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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23)화 (23/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23화

저벅저벅.

텅 빈 복도엔 카를의 발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리고 있었다.

“…….”

처음부터 아우라를 완전히 믿진 않았다. 다만 그녀를 거부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기꺼이 함께 침대로 갔다. 다른 꿍꿍이가 있던 거라면 어느 정도는 속아 줄 마음도 있었다. 그 머릿속을 캐내는 것보단 그 몸을 안고 싶은 충동이 컸으니.

그래도 설마하니 반역을 도울 줄은 몰랐지만.

‘이젠…… 이젠 정말 괜찮아.’

그렇게 말하던 표정. 속아 주고 싶은 마음을 믿고 싶은 마음으로 바꿔 놓던 그 미소. 그렇게 웃었던 주제에 어떻게 그런 짓을.

반역이 전부였다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진 않았을 거다. 그녀를 방에 두고 나오려던 순간, 카를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무섭냐고.

그 말을 내뱉고 나서야 깨달았다. 무섭다고, 제발 용서해 달라고 매달려 주기를 바랐던 자신을. 그렇게만 해 준다면 이 모든 걸 없던 일로 넘기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마저도 거부했다. 자신과의 관계가 이대로 나락으로 떨어져도 상관없다는 듯이.

결국 카를은 자기 자신을 가장 용서할 수 없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를 붙잡은 머저리 같은 자신을.

그때, 어둠 속에서 조쉬가 나타났다.

“폐하.”

조쉬가 나타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일찍이 그에게 이센의 감시를 맡긴 상태였으니.

“이센은?”

“아직도 동쪽 숲에 있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합니다. 계속 지켜볼까요?”

“……아니. 가자.”

***

“추워…….”

아무리 초봄이라지만 그래도 새벽은 추웠다. 이센은 손을 모아 입김을 불었다.

‘형수님은 안 오시는 걸까.’

이센은 아무래도 아우라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마음이 바뀌면 굳이 나올 필욘 없어요. 황자나, 나나.’

‘아니야. 형수님은 내 제안을 거절할 수 없어. 믿고 기다려 보자.’

이센이 보기에 아우라는 아직 카사의 황후라기보다는 제니아의 왕녀에 가까웠다. 제니아의 불행을 이대로 무시하고 일신의 편안함을 선택할 리 없었다.

바스락…….

등 뒤로 낙엽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우라인가 싶어 뒤를 돈 이센이 살짝 놀랐다.

“……형님.”

퍽!

카를의 주먹이 이센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이센은 속수무책으로 넘어졌다.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동쪽 숲의 담장까지 몸이 미끄러질 정도였다.

이센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그런 이센의 멱살을 카를이 잡아 올렸다.

“내 부인을 반역에 끼우려고?”

칼을 벼리는 듯한 날 선 목소리. 이센은 그제야 이 상황을 이해했다.

둘 중 하나였다. 아우라가 실패했거나, 카를에게 모든 것을 말했거나.

어느 쪽이건 결론은 하나였다. 자신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이센의 마음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두 가지만 묻지, 이센.”

“…….”

“배후가 누구지?”

“……아시지 않습니까. 여기까지 오신 걸 보면.”

“아니. 네가 말해. 네 입으로.”

카를은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 이센이 뭔가를 눈치채고 물었다.

“꼭 저를 통해서 증언을 얻으셔야 하는 이유라도 있나요?”

“…….”

“형수님을 이 일에서 완전히 배제하시려고요?”

맞는 말이었다. 라이언 같은 황족을 치려면 분명한 증거가 필요했다. 이센이 증언하지 않는다면 남는 건 아우라뿐이었다.

카를이 이를 꽉 물더니 이센의 목을 움켜쥐었다.

“증언해. 그럼 목숨은 살려 주지.”

“으윽…… 하, 하하…….”

이센이 고통스러운 와중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살려 주려 하시다니…….”

“대체 왜 그렇게 멍청한 짓을 벌인 거지? 모든 증거가 너만을 향하고 있어. 라이언이 널 방패 삼아 일을 벌이는 걸 정말 몰랐나?”

“왜 몰랐겠어요.”

“…….”

“제겐 지켜야 할 사람이 있어요. 형님이 형수님을 지키려 하시듯.”

카를은 문득 떠올렸다.

‘그리고 어머니 이야기를 흘리듯 하던데…… 중요해 보였어.’

“네 어머니?”

이센의 눈이 커졌다. 그는 처음으로 크게 동요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카를이 그의 목을 놔주었다.

“리안 카사였나. 네 어머니는 어디 있지?”

“…….”

“……수트라 성?”

이센이 덜덜 떨며 시선을 피했다. 카를은 듣지 않아도 대강의 상황이 짐작이 갔다. 어떠한 이유로 리안 카사가 라이언에게 볼모로 잡혀 있는 듯했다.

“……증언만 해. 그럼 널 살려 주고 네 어머니 일을 해결해 줄 테니. 그게 어떤 문제건.”

“혀, 형님…… 정말이십니까?”

카를이 이센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덧붙여서, 한 가지만 더 묻지.”

“…….”

“아우라에게 핀에 대해 말했나?”

이센은 더 혼란스러웠다. 카를이 어떻게 핀에 대해 알고 있는 걸까.

사실 이센은 핀에 대해 잘 몰랐다. 라이언이 설명해 준 내용대로 아우라에게 전달했을 뿐.

