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9화
“히끅…… 히끅…….”
리엘은 침대에 웅크려 딸꾹질을 했다. 미나가 조심스레 메이플 시럽을 섞은 우유를 아우라에게 주었다. 아우라가 리엘에게 우유를 먹이자 호흡이 점점 가라앉았다. 금방 또 눈물이 차오르긴 했지만.
“흑…… 당신 말을 들을 걸 그랬어. 유모를 찾는 게 아니었는데…….”
‘유모’라는 말을 내뱉자마자 눈물을 주룩 흘렸다. 짧은 시간이나마 타샤에게 정을 준 듯했다.
‘그만큼 외로웠던 거겠지. 별궁 생활이.’
“……죽고 싶어.”
리엘이 중얼거렸다. 아우라는 일곱 살짜리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저 나이 때의 자신은 사랑만 받고 크지 않았나.
아우라는 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리엘.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야.”
“하지만…… 너무 슬프고, 마음이 아파.”
리엘이 다시 히끅댔다. 아우라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그래도 너 자신을 지켜야지.”
“어떻게 지킬 수 있는데?”
“아까 같은 상황에서 상처를 받더라도 다시 살아갈 힘을 내는 거야. 죽고 싶다는 생각 대신.”
“그러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음…… 그럴 수 있게 만드는 마음을 긍지라고 해.”
“긍지?”
“응. 절대 추락할 수 없는 마음 같은 거지.”
그게 바로 아우라가 일곱 살 무렵에 배운 왕녀의 마음가짐이었다. 리엘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지만.
“오늘 있던 일이 아무렇지 않게 느껴지는 순간에 저절로 생길 거야.”
“그런가……. 그랬으면 좋겠다.”
저절로 생긴다는 말이 리엘에게 위로가 된 듯했다. 리엘은 스스로 우유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잘래. 여기서 자도 되지?”
“그럼. 재워 줄게.”
아우라가 이불을 툭툭 두드렸다. 리엘이 이불 속에 폭 들어가더니 등을 보이고 누웠다.
창밖엔 이제 완연한 어둠이 깔려 있었다.
‘정말 긴 하루였어.’
아우라가 피곤한 한숨을 내쉬는 순간 리엘이 말을 걸어왔다.
“당신도 내게 원하는 게 있지?”
“아니. 없어.”
“거짓말. 빨리 말해. 마음 바뀌기 전에.”
이 작은 아이를 헤집어 정보를 얻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결국 입을 열게 되었다.
“그럼 리엘. 한 가지만 물을게. 돌아가신 네 아버지와 친하게 지냈던 마법사를 알고 있니?”
“마법사?”
리엘은 한참 동안 기억을 되짚어 보는 듯했다.
“그런 이야기는 들은 적 없어. 사실 아버지 얼굴을 본 적도 몇 번 없어서…….”
“그래, 알았어. 고마워, 리엘.”
“그런데…… 편지가 온 적은 있어. 별궁에.”
“편지라고?”
“응. 아버지 앞으로 꽤 자주 왔어. 시종이 항상 그 편지를 모아서 황궁으로 보냈어. 시종에게 물으니 마법사가 보낸 거라고 했어.”
분명 수상했다. 별궁으로 편지를 받는다는 건 다른 황족에게 숨긴다는 뜻이니.
“혹시…… 편지를 누가 보냈는지 본 적 있어?”
“응. 한 번은 내가 너무 궁금해서 편지를 열어 보려고 했거든. 시종이 막아서 못 했지만…… 그때 봤어.”
“누구였니?”
“……율리우스. 율리우스라고 적혀 있었어.”
‘마법사 율리우스…….’
처음 듣는 이름이거니와 제니아인들이 쓰는 이름도 아니었다.
“얘기해 줘서 고마워, 리엘.”
아우라는 리엘의 관자놀이에 살짝 입을 맞췄다. 리엘의 눈가가 촉촉했다. 리엘은 많이 피곤했던 모양인지 바로 잠이 들었다.
‘미나의 동생에게 율리우스에 대해서도 알아보라고 해야겠군.’
똑똑.
그때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문이 열렸다. 카를이었다.
‘카를이 이 시간에 웬일이지?’
“아우라.”
“쉿.”
아우라가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곤 응접실로 이어지는 샛문을 가리켰다. 카를은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방을 나갔다.
***
잠시 후, 아우라는 응접실로 들어왔다. 서늘하고 어두운 응접실엔 촛불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던 카를이 아우라를 보았다. 아우라는 소파로 걸어가 등받이에 기대어 섰다.
“그래, 갑자기 무슨 일이야?”
“리엘은 어때?”
“겨우 달래서 재웠어. 당분간은 여기에 둬야 할 것 같아.”
카를은 불빛이 일렁이는 아우라의 얼굴만 빤히 봤다. 아우라는 왠지 좀 민망해져서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일단은 그래. 오늘 더 할 수 있는 건 없어.”
카를이 한 걸음 다가왔다. 그는 아우라의 턱을 쥐곤 살짝 들어 올렸다. 입이라도 맞추려는 줄 알고 아우라는 굳어 버렸다.
그런데 그는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살피기만 했다. 그녀가 숨겨 둔 뭔가를 찾아내려는 듯이.
“……뭐 해?”
“괜찮은 것 같긴 한데.”
“뭐가?”
“아까 집무실에서 어디서부터 들었어?”
‘리엘의 울음소리를 듣고 들어갔을 때를 말하는 건가.’
“리엘이 가축 어쩌고 할 때부터.”
“그렇군.”
대체 뭐가 걸렸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마음을 놓은 듯했다. 하지만 아우라의 얼굴을 놓아주진 않았다.
아우라가 물었다.
