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21화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아우라는 먼저 동쪽 숲을 떠나기로 했다.
헤어지기 직전, 아우라는 들고 있던 책 중 한 권을 이센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제니아의 소설을 좋아하신다는 말이 생각이 나서요. 그래서 가져와 봤습니다.”
이센이 활짝 웃으며 책을 받았다.
“이 귀한 것을요? 감사합니다. 피크닉을 나온 김에 읽고 가야겠어요.”
“지금 당장이요?”
“네. 아낄 것 없으니까요.”
아우라가 바구니를 다시 들었다.
“저는 그럼 먼저 가 보죠.”
“그러시죠. 아, 형수님.”
“네.”
“다시 뵙는 건 오늘 밤이 좋겠는데요. 자정에 이 숲의 입구에서.”
“그러죠. 그런데 황자.”
“네.”
“마음에 바뀌면 굳이 나오지 않는 걸로 해요. 황자나, 나나.”
“그럴 린 없습니다. 형수님이나, 저나.”
“……그럼.”
아우라는 유유히 숲을 나갔다.
이센은 다시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하아…… 날씨 좋다.”
이센은 책을 펼치려다가 멈칫했다. 일이 풀려 가는 게 마음이 놓여서일까. 수트라 성에 있는 어머니 생각이 났다.
“대공과 황궁으로 간다고?”
“네, 어머니. 대관식에 참석하려고요.”
“나도 동행해야 하는데…… 내가 몸이 이래서…….”
“아니에요, 어머니. 수도에 가면 괜찮은 의사가 있는지 살펴볼게요.”
이센의 어머니는 여행 중 얻은 병으로 몸이 많이 상해 있었다. 그나마 수트라 성에 있는 마법사가 그녀의 병을 다룰 수 있었다. 문제는 그 마법사가 라이언의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정말 대관식에만 다녀오는 거지?”
그녀는 걱정스럽다는 듯 아들의 손을 잡았다.
“네. 이번 대관식만 잘 마치고 돌아올게요. 그러면 라이언 삼촌께서 영지와 이 성의 마법사를 제게 준다고 했으니…….”
이센이 제 어머니의 손을 따뜻하게 감쌌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이센의 눈에 슬픔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난 잘하고 있어. 다 잘될 거야.”
***
늦은 밤, 카를은 집무실 소파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정오 무렵이던가. 본궁 앞에서 봤던 아우라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피크닉 바구니, 햇빛을 가리는 모자, 여유를 부리듯 들고 있는 책. 모든 것이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기어이, 네가 기어이.’
마음속으로는 수십 번 정도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 욕 나오게 예쁘게 차려입은 여자를 본궁으로 끌고 올라가 방에 가두고 싶었다. 혹은 품에 가두거나. 그때도 무심한 눈으로 자신을 볼 수 있을지 어디 한번 두고 보자는 마음으로.
하지만 카를은 순순히 아우라를 보냈다. 무슨 행동을 할지 종잡을 수가 없어서 궁금증마저 생길 지경이었으니.
그렇지 않은가. 이센에게 접근하란 말을 할 땐 주먹을 휘두르기까지 했는데.
‘나쁜 자식. 절대 싫어.’
그 진심 어린 원망에 카를은 얼마나 안심했던가.
카를은 그때 부여잡았던 아우라의 주먹을 떠올렸다.
‘누구 하나 제대로 쳐 본 적도 없는 것 같던 손.’
그때는 제대로 잡았다고 생각했다. 아우라가 더는 이센에게 접근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의 목적이 무엇이건 반역자 무리와는 떨어뜨려 놓고 싶었으니까.
카를이 가만히 제 주먹을 쥐었다.
지금 아우라는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붙잡았다고 생각할 때마다 웃으며 도망을 가는 아우라. 그 어떤 약속도 위협도 손쉽게 무화시키는 도망자.
“……어떻게 할까, 너를.”
무형의 감옥이 있었으면 싶었다. 혹은 고통 없이 달콤하기만 한 감옥이 있다면 고민 없이 가뒀을 텐데.
똑똑.
그때 난데없이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밤 근무를 하는 보좌관인가 싶어 그는 문 쪽을 쳐다보았다.
끼이이-
집무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복도의 불빛을 역광으로 받은 그 실루엣에 카를의 눈이 커졌다.
실루엣의 주인공은 아우라였다.
그녀는 얇고 긴 네글리제에 실내용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네글리제야 흔한 잠옷이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과 풀어 내린 머리카락도 딱 침대로 들어가기 직전의 차림이었다.
하지만 카를은 궁금했다.
성의 없이 슬리퍼를 툭툭 끄는 발걸음. 그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의 윤곽이 여실히 드러난다는 것을 그녀는 정말 모르는 걸까.
카를은 덤덤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이 밤에.”
“술 마시나 보네.”
아우라가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카를이 술잔을 가리켰다.
“보다시피.”
“흐음.”
아우라는 잔을 들어 달빛에 비춰 보았다. 한눈에 봐도 독한 술 같았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술잔을 비우곤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탁.
유리와 유리가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아우라가 입술을 엄지로 쓸며 카를에게 말했다.
“대공이 맞는 것 같아.”
“뭐?”
“이센의 배후 말이야.”
카를은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반역에 성공했을 경우 이센이 받기로 한 건 꽤 큰 영지와 통치권 정도. 그리고 어머니 이야기를 흘리듯 하던데…… 중요해 보였어. 그쪽을 더 알아보면 이센이 원하는 게 뭔지 더 확실히 알 수 있겠지.”
아우라가 팔걸이에서 천천히 일어나 카를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를 향해 고개를 갸웃했다.
