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25화
아우라는 일부러 이센 이야기를 꺼냈다. 미나가 알아 온 바로는 이센은 자살이 아니라 살수에게 당했다고 했다. 라이언의 짓일 게 뻔했다.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그는 이센의 죽음에 책임이 있었다.
라이언이 퍽 침통한 얼굴을 했다.
“조카 이야기를 하니 마음이 안 좋습니다.”
“……네. 그러시겠지요.”
“그래서 말인데, 잠시 제게 시간을 내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시간을요?”
“네. 날도 맑으니 함께 산책하며 마음을 풀면 좋을 것 같습니다만.”
단둘이 대화하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이센이 죽은 지금,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긴 하지. 여러모로.’
“좋습니다. 가시죠.”
답이 나오기가 무섭게 라이언이 팔을 들었다. 산책에 에스코트는 선택 사항이었지만 아우라는 그 팔을 잡았다.
두 사람은 묘지 옆 산책로로 들어섰다. 라이언은 기분이 퍽 좋아 보였다. 아우라가 물었다.
“이센 황자가 대공과 친하게 지낸 걸로 기억하는데요.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그럼요. 이센은 참…… 귀엽고 착한 조카였죠. 순진하기도 했고요.”
라이언이 나뭇잎을 손가락을 톡 튕겼다. 이파리는 반으로 찢어져 버렸다.
“황후 폐하.”
“네, 대공.”
“제게 궁금한 것이 있지 않으십니까?”
“글쎄요. 그런 게 있으려나요.”
라이언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이를테면, 핀이라든가.”
“…….”
“또는 핀의 봉인을 푸는 방법이라든가요.”
아우라는 걸음을 멈추고 그의 푸른 눈을 바라보았다. 북부 사람만이 가진 그 신비로운 눈동자가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그가 자신에게 일말의 관심을 느낀다는 것을.
그게 그저 인간적인 흥미건, 남녀 사이의 호감이건 그걸 잘만 이용하면 핀에 대해 말해 줄지도 몰랐다.
아우라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 한들 대공에게 들을 말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이용 가치가 있다고 해도 그와 얽히고 싶진 않았다. 친조카를 방패막이 삼아 죽음으로 몰고 간 자였다. 언제 아우라에게도 덫을 놓을지 몰랐다.
“……하!”
라이언은 대뜸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못 참겠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하하…… 하하하…….”
“뭐가 그리 우스우신가요?”
“황후 폐하께서는 정말 재미있으신 분입니다.”
“칭찬인가요?”
“제가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찬사지요.”
구름이 그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었다. 순간 그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아우라가 그의 팔을 놓으려 했다.
“산책은 다 한 것 같군요. 이만 돌아가시죠.”
“황후 폐하, 혹시 핀에 대해 제게 묻고픈 마음이 생기신다면 말입니다.”
라이언이 아우라의 팔을 붙잡았다.
“봄 무도회에서 저와 춤을 한 곡 춰 주십시오.”
“……춤을요?”
“한 곡이면 됩니다.”
춤을 추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황실 행사에서의 대공과 황후의 춤. 충분히 자연스러운 그림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춤을 추는 동안 은밀한 대화를 주고받을 수도 있고.
라이언은 봄 무도회가 끝나면 영지로 돌아간다. 정말로 대화를 해야 한다면 그때가 마지막 기회였다.
“일단 이걸 놔주시죠.”
아우라가 팔을 빼려 했다.
“대답은 안 해 주시는 겁니까?”
그가 장난스레 되물었다. 그러면서 팔을 놔주진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다가와 아우라의 어깨를 감쌌다.
“!”
“여기 있으면 어떡해.”
“……카를.”
“한참 찾았잖아.”
카를이 그렇게 말하며 라이언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라이언이 그제야 아우라를 놓아주며 카를에게 예를 표했다.
“황후 폐하와 산책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래. 그럼 이제 돌아가도록 하지.”
그러면서도 카를은 정작 움직이지 않았다. 그 말의 의미를 알아챈 라이언이 다시 꾸벅 인사를 했다.
“저는 이만 가 봐야겠군요. 산책 즐거웠습니다, 황후 폐하.”
“네, 대공. 들어가십시오.”
라이언이 아우라를 한 번 더 보고는 산책로를 떠났다. 좋지 않은 컨디션 때문일까. 카를은 심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아우라에게 물었다.
“라이언과 뭘 하고 있었어?”
“아무 이야기도. 산책을 했을 뿐이야.”
“아, 그래?”
카를이 대뜸 아우라의 손을 제 팔에 걸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아우라는 엉겁결에 그에게 끌려갔다.
“왜, 왜 그래?”
“계속해. 산책.”
“어?”
“산책하자고. 라이언과 나다닐 만큼 네가 산책을 좋아하는지 미처 몰랐군.”
아우라가 잰걸음으로 그를 따라갔다. 카를이 그녀의 바쁜 걸음을 흘긋 보곤 보폭을 줄였다.
이윽고 두 사람은 그럴듯한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 피차 말이야 없었지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아우라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카를과의 만남은 대부분 야밤이거나 침대에서 이루어졌다. 이렇게 밝은 곳에서 한가롭게 산책을 하게 될 줄이야.
아우라가 슬쩍 물었다.
“안 바빠?”
“안 바빠.”
“황제가 어떻게 안 바빠?”
“황제는 바쁜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그럼 안 피곤해?”
“안 피곤해.”
“피곤해 보여, 굉장히.”
