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24화
“제 이름은 아우라예요.”
결혼식 날 밤. 아우라에게서 그 말을 듣는 순간, 카를은 느꼈다. 자신의 인생이 여기에서 끝나 버리는 기분을.
그저 예쁘기만 한 줄 알았던 제니아인 여자. 관심을 주기가 껄끄러워 청록빛 눈동자도, 상앗빛 금발도 애써 외면했는데.
이해가 안 갔다. 소매를 잡은 그 하얀 손이 대체 뭐라고. 그게 뭐길래 낭떠러지를 앞둔 것만 같은 아득함을 줬던 걸까. 물러나야 한다는 걸 머리론 이해하면서도 몸을 던져 버리고 싶은 비이성적인 충동. 카를은 난생처음 느끼는 그 묘하고도 강렬한 끌림에 잠시 그대로 굳어 버렸다.
다만 그는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침대로 다시 올라갔다가는 저 여자에게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카를은 방에서 도망쳤다. 그는 정원에서 새벽 내내 자신을 설득했다.
미련한 트루 블러드 형제들은 이미 카를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아마 누구 하나가 황제가 될 때까지는 이 괴롭힘이 계속되리라. 아무리 카를이 무기력한 척을 해도 나약한 인간들의 질투란 그런 법이니.
눈에 훤했다. 카를이 아우라를 아끼는 순간 그들은 그녀도 표적으로 삼을 거였다.
‘성가신 일은 만들지 말자. 저런 여자를…… 저렇게 고귀한 여자를 지키려면 나는 몇 배는 더 강해져야 해. 정말이지 몇 배는 더……. 그만둬. 지금도 버티기 쉬운 건 아니잖아.’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답은 뻔했다. 명목상의 부부로만 남는 것. 그 의견을 다시 한번 확실하게 전달하는 것. 그녀가 소매가 아니라 바짓단을 붙잡아도 흔들리지 않으리라.
해가 뜰 무렵 카를은 다시 본궁으로 향했다. 막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화단의 수선화가 눈에 들어왔다.
‘닮았다 한들 뭘 어쩌자는 건데.’
카를은 본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다시 돌아왔다. 그는 주먹을 꽉 쥔 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미친 새끼…….”
그는 화단 앞에 앉아 수선화를 꺾기 시작했다. 한 송이, 한 송이, 또 한 송이. 수선화를 그러모으는 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말대로 정말 미친 게 아닌가 싶었다. 제 인생을 이렇게 끝내 버리려고 하다니. 저 여자에게 모든 걸 바칠 각오를 하고야 말다니.
카를은 그 꽃다발을 들고 황자비의 방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녀는 어쩌면 전날 밤의 일을 탓하며 꽃을 거절할지도 몰랐다. 그럼 카를은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쉬며 물러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어제와 같은 표정으로 꽃을 받는다면…….
‘그러면…… 이걸 받으면 너도 끝나는 거야.’
그리고 아우라는 사랑스러운 얼굴로 그 꽃다발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아우라와 함께했던 몇 달. 카를은 행복을 배웠다. 심장이 다른 방식으로 뛸 수 있다는 것 역시.
그리고 그 행복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도 배웠다.
황태자가 제니아를 침공하고 아우라를 가뒀다. 슬퍼할 틈 따위 없었다. 모든 미래를 그녀를 살리는 데에 쏟아부어야 했으니.
병석에 들어간 부황과 거래를 했다. 데블라를 점령할 때까지 아우라를 살려 달라고.
부황은 말했다.
“좋다. 대신 지금 바로 떠나라. 네 형의 눈에 띄기 전에.”
카를은 바로 기사들과 황궁 문으로 향했다. 아우라에게 뭔가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측근인 프릿에게 자신의 검과 금화를 건넸다.
“북쪽 탑의 경비병에게 금화를 쥐여 주고 부탁해라. 아우라 황자비에게 이 검을 전하라고. 이걸로 자신을 지켜서…… 꼭 살아남으라는 말도.”