그에 반해 카를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했다. 그것을 느낀 순간 이센은 그에게 대항할 의지를 잃었다. 

“……예.”

카를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이센의 멱살을 더 세게 휘어잡았다.

“어디까지 말했어.”

“혀, 형님의 서재에 있다고요……. 그것밖엔…….”

“보아하니 그게 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떠들어 댔군.”

“읏…….”

“정말로, 그게, 얼마나 끔찍한 건지도 모르면서 말이야.”

“예……?”

카를이 이센을 그대로 내동댕이쳤다. 이센이 힘없이 쓰러졌다. 카를은 함께 온 기사들에게 말했다.

“이센을 감옥에 집어넣어. 내일 해가 뜨자마자 재판을 열고 증언을 듣겠다.”

“네, 폐하.”

기사들이 이센을 잡아 일으켰다. 이센은 그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다. 카를이 뒤돌아설 때였다.

슉-!

화살 하나가 섬광처럼 날아왔다.

“이, 이센 전하!”

기사의 외침에 카를이 다시 뒤를 돌았다. 이센은 그 큰 황금빛 눈을 끔벅이며 카를을 보고 있었다. 카를은 그의 가슴에 박힌 화살을 보았다. 심장에 정확히 박힌 듯 퍼지는 핏자국도.

이센은 그대로 눈을 감고 쓰러졌다.

“전하! 전하!”

기사들이 놀라 그를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카를의 목울대가 천천히 오르내렸다.

“조쉬.”

“네, 네…… 폐하!”

“황궁 문을 닫고 이 주위를 다 뒤져. 살수를 찾아라.”

“……네.”

조쉬가 기사들을 이끌고 달려갔다. 하지만 카를은 알고 있었다. 이 화살을 쏜 사람이 라이언이라면 쉽게 잡히진 않을 거라는 것을.

“테오.”

“네, 폐하.”

“이센은 자살한 걸로 처리해. 장례는 황족의 그것에 맞게 성대하게 치르고, 시신 역시 황가 무덤으로 안장해.”

테오는 생각했다.

‘이센 전하의 반역 흔적을 지우시겠다는 건데…… 그럼 배후를 몰아세우는 게 더 어려워지지 않나.’

하지만 테오는 아무 말 없이 물러섰다. 이센의 명예를 지켜 주려는 카를의 선택을 존중한 것이다.

이센의 시신을 정리하던 한 기사가 카를에게 다가왔다. 그는 이센의 피로 젖은 책을 내밀었다.

“이센 전하의 안주머니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카를은 문득 아우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는 이센에게 정보를 얻었고, 그 대가로 소설책을 줬어. 아주 재미있는 소설이지.’

‘정말 소설책을 준 건가.’

카를이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기사가 공손하게 책을 올렸다.

책의 첫 장을 열었다. 그 안엔 구김 하나 없는 쪽지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포기하세요, 이센. 라이언 대공이 당신의 배후임을 황제 폐하께서도 알고 있습니다. 그대는 이길 수 없어요. 오늘의 대화는 없던 걸로 할 테니 황제 폐하의 협상을 받아들이세요. 만약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도망치세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대가 살아남는 것이고, 우리 역시 그걸 바랄 뿐이니.」

***

아우라는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막 뜨기 시작한 아침 해가 하늘을 채웠다.

저 멀리 북쪽 탑이 작게 보였다. 벌써 몇 시간째 그녀는 저 탑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탑이야말로 네게 딱 어울리니까.’

카를의 그 말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정말이지, 지나치게 잘 알았다. 그녀의 가슴속 어디에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덧나게 할 수 있는지.

북쪽 탑이 그녀를 비웃는 듯했다. 이것 보라고. 역시 네가 있어야 할 자리는 여기가 아니었냐고. 그래서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게 아니냐고.

아우라가 치맛단을 꽉 잡았다. 바람을 쐬고 싶었다. 하지만 산책을 나갈 순 있을까. 방문을 열면 기사들이 서 있을 것만 같았다. 공손한 말투로 나가시면 안 된다고 그녀를 막을 것만 같았다.

똑똑.

노크 소리에 이어 미나가 방으로 들어왔다. 미나는 어둡게 내려앉은 아우라의 안색에 놀랐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폐하, 방 앞에서 황제 폐하를 뵀습니다.” 

방 앞에서. 그 말에 아우라가 문을 보았다.

“황제 폐하께서 이걸 폐하께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미나가 조심스레 책을 내밀었다. 누군가의 피에 젖어 검붉게 변한 소설책. 그걸 보고 아우라는 깨달았다.

‘이센이 죽었구나.’

아우라는 책을 받았다. 피가 말라붙어 책장들이 지저분하게 붙어 있었다. 표지를 넘기니 자신이 남긴 쪽지가 그대로 끼워져 있었다.

아우라는 세 권의 책을 준비했다. 한 권에는 라이언을, 한 권에는 테인 공작을, 한 권에는 두 사람을 배후로 지목하는 쪽지를 넣어 뒀다. 짐작되는 배후가 누구건…… 이센이 반역에서 손 떼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녀도 더는 피를 보기 싫었으니까.

또…… 카를이 피를 보게 하는 것도 싫었고.

하지만 불행히도 이센은 이 쪽지조차 보지 못한 듯싶었다.

“저…… 폐하. 황제 폐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

“자유롭게 다니셔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운명의 장난처럼 카를이 이 쪽지를 본 듯했다. 그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바스락.

아우라는 쪽지를 구겨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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