 애써 태연하게 물었다.

“나가라며.”

“왜 왔어? 내가 얼마나 망가졌는지 궁금했어?”

낮게 그르렁대는 목소리가 낯설었다. 마치 상처받은 짐승 같았다.

“……그래. 구경 다 했으니 이제 네 바람대로 나갈게. 문 좀 놔.”

아우라가 문손잡이를 당겼지만 카를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카를이 문을 놓더니 그녀의 양팔을 매달리듯 잡았다.

툭. 그의 이마가 그녀의 어깨에 닿았다.

“……가지 마.”

“뭐……?”

“하루만 같이 있어.”

“싫어. 네가 이번에 뭘 던질 줄 알고…… 앗!”

카를이 뒤에서 아우라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우라는 깜짝 놀랐다. 등에 닿은 그의 몸은 말 그대로 땀범벅이었다. 대체 얼마나 마신 건지 술 향기도 훅 풍겨 왔다.

“몇 시간, 몇 시간이면 돼.”

“……싫어.”

“자비를 베풀어, 아우라.”

“…….”

“제발.”

저 말들이 정말 카를의 입에서 나오는 걸까. 믿을 수가 없어서 아우라가 뒤를 돌아봤다. 카를은 곧 죽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과 잔뜩 충혈된 눈이 특히 그랬다.

“……알았어. 침대로 가.”

“하아…….”

카를이 마른세수를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우라는 먼저 침대에 올라가 앉았다. 그러자 카를이 그녀를 따라왔다. 그는 자연스럽게 아우라의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베개가 되어 준단 말은 안 했는데.”

그는 말이 없었다. 일부러 이러는 건지, 들리지도 않는 건지.

달빛에 카를의 얼굴이 환히 빛났다. 고통에 잠긴 듯 좁아진 미간도, 땀이 맺힌 이마도.

아우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언제부터 이랬어?”

“타샤가 죽은 후로 심해지고, 이센이 죽은 후로는…… 최악이었어.”

그 말에 아우라가 멈칫했다. 죄책감을 느끼고 싶진 않지만 마음에 걸리는 건 사실이었다.

‘내가 내 부모와 오빠들을 잃은 것처럼 너도 그 몇 안 되는 네 사람을 잃었으면 좋겠어. 이센이건, 타샤건.’

‘이런 고통을 받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또 그들이 진심으로 죽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만약 그랬다고 해도 카를이 이토록 고통받을 줄도 몰랐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카를이 스르르 눈을 떴다.

“여전히 잠이 안 와?”

아우라가 물었다. 카를이 손을 뻗어 아우라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반쯤은 잠에 취한 듯 더듬더듬 말했다.

“북쪽 탑은…… 너와 어울리지 않아.”

“…….”

“산책로에서…… 그 말을 하는 걸 잊어서…….”

“…….”

“……중요한 말은…… 항상 그런 식으로……. 바보 같아.”

그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떠나 목과 팔을 타고 천천히 내려왔다. 종착지는 손이었다. 카를은 아우라의 손에 깍지를 끼더니 손등을 입에 갖다 댔다.

아우라가 가만히 핀잔을 줬다.

“……제멋대로 굴기는.”

손등에 닿는 그의 숨결이 점점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자는 줄 알았던 카를이 가늘게 눈을 떴다.

“네가 자꾸 꿈에 나와.”

‘악몽에 나도 나오는 건가.’

“어떻게 나오는데?”

카를이 아우라의 손을 더 꽉 잡았다. 뭐가 우스운지 미소까지 지으며.

“……아름답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카를은 거짓말처럼 잠이 들었다. 그로부터 한참 후에야 아우라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게 뭐야. 바보같이.”

그녀는 연민 섞인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리고 그의 머리칼을 가만히 쓸어 주었다.

***

햇빛이 방 안을 가득 채울 무렵, 카를이 눈을 떴다. 그는 쓱 몸을 일으키곤 주위를 살폈다. 침대에는 그뿐이었다.

숙취가 조금 있지만 몸도 머리도 산뜻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누린 깨끗하고 깊은 잠이었다.

어제 새벽의 일들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악몽에서 깨어났고, 도망치는 마음으로 술을 마셨고, 아우라가 보여서 붙들고 빌었다.

‘결국 재워 준 것 같긴 한데…… 기억이 잘 안 나는군.’

똑똑.

노크에 이어 테오가 침실로 들어왔다.

“폐하, 일어나셨습니까?”

“응. 아우라는?”

“예?”

“황후가 왔다 갔잖아. 새벽에.”

“……저는 보고받은 게 없습니다만.”

‘조쉬가 부른 건가. 꿈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폐하, 요새 부쩍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셔서 황궁의를 데려왔습니다.”

“황궁의는 몇 번이나 봤잖아. 오늘은 잘 잤으니 괜찮아.”

“그래도 이왕 데려왔으니 진료를 받아 보시죠.”

테오가 재차 권유했다. 카를은 귀찮았지만 테오를 이겨 먹는 건 더 귀찮은 일이었다.

“그래. 들여보내.”

“네, 폐하.”

잠시 후 카를과 황궁의는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그동안 별 소용도 없는 수면제를 몇 번 받기는 했다. 그러나 이렇게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었다.

“불면과 악몽을 3년 정도 겪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 언제부터 상태가 악화되셨습니까?”

“악화된 건…… 황궁에 돌아온 이후.”

“식사량은 어떠십니까? 두통이나 메스꺼움은요?”

“식사에는 문제가 없어. 신체적인 문제는 잠을 못 자서 생긴 피로 정도.”

황궁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카를은 건강해 보였다.

“평소 기분은 어떠십니까?”

“기분? 그게 무슨 상관이지?”

“조심스러운 의견입니다만, 정신적인 부분을 짚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정신적인 부분’이란 말에 카를이 인상을 찌푸렸다.

“난 멀쩡해. 정신병은 없어.”

“예, 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신적으로 받는 자극들이 몸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폐하의 경우에는 그게 악몽일 수도 있고요.”

그럴듯한 말이었다. 카를은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 고통은 불면보단 악몽에서 왔다. 악몽에서 깨면 불면이 시작되었고.

황궁의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떤 식의 악몽을 꾸십니까?”

“내가 죽인 이들이 나와서 나를 쫓지.”

간명하고 거리낌 없는 대답이었다. 이렇다 할 죄책감도 없는. 황궁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의사로서 소견을 드린다면…… 그 어떤 강인한 기사도 사람을 죽이고 아무렇지 않을 순 없습니다.”

“하지만 필요한 경우 사람을 죽여야 하는 게 기사의 일이지.”

카를이 딱 잘라 말했다.

“예, 맞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충격을 받지 않는 건 아니니까요. 폐하의 성향으로 짐작하건대, 그런 충격을 속에 쌓아 두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 한들 카를은 자신을 연민하고 싶진 않았다. 그저 낫고 싶을 뿐.

“그럼 그에 대한 처방을 내리면 되겠군.”

“죄송하지만 약으로는 해 드릴 게 없습니다. 음…… 혹시 상태가 호전되는 경험을 하신 적은 없으십니까?”

“……있다면?”

황궁의가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는 듯 대답했다.

“그럼 그 안에서 해결책을 찾아봐야지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