“……예, 폐하. 먼저 떠나십시오. 따라가겠습니다.”
프릿이 북쪽 탑으로 달려갔다. 카를은 탑을 한 번 올려다보고는 그대로 황궁을 떠났다.
데블라는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마물, 다른 제국의 기사들, 방랑 기사들, 부랑 마법사들. 그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또 죽였다.
곧 불면과 악몽이 시작되었다.
잠이 들 때마다 그가 죽인 얼굴과 비명이 떠올랐다. 그래도 그 지옥 같은 밤을 어떻게든 버텼다. 돌아가면 아우라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렇게 3년이 흘렀다.
데블라를 정벌할 무렵 부황이 서거했단 소식을 들었다. 더 망설일 것도 없이 환궁했다. 그가 묻힐 마지막 피는 결국 황태자였으므로.
그리고 아우라가 그를 찔렀다.
아우라를 지켰다고 말하는 카를에게 아우라는 카를이 자신을 버렸다고 말했다. 카를은 그제야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관계는 수렁으로 빠져들어 갔다. 대체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차라리 하나하나 따지고 든다면 더 편했으련만. 아우라는 변명을 바라는 대신 증오를 택했다.
처음에는 그 증오가 감당하기 버거웠으나 이내 깨달았다. 자신을 향한 미움, 그 집념. 아우라는 바로 그 힘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그렇다면…… 그것으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나 행복 같은 게 얼마나 허망한 건지 3년 전에 잘 배우지 않았나.
문제는 불면이었다. 불면은 점점 더 심해졌다.
데블라의 기억에 얹어서 그의 꿈엔 이제 더 많은 것들이 나타났다.
타샤.
그녀는 카를을 붙잡고 울었다.
“폐하가 어떻게 저에게……! 제가 폐하를 어떻게 키웠는데요!”
이센.
그는 입에서 피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지켜야 해요……. 어머니를…… 지켜야 하는데…….”
그리고…… 아우라.
침대에 누운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카를의 얼굴을 감싼 채 끌어 내렸다. 속수무책으로 그녀에게 다가가면 여지없이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괴물. 너는 괴물이야.”
***
“……!”
카를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하아…… 하아…….”
심장이 쿵쿵 뛰어 대고 있었다. 벅찬 숨을 고르며 창밖을 보았다. 푸른 새벽빛이 그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얼마나 잔 거지? 한 시간? 한 시간 반?’
이센이 죽고 사흘 만에 처음 든 잠이었다. 악몽으로 가득한 그 시간을 잠이라 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지만.
카를은 도망치듯 침실 밖으로 나섰다. 반쯤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본능이 이끄는 대로 걸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아우라의 침실 앞이었다.
문고리를 꽉 부여잡았다.
몇 번의 경험을 통해 그는 알고 있었다. 아우라를 안고만 있어도 잠이 쏟아진다는 것을. 그녀만이 그를 불면과 악몽에서 구제해 준다는 것을.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에겐 그런 힘이 있었다. 하지만 차마 이 문고리를 돌린 순 없었다.
아직도 눈에 훤했다. 사흘 전 새벽, 이센이 죽고 바로 아우라를 찾아왔을 때. 기척을 죽이며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던 순간 카를은 더 다가갈 수 없었다.
아우라는 침대에 앉아 북쪽 탑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위태로운 뒷모습. 그 뒷모습엔 자신이 남긴 상처가 선연했다.
더는 볼 수가 없어서 조용히 황후의 방을 나왔다. 한참을 그곳에서 서 있다가 시녀장을 만나 책을 전달했다. 그게 얼마나 비겁한 짓인 줄 알면서도.
쿵…….
그가 주먹으로 문을 살짝 내리쳤다.
“……제길.”
‘무슨 염치로.’
카를이 결국 말없이 돌아섰다. 앞으로 얼마나 더 새벽마다 이런 짓을 반복할지 모를 일이었다.