“그래서, 타샤는 어떻게 됐어?”
“아, 타샤.”
카를이 덤덤하게 말했다.
“타샤는 죽었어.”
아우라의 눈이 커졌다. 그새 타샤가 죽었다고? 황제를 키운 유모가 하루 만에?
“반역죄로 즉결 처형됐어. 리엘을 이용해서 내 권위에 도전하려 했으니 반역이지.”
“아…….”
“네 마음에 들자고 한 짓은 아니긴 한데. 어때? 바라던 바였잖아.”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나 싶었다. 하지만 이내 아우라는 대관식 날 밤을 떠올렸다.
“의심해, 카를. 계속 그렇게 의심해.”
“…….”
“난 네가 의심 끝에 네 동생을 잃었으면 좋겠어.”
카를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아우라는 멈추지 않았다.
“내가 내 부모와 오빠들을 잃은 것처럼 너도 그 몇 안 되는 네 사람을 잃었으면 좋겠어. 이센이건, 타샤건.”
그녀는 그의 양팔을 잡고 까치발을 들었다. 그의 귓가로 다가가자 삼나무 향유 냄새가 났다.
“네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계산이라는 걸 해 보니까, 그게 공평한 것 같아.”
아우라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때는 진심으로 카를이 외톨이로 남았으면 했다. 그를 미워하는 마음이야 지금도 여전하고. 하지만…… 누군가가 이렇게 쉽게 죽길 바란 건 아니었다.
“응? 대답해 봐, 아우라.”
카를이 재촉했다. 그녀를 탓하기보다는 정말로 궁금한 듯했다. 그 짙은 눈이 오늘따라 힘이 없었다.
아우라는 하마터면 되물을 뻔했다. 그러는 너는 정말 괜찮아? 아무리 그래도 네 어머니나 마찬가지였잖아.
“응. 아주 마음에 들어.”
“……다행이네.”
카를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우라는 고개를 틀어 그의 손에서 벗어났다.
“일단은 알았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
그녀가 돌아서려는 순간, 카를이 손을 붙잡았다.
“할 말이 남았어.”
“또 뭔데?”
“이센에 대해서 말이야.”
아우라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대관식 이후 이센과 그 어떤 접촉도 안 한 상태인데, 대체 왜?
불길했다.
‘혹시 이센이 핀에 대해 내게 말했다는 걸 알게 된 건가?’
그러나 카를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센에게 접근해.”
“……그게 무슨 소리야?”
“생각을 해 봤는데, 내가 아무리 말려 봤자 결국 넌 이센을 만날 것 같아서.”
아우라는 굳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카를은 그녀를 자신 쪽으로 당겼다.
“이센 그 녀석도 네가 연락해 주길 애타게 기다리고 있더군. 그쪽은 아무래도 너를 포섭하는 게 관건인가 봐.”
그는 그간 이센을 감시했다는 걸 아무렇지 않게 드러냈다. 아우라는 긴장을 숨기며 물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야? 이센의 배후?”
“배후야 심증이 가. 라이언이나 테인 중 하나일 거야. 혹은 둘 다거나.”
라이언 대공과 테인 공작. 둘 다 황태자의 패거리에다 권력도 상당했다. 카를이 조사했으니 아마도 정확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말은 아우라에게 큰 힌트가 됐다.
‘좋아. 그럼 둘 중 적어도 한 사람은 핀에 대해 안다는 거군.’
이제 남은 건 카를의 의도였다.
“이미 다 알면서 나더러 뭘 더 알아 오라는 건데?”
“이센이 배후에게 받기로 한 대가.”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우라는 그의 말에 숨은 의도를 알아차렸다.
대가를 알면 카를은 이센과 협상을 할 수 있다. 이센이 반역에서 손을 뗄 수 있도록.
“너, 설마 날 이용해서 이센을 살리려 하는 거야?”
“맞아. 난 이센을 살려야겠어. 그리고 넌 그 일을 해 줄 적임자 같고.”
아우라는 카를이라는 인간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내게 이런 부탁을 할 수 있어?”
“못 할 부탁이라고 생각하나?”
“네 가족이 내 가족을 모두 죽였어! 그것도 모자라서…… 이젠 날 이용해서 네 가족을 살려야겠다고?”
입 밖으로 말을 꺼내니 더 못 할 짓처럼 느껴졌다. 아우라는 분을 못 이겨 주먹으로 카를의 가슴을 치려 했다.
“나쁜 자식! 절대 싫어!”
카를이 아우라의 주먹을 가볍게 잡고는 그녀를 훅 끌어당겼다. 그의 눈이 어둠 속에서 차갑게 빛났다. 그녀의 귓가에 그의 음성이 낮게 깔렸다.
“그래. 그러니 더는 이센과 접촉하지 마, 아우라.”
“!”
“이제부터 네가 이센과 접촉한다면 이유는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하겠어.”
“…….”
“나를 돕거나, 이센의 반역을 돕거나.”
그 말인즉슨, 이센을 만나 놓고도 자신을 돕지 않는다면 반역으로 여기겠다는 뜻이었다.
아우라는 한마디 말도 없이 충혈된 눈으로 카를을 쏘아보았다. 카를은 그런 아우라의 뺨을 감싸더니 입을 살짝 맞췄다. 아우라의 입술은 뜨거웠지만 마치 밀랍 인형처럼 굳어 있었다.
“잘 자.”
카를은 그런 그녀를 두고 응접실을 나가 버렸다.
혼자 남은 아우라는 눈만 깜빡였다. 그녀의 뺨으로 눈물이 한 줄기 흘렀다.
애써 잊고 있던 가족과의 기억. 카를이 그 기억을 이런 식으로 헤집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것은 너무나 무자비했고, 또 잔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