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22화
그의 손이 아우라의 다리를 쓸며 올라갔다. 그녀의 살결을 모두 만져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손길. 그런 손길에 여지없이 아랫배가 간지러워졌다. 게다가 이렇게 그의 무릎에 앉아 있는 게 어색해서 그녀는 결국 시선을 피했다.
카를은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으로 눈만 깜빡이는 아우라를 빤히 봤다.
“아우라.”
그 순간 그의 손이 허벅지를 지나 그 위에 닿았다.
“!”
생경한 느낌에 아우라가 움찔했다. 카를이 그녀의 등을 더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말했다.
“싫으면 말해.”
“……아.”
아우라가 그의 옷깃을 꽉 붙잡았다.
카를이 그녀에게 다시 입을 맞췄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낯선 자극에 아우라가 입술을 꽉 물었다. 그런 그녀를 달래듯 그는 몇 번이나 그 입술을 따뜻하게 머금어 주었다.
“으읏…….”
다리가 파르르 떨려 왔다. 아래가 녹아 없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전신으로 퍼졌다. 그녀는 거의 매달리듯 그를 붙잡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떨리는 입가를 카를은 그냥 두지 않았다. 입안으로 들어오는 혀가 아우라의 안을 쓸었다.
“카를, 잠깐…….”
그의 손바닥, 그의 손가락, 그의 손끝. 그 모든 것들이 닿는 곳에서 만들어지는 쾌락이 감당이 안 됐다. 언제나 느끼던 통증은 어디로 간 걸까. 어째서 이제는 쾌락과 들끓는 듯한 달콤함만이 남은 것일까.
아우라는 그런 물음을 던지며 카를을 끌어안았다. 그렇게라도 붙잡지 않으면 바닥으로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무서워?”
카를이 물었다. 아우라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손을 빼내고 아우라를 침대에 눕혔다. 눈꼬리에 고여 있던 눈물을 닦아 주며 그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쪽. 입가에 짧은 입맞춤을 남기며 그가 아우라의 가슴을 쥐었다. 뭉근한 쾌락이 따뜻하고도 간지럽게 퍼져 나갔다. 아우라는 몽롱한 눈으로 카를을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훅 혀가 들어오며 가슴을 쥐는 손길에도 힘이 들어갔다.
“하아…… 카를…… 읏!”
그 끝을 괴롭히는 느낌에 아우라가 몸을 틀었다. 그의 손길 때문에 마비된 것만 같던 아래에도 서서히 감각이 돌아왔다. 그것을 아는지 카를이 그녀의 다리를 벌리고 무릎에 손을 얹었다. 아우라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겁이 났냐고 묻는다면, 겁이 났다. 아무리 달콤한 쾌락으로 끝이 났다고 해도 시작은 항상 아팠으니 이 순간은 언제나 무섭고 떨렸다.
그때, 카를이 아우라의 오른 다리를 들어 올렸다.
“……?”
영문 모를 행동에 아우라의 눈빛이 떨렸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그녀의 그런 생각이 다 눈에 보인다는 듯 카를이 픽 웃었다.
“다리는 다 나았어?”
“아…… 응.”
아우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왜였을까. 그의 그런 별것도 아닌 관심, 사소한 걱정이 그녀의 마음을 좀 더 편하게 했다.
“이젠…… 이젠 정말 괜찮아.”
아우라는 몰랐다. 그렇게 말하는 자신이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을. 그 미소가 카를이 그녀를 믿고 싶게 만든다는 것도.
“다행이네.”
습관처럼 카를이 그녀의 발목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조심히 그녀의 다리를 다시 내렸다. 이윽고 그가 그녀의 아래를 천천히 파고들었다.
“으응…….”
이미 그의 손길이 오갔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방금 대화 때문이었을까. 그녀가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통증이 덜했다. 그리고 곧 카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읏…….”
몸 안에서 쾌락이 번져 나갔다. 그가 저 안쪽에서 부딪칠 때마다 머릿속에서 하얀 것이 터졌다. 그 하얀 것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을 때, 아우라는 더 크게 소리를 낼 것만 같았다.
습관적으로 신음을 삼키며 입술을 물었다. 그때 카를이 움직임을 멈추고 그녀에게 몸을 숙였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안 좋은 버릇이 있네.”
그는 아우라의 아랫입술을 그녀의 입안에서 빼냈다. 붉은 잇자국이 선명했다. 그는 그 아랫입술을 머금고는 혀로 상처를 쓸었다. 날카로운 통증에 아우라의 몸이 움찔했다. 카를이 그녀의 입술을 놔주었다.
“소리 내도 좋다고 해 봤자 그렇게 할 리는 없을 테고.”
“하아…….”
그는 제 손등을 아우라의 입가에 댔다. 생각지도 못한 배려에 아우라는 고개를 저었다. 카를이 말없이 엄지로 그녀의 입술을 쓸었다. 그리고 다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으……아앗! ……아!”
참으려 해 봐도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우라가 무의식적으로 제 입술을 씹으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카를의 손이 먼저 입안을 차지했다.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의 몸에 상처를 내고 싶지도, 이런 방식으로 기대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침대 위에서는 모든 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지극한 쾌락을 느끼고 마는 몸의 반응까지도.
아우라가 그의 손등을 물었다. 순간 카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
새벽녘. 아우라는 스르르 눈을 떴다. 눈앞에는 카를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문득 조쉬의 말이 떠올랐다.
‘아닙니다. 불면증이 얼마나 심하신데요. 데블라에서는 마물보다 폐하의 불면이 더 걱정스러웠을 정도입니다.
‘왜일까. 내가 대체 너의 무엇이길래.’