***
오늘은 이센의 장례식 마지막 날이었다. 아우라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지난 이틀간 장례식에 불참했다. 장례식에 가면 카를을 봐야 하니까.
하지만 황후가 황자의 장례를 끝까지 모른 척할 순 없었다. 벌써 귀족들 사이엔 말이 나왔을 것이다.
아우라는 검은 드레스 차림으로 예배당에 갔다. 예배당엔 많은 귀족이 마지막 날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교적이었던 이센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듯했다.
그녀는 흰 꽃을 한 송이 들고 예배당 단상으로 올라갔다. 관에 누운 이센은 창백했지만 평화로워 보였다.
아우라는 그의 가슴에 흰 꽃을 올려 두고 진심으로 기도했다.
‘부디 평화로운 곳으로 가길.’
기도가 끝나자 카를을 볼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다. 그러나 지난 이틀간 그녀는 자신을 잘 다스렸다. 어차피 이 황궁에 머무는 목적은 핀이니 그것에만 집중하자고.
아우라는 상석으로 갔다. 그리고 카를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의 안색이 너무 좋지 않았다. 눈 아래는 거뭇했고, 입술은 그 색을 잃었다. 눈에는 생기 대신 예민함만 가득했다.
‘설마 이센이 죽어서 저러는 건가? 아닐 거야. 사흘 전만 해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는데.’
아우라는 일단 카를의 옆에 앉았다. 그의 시선이 아우라에게 닿았다.
“몸이 안 좋았다며.”
가타부타 묻는 말에 아우라는 황당했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가.
“이젠 괜찮아. 다 나았어.”
“그런가.”
카를의 손끝이 아우라의 손등을 툭툭 두드렸다. 아우라가 지금 뭘 하느냐는 표정으로 그를 봤다. 카를이 말했다.
“아닌 것 같아서.”
아우라는 손을 치웠다.
“……네 몸이나 잘 돌봐. 시체인 줄 알았어.”
카를이 피식 웃었다.
장례식은 평화롭게 끝이 났다. 이센의 시신은 황가의 묘지에 안장되었다.
카를은 이센의 묘 앞을 잠시 지켰다. 아우라는 그를 혼자 두고 묘지를 떠났다. 함께 있어 줄 기분은 아니었으므로.
얼마나 걸었을까. 별안간 리엘이 달려와서 그녀의 다리를 와락 안았다.
“으하아아아앙!”
리엘은 눈물을 쏟았다. 아우라는 이센이 리엘과 퍽 친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기억해 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내내 기다렸는데…….”
“미안해. 좀 아팠어.”
“막내 삼촌이, 삼촌이…….”
리엘이 숨을 히끅거렸다. 아우라가 우는 리엘을 안아 달랬다. 리엘의 숨이 점차 차분해질 때였다.
“황후 폐하.”
누군가가 아우라에게 다가왔다. 멈칫한 것도 잠시, 아우라는 얌전하고도 정숙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공. 오랜만입니다.”
그와 대화하는 건 결혼식 이후 처음이었다. 대관식에서 스치듯 인사를 나누긴 했어도.
라이언이 리엘을 달래기 시작했다.
“우리 귀한 황녀님이 속이 상했나 보네. 나중에 할아버지에게 놀러 와. 재미있게 놀아 주마.”
‘할아버지라. 하긴, 촌수로 따지면 대공이 리엘의 할아버지지.’
“리엘 전하!”
마침 리엘의 새 유모가 달려왔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리엘을 데려갔다.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대공 전하. 잠깐 한눈을 판 틈에.”
“괜찮다. 데려가서 물을 좀 먹이도록 해라.”
“네, 폐하.”
유모는 리엘을 데리고 얼른 떠났다. 라이언이 싱긋 웃었다.
“아이를 잘 돌보시는군요.”
“리엘이 저를 잘 따른답니다. 또…….”
아우라가 라이언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센 황자도 잘 따랐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