“왜 말이 없어? 네가 바라던 정보를 알아내서 줬잖아.”
상앗빛 금발이 사르르 쏟아졌다. 아우라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날 못 믿겠어?”
창백한 달빛이 번진 그녀의 얼굴은 흠 하나 없는 석고상 같았다
카를이 아우라의 목을 엄지로 쓸었다. 술 때문이었을까. 의외로 살결은 뜨거웠다.
카를이 입을 열었다.
“날 그렇게나 싫어하면서.”
“…….”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 너를 어떻게 믿어.”
아우라의 목울대가 천천히 오르내렸다. 카를의 손길이 서서히 올라오더니 뺨을 감쌌다. 그녀를 못 믿겠다고 말한 말과는 또 다르게.
아우라는 그의 손에 얼굴을 기댔다.
“그럼 이건 어때? 이센은 네 군사 지도를 원하고 있어.”
군사 지도.
그럴듯했다. 군사 지도가 있으면 쉽게 황실을 칠 수 있으니.
“자,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끝났어. 이제 이센과 잘 협상해 보던가.”
“…….”
“이센이 지금이라도 반역을 할 마음을 접으면, 그를 용서할 거야?”
“가능하다면.”
“그 마음은 대체 뭘까. 가족애?”
아우라가 비웃듯 물었다.
“황족을 더 죽였다간 민심이 남아나질 않을 테니까. 이센이어서가 아니라.”
“어련하시겠어.”
아우라가 술을 잔에 따랐다. 그리고 술잔을 잡으려는 걸 카를이 저지했다.
“그만 마셔. 독해.”
아우라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았다. 그리고 카를의 양 뺨을 잡아 제 눈앞으로 끌어당겼다.
“네가 재미없게 굴고 있잖아, 카를. 기껏 부탁을 들어줬더니 칭찬 한마디 해 주지 않고.”
“글쎄. 내 눈에 네가 너무 이상해서.”
“내가?”
“마치 날 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굴잖아.”
아우라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푸흐흐, 하고 흐트러지듯 웃는 숨결이 입술에 닿았다.
“뭐, 나도 네가 조금은 좋아졌나 보지.”
그리고 그녀는 가만히 눈을 맞췄다. 마치 이렇게 묻기라도 하듯.
자,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카를은 제 안에서 뭔가가 뚝 끊어지는 걸 느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침실로 들어섰다.
쾅.
문을 닫은 카를이 대뜸 그녀의 가운을 벗겼다. 그리고 그녀를 옷장 옆 전신 거울 앞에 세웠다.
“네가 널 보면서 대답해 봐, 아우라.”
그가 뒤에서 아우라의 허리를 한 손으로 감아 안았다. 비교가 안 되는 체구, 허리를 덮은 큰 손, 거울을 통해 자신을 노려보는 눈빛. 그런 것들이 스멀스멀 그녀를 압박하는 듯했다.
“솔직하게 말해. 이센과 무슨 말을 나눴지?”
“나는 이센에게 정보를 얻었고, 그 대가로 소설책을 줬어.”
“소설?”
“아주 재미있는 소설이지. 이센도 마음에 들어 할 거야.”
카를이 그녀의 허리를 더 꽉 잡았다. 몸의 윤곽이 더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것을 거울로 바라보는 두 쌍의 시선이 서늘하게 빛났다.
“사람을 헤집어 놓는 것도 정도가 있어, 아우라.”
아우라는 거울 속의 카를과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카를의 눈에는 많은 게 담겨 있었다. 의심과 혼돈, 경계심과 불쾌감 그리고…… 그런 것들과 뒤섞인 욕망.
“아우라, 대답해 봐.”
카를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관자놀이에 그의 숨결이 닿았다.
“내가 널 믿어도 되겠어?”
“카를.”
아우라가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그의 옷깃을 잡아 끌어 내렸다.
“어차피 넌 나를 못 믿어. 하지만…….”
카를은 그녀가 끌어 내리는 대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내 말이 다 거짓이고, 나 때문에 일이 다 꼬인다고 해도…….”
입술이 닿기 직전이었다. 아우라가 속삭이듯 물었다.
“여기서 그만둘 수 있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카를은 생각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녀의 허리를 감았을 때? 가운을 벗겼을 때? 아니면 침실로 끌고 왔을 때?
아니. 그녀가 집무실 문을 열고 그 그림자를 보였을 때. 그때부터 자신은 이미 그녀에게 졌다. 그리고 그 패배를 인정하는 게 언제나 그랬듯 싫지만은 않았다.
“그래. 그렇겐 못 하지.”
카를이 아우라에게 입을 맞췄다. 입술이 저항 없이 벌어졌다. 말캉한 혀가 카를의 혀와 얽혔다.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럽게,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긴 팔이 카를의 목을 휘감았다. 카를이 입을 맞춘 채로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침대에 걸터앉더니 자신의 무릎 위에 아우라를 앉혔다.
달뜬 숨이 오갔다. 아우라는 카를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살짝 뜬 눈으로 그를 보았다. 가까이서 보면 참 예쁜 눈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하지 않았는가. 아름다운 어둠 같았다고.
카를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얼얼한 느낌에 아우라가 고개를 저었고, 그러자 카를이 더 따라붙었다.
“응…….”
신음을 뱉으며 겨우 거리를 벌렸을 때 카를의 눈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우라는 충동적으로 그 눈가에 입을 맞췄다. 카를이 멈칫했다.
“그냥…… 눈이 예뻐서.”
“……하.”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나 그 실소가 끝났을 때 여유도 잃은 듯했다.
네글리제 밑단 아래로 그의 손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