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8화
아우라가 방으로 돌아왔을 때 리엘은 소파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얼마나 격하게 놀았는지 시녀들이 진땀을 훔치고 있었다.
“거, 건강하신 황녀님이세요.”
미나조차도 그렇게 말할 정도였다.
아우라는 잠든 리엘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아우라는 제니아 왕가의 막내였기에 어린애를 돌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잠든 아이의 얼굴이 주는 편안함이 신기했다.
새 유모가 배정되기 전에 누군가 리엘을 돌봐야 했다. 아우라는 그게 자신이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두어 시간 후.
“으응…….”
리엘이 뒤척이는 기색을 보였다. 곁에서 책을 보던 아우라가 말했다.
“잘 잤어?”
“응……. 배고파.”
“그래? 그럼 같이 식사하러 식당으로 가자.”
“저녁은 유모랑 먹을래.”
‘의외네. 타샤를 지루해하는 줄 알았는데.’
어쨌거나 타샤에게 더는 리엘을 맡길 수 없었다. 만약 카를이 타샤를 용서한다고 해도 아우라가 눈감아 주지 않을 작정이니.
“오늘은 유모가 바빠서 볼 수 없어. 그러니 나와 맛있는 걸 먹자. 어때?”
“……그럼 내일은?”
리엘이 불안한 듯 물었다.
“유모는…… 다른 일에 배정이 되었어. 곧 새로운 유모가 생길 거야. 그러니-”
“싫어. 난 유모와 있을 거야.”
리엘은 방문을 향해 달려갔다. 시녀들이 당황해서 리엘을 막았다.
“전하, 혼자 나가시면 안 됩니다.”
“비켜!”
리엘이 시녀들을 밀어 버리고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리엘.”
아우라가 소파에서 일어나 리엘에게 다가갔다.
“방에서 나가는 건 자유지만 그래도 유모는 만날 수 없어. 아랫사람들을 귀찮게 할 뿐이지.”
아우라가 리엘의 곁에 앉아 상냥하게 웃었다.
“리엘은 황녀니까 조금 참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 동그란 눈에 눈물이 차오르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나도 다 알아! 당신이 아까 유모와 싸워서, 그래서 쫓아낸 거지?!”
아우라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비슷하긴 하네.’
“당신이 나한테 잘해 주는 것도 날 이용하려고 그러는 거지?! 안 그러면 나에게 잘해 줄 리가 없잖아!”
그것도 맞았다. 어쨌건 핀에 대해 아는 게 있는지 확인하려 접근했으니.
“이것 봐! 대답 못 하잖아!”
리엘이 주먹을 들어 아우라를 때리려 했다.
“황녀님!”
“황녀님! 안 됩니다!”
시녀들이 얼른 리엘을 붙잡았다. 리엘이 씩씩대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아버지가 죽고 다들 내가 죽었어야 했다고 말해! 난 아버지 얼굴도 몇 번 본 적 없는데! 난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앞으로 죽는 것만 못 하게 살 거라고 했어! 흑…….”
“…….”
“내가 외톨이가 됐을 때 먼저 다가와 준 건 유모뿐이야! 난 유모와 살 거야!”
불쌍했다. 어린 나이에 겪은 수모도, 그 와중에 다가온 유일한 사람이 타샤라는 것도. 아우라가 지금 이 아이에게 해 줄 말이 이것뿐이라는 것도.
“리엘. 분노해 봤자 바뀌는 건 없어. 차라리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해.”
“……뭐?”
“카를 삼촌이 널 살렸잖아.”
“삼촌은 아버지를 죽였어! 나도 다 알아!”
“그래도 널 살렸잖아. 네게는 그 무엇보다 그게 중요해.”
아우라가 리엘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리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언젠가 리엘도 알게 될 거였다. 황태자가 얼마나 끔찍한 인간이었는지. 카를이 리엘을 살려 둔 건 이 아이가 품을 원망까지 감당하겠다는 뜻이라는 것도.