“걱정하는 거야?”
아우라는 입을 다물었다. 이렇게 실없는 대화는 친한 이들끼리나 나누는 거니까.
카를은 호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호수의 윤슬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아우라는 고민했다. 카를의 팔에 걸린 손을 빼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카를이 말했다.
“라이언의 이야기는 그 무엇도 믿지 마. 너는 똑똑하니까 알아서 하겠지만.”
“알아서 하는 줄 알면서 잔소리를 하는 이유는 뭐야?”
“너는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니까.”
카를이 호수에서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센을 살리려 한 거, 왜 말하지 않았지?”
“책에 쪽지를 남겼다는 말만 하지 않았을 뿐이야. 배후도 알아봐 줬고, 이센과 협상할 수 있도록 도왔잖아.”
“참 이상해.”
카를이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귓바퀴를 스치는 손길이 유난히 느릿했다.
“그럼 애초에 내 서재에 들어올 이유도 없었던 거 아닌가.”
아차 싶었다. 아우라는 반사적으로 그의 팔에서 손을 빼냈다.
여러 가지로 정신이 없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군사 지도가 아니라면 서재에 들어갈 이유가 사라진다는 것을.
“군사 지도만큼 중요한 게 있는 곳이니까…… 다른 것도 있겠지 싶었어.”
“다른 것?”
“그래. 뭐라도…… 약점이 될 만한 것.”
카를이 그 대답이 재미있다는 듯 설핏 미소를 지었다.
“약점이라.”
“그래. 그런 걸 찾아서…… 네게서 좀 벗어나 보려고. 그래서 그랬어.”
아우라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말이 되는 것 같기도, 되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하아…… 아우라.”
카를이 아우라를 가만히 안았다. 제 심장 박동 소리가 카를에게 들릴 것 같아 몸을 움츠리게 됐다.
그의 손이 아우라의 목덜미를 감쌌다.
“그 서재는 나 아닌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어.”
“…….”
“또 그런 짓을 했다간, 절대 용서하지 않아.”
아우라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카를은 아우라를 놓아주곤 유유히 산책로를 떠났다.
혼자 남은 아우라는 치마를 움켜쥐고 있던 손을 폈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아우라는 느낄 수 있었다. 자신에 대한 의심을 기꺼이 거둬 주던 카를의 선심 아닌 선심. 그리고 그 선심은 이번이 마지막일 거였다.
‘당분간은 조심하는 게 좋겠어. 그리고 다른 방법을 찾자.’
가장 먼저 생각난 건 루안이었다. 아우라를 돕기 위해 황궁으로 오겠다던 루안. 그는 지금 그 준비를 어디까지 마쳤을까.
‘루안이 올 때까진 정보를 모으며 몸을 사리는 게 낫겠어.’
한편, 산책로를 벗어난 카를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약점이라.”
‘되지도 않는 변명을 하다니. 내게는 절대 말할 수 없다는 건가.’
그는 얕은 한숨을 쉬었다.
문득 어지럼증이 돌아 얼굴을 찌푸렸다. 산책로 앞을 지키던 조쉬가 얼른 다가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십니다. 나흘째 거의 한숨도 못 자지 않으셨습니까. 악몽도 계속 꾸시는 것 같고요.”
카를은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이센 장례 때문에 신경 쓸 게 많아서 그래. 오늘은 자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계는 한계였다. 그저 못 자는 게 아니라 악몽까지 동반하고 있었으니.
조쉬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째 데블라에서보다 상황이 더 안 좋은 것 같았다.
“폐하, 그래도 황후 폐하와 함께 계시면 좀 주무시지 않습니까. 잠자리를 지켜 달라고 해 보심이…….”
그러나 조쉬는 그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카를이 입 다물라는 듯 그를 봤기 때문이다.
“조쉬.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예, 폐하.”
카를이 황궁으로 발길을 돌렸다. 조쉬는 옅은 한숨을 쉬더니 그를 뒤따라갔다.
***
그날 밤.
침대에서 잠들어 있던 카를이 미간을 찌푸렸다.
“……안 돼!”
그가 눈을 부릅뜨며 몸을 확 일으켰다. 아무렇게나 휘두른 팔이 협탁의 화병을 건드렸다.
와장창!
화병이 엄청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러나 카를은 그 소리마저 듣지 못했다.
악몽이 하루가 다르게 고약해지고 있었다. 형체도 없이 망가진 시체들, 베고 또 베어도 그것들은 다시 살아나 그를 따라다녔다.
벌컥.
경호를 서던 조쉬가 달려 들어왔다. 화병이 깨지는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나가.”
카를이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폐하, 황궁의라도-”
“나가!”
“!”
카를의 고함에 조쉬가 움찔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방을 나섰다. 그러나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황궁의를 불러? 아니야. 벌써 몇 번이나 왔다 갔지만 소용없었잖아.’
조쉬는 안절부절못하며 복도를 오갔다. 그때, 방에서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측근인 그로서도 이런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쩐다. 저러다 큰일이라도 내실 것 같은데.’
물론 조쉬는 황궁의를 부르는 것보다 더 나은 답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바로 오늘 오후에 카를이 남긴 말이었다.
‘조쉬.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왜 하필 자신은 그 말을 들었는가. 왜 하필 자신의 근무일에 이런 일이 생기는가.
그 모든 억울함을 내리누르고 조쉬는 결단을 내렸다.
‘아, 모르겠다. 일단 저지르고 보자.’
그는 어디론가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