문득 그의 손등을 보았다. 자신이 낸 잇자국이 선명해서 무심코 손을 뻗었다가 거두었다.
아우라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를 믿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는 얼굴. 그런데도 끝내 욕망에 굴복하는 얼굴. 기꺼이 손등을 내어 주던 얼굴. 절정에 다다랐을 때, 숨을 쉬면서도 숨이 차다는 듯한 그 얼굴.
솔직히 말하면…… 싫지 않았다.
아우라는 혼란스러웠다. 싫지 않다니. 마치 카를에게 마음이 기울기라도 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그녀는 이내 자신을 다잡았다. 사람인 이상 몸을 섞으면 마음이 순간적으로 흔들릴 수도 있다. 쾌락뿐인 감정에 속지 않고 그를 이용해 핀을 얻어야 했다. 그것이 그녀가 그의 곁에 남은 유일한 이유니까.
아우라가 조심히 침대에서 벗어났다. 네글리제를 다시 입고 침실 샛문을 열어 집무실로 갔다. 그리고 그 반대편 샛문까지 재빨리 걸어갔다.
‘카를의 개인 서재…….’
문은 당연히 잠겨 있었다. 하지만 결국 집무실에서 사용하는 서재였다. 아우라는 카를의 책상 서랍을 뒤져 열쇠를 찾았다.
달칵.
잠겼던 문이 열렸다. 그녀는 침실 샛문을 다시금 확인하곤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서재라기보다 거대한 창고 같았다. 책과 자료, 온갖 물건이 사방에 쌓여 있었다. 아우라는 그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책이 가득 꽂힌 책장과 커다란 테이블을 지났을 때였다. 그녀의 걸음이 낡은 콘솔 앞에 멈추었다.
콘솔 위엔 잉크와 깃펜이 있었다. 상판은 곳곳에 잉크가 묻어 지저분했다.
서랍을 여니 아니나 다를까, 지도가 가득했다. 높은 확률로 군사 지도도 있을 것이다.
“…….”
드르륵.
그녀는 서랍을 다시 닫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저쪽에 유리문이 달린 벽장이 보였다. 새벽 달빛에 시야를 의지해야 해서 잘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뭔가가 반짝이고 있다는 건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타박, 타박…….
걸음이 빨라졌다. 아우라가 벽장에 거의 다 왔을 때였다.
“!”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손이 아우라를 뒤에서 감싸 안았다. 아우라는 헉하고 숨을 삼켰다.
숨소리, 온기, 팔의 감촉, 등에 닿는 가슴의 단단함.
얼굴을 보지 않아도,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온몸으로 느꼈으니.
“……카를?”
“뭘 그렇게 찾아?”
감정 없는 목소리. 아우라는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듯했다.
“……응? 아우라. 말해 봐.”
“…….”
“군사 지도?”
아우라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사실대로 그럴 마음까진 없었노라 밝힌다면? 결국 핀을 찾고 있었다고 말해야 했다.
몸을 휘감는 팔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그의 팔을 떼어 내려 해 봤지만 점점 더 옥죄어 올 뿐이었다.
아우라는 눈을 감고 숨을 뱉어 냈다. 끝이었다.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어떻게 알았어?”
“네가 진심으로 나와 자고 싶어 했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럴 리가 없는데.”
“…….”
“답은 하나지. 날 재우고 싶었던 거야.”
카를이 아우라의 목에 입을 맞췄다. 차가운 입술이었다. 이어서 느껴지는 이의 느낌에 아우라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팠다. 그가 물고 있는 목덜미도, 이제부터 그녀가 감당해야 할 현실도.
카를은 그녀의 목덜미를 놔주었다. 그는 화끈거리는 목에 다시금 입을 맞추더니 그녀에게 속삭였다.
“가자, 아우라.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
카를이 아우라를 데려온 곳은 그녀의 침실이었다.
달칵.
문이 닫혔다. 그는 꽉 잡고 있던 아우라의 손을 놓고는 벽에 기대어 섰다. 그는 어둠에 가려져 있었으나 아우라는 그 꿰뚫을 듯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무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우라. 너는 내 서재에 들어 온 일이 없는 거야.”
“……반역을 도왔다고 생각하면서. 못 본 척이라도 하려고?”
“맞아. 하지만 너도 그 대가는 치러야지.”
대가. 그 말에 아우라가 멈칫했다.
“앞으로 내 허락 없인 그 누구도 만날 수 없어. 황족이건, 귀족이건, 평민이건. 네 모든 움직임은 내게 보고될 테고, 내 기사들이 널 감시할 거야. 공식적으로.”
그건 죄수나 다름없는 생활이었다. 아우라가 울컥했다.
“네게 그럴 권리는 없어, 카를.”
“권리는 없어도 권력은 있어. 알잖아.”
카를이 더 할 말 없다는 듯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인형처럼 지내. 움직이지도, 내 눈에 띄지도 말고. 아, 내가 보고 싶어지면 찾아올게. 피차 심심하지 않게. 난 그런 것도 나쁘지 않거든.”
그는 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물었다.
“무서워?”
몇 시간 전에도 그는 똑같이 물었다. 낯선 쾌락을 버티기 어려워하는 그녀를 달래듯. 아우라는 그때 고개를 끄덕이던 자신이 떠올랐다.
카를은 그때도 자신을 믿지 않았을까. 모든 걸 눈치채 놓고도 그녀를 만지고, 입을 맞추고, 손등을 내어 주었을까.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아우라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무섭지 않아.”
카를이 문고리를 꽉 부여잡았다.
“그래, 아우라. 북쪽 탑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해.”
북쪽 탑이라는 말에 아우라의 눈이 커졌다. 카를이 한마디 덧붙였다.
“그 탑이야말로 네게 딱 어울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