‘물론, 지금은 이 현실이 좀 아프겠지만.’
아니나 다를까. 리엘이 와앙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당신도 삼촌이랑 똑같아!”
리엘은 기어이 문을 열고 달려 나갔다. 아우라는 그 문틈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나 방금 굉장히 카를처럼 말했던 것 같은데. 불쾌하게.’
“가서 리엘을 붙잡아 와. 어서.”
“예, 폐하.”
시녀들이 달려 나갔다. 아우라도 가만히 있을 순 없어서 복도로 나섰다.
얼마나 궁을 뒤졌을까. 리엘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조그만 게 발은 빨라서는.’
아우라는 무심코 카를의 집무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집무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혹시 여기로 들어갔나?’
아우라는 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때,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해가 져 갈 무렵, 부름을 받은 타샤가 카를의 집무실에 나타났다.
오후의 눈물 바람이 무색하게 그녀는 허리를 곧게 펴고 있었다. 건강한 모습을 보여 리엘의 유모 자리로 다시 들어갈 작정이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소파에 비뚜름하게 앉아 있던 카를이 테이블에 뭔가를 툭 던졌다. 그것을 알아본 타샤의 눈빛이 흔들렸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어음. 그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순혈주의자들에게 자금을 댔다는 증거였다.
카를이 덤덤하게 말했다.
“어음은 공문서라 딱히 유모가 설명할 건 없는 것 같군.”
타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다만, 난 한 가지만 확인하려고 해.”
“…….”
“황후 대관식 시위, 당신 짓이야?”
타샤는 올 것이 왔단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폐하께서 먼저 제니아인에게 황후의 자리를 주시지 않았습니까.”
툭.
카를이 손끝으로 테이블을 툭 쳤다.
“맞는단 뜻이군. 테오.”
“예, 폐하.”
곁을 지키던 테오가 나섰다.
“황가를 모독한 자다. 재판에 넘겨.”
“예, 폐하.”
“여기까지 하지.”
카를이 유감없다는 듯 소파에서 일어났다. 타샤는 믿을 수 없었다. 말단 시녀라도 이 이상의 관심은 받을 것이다.
“제가 폐하를 어떻게 키웠는데요!”
타샤가 악을 쓰듯 외쳤다. 카를이 그녀를 쓱 쳐다보았다.
“그 제니아인이, 제니아인 주제에! 천한 제가 폐하를 키웠다며…… 그래서 불쌍하다고! 마치 폐하를 천출인 양 욕했단 말입니다!”
“천출 맞잖아.”
타샤가 제 귀를 의심하듯 되물었다.
“……뭐, 뭐라고요?”
“천한 걸 천하다고 하는데 그게 뭐? 내가 트루 블러드는 아니잖아.”
“그, 그건……!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고귀한 카사 황실의 핏줄을 이어받으신……!”
“고귀한 건 아우라지.”
“……예?”
“아우라 같은 사람을 고귀하다고 해. 내가 아니라.”
침묵이 흘렀다. 항상 침착한 테오조차도 카를의 말에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타샤는 애써 진정하듯 침을 꿀꺽 삼켰다.
“폐하, 제가 순혈주의자들을 후원해 온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도 지금 그 여자에게 현혹당하고 계십니다. 그 여자는 고귀하기는커녕 제정신이 아닙니다. 절 죽이려 했던 걸 벌써 잊으셨습니까? 방도 그 여자가 뒤졌지요? 역시 더러운 제니아인의 본성이-!”
“타샤 웬더.”
카를이 낮게 말했다. 타샤가 움찔 놀라 입을 다물었다.
“지금 누굴 가르치려 드는 거지?”
“그런 게 아니라-”
“당신은 내가 어렸을 때도 그랬지. 은연중에 카사인의 우월함을 주입하려고 애를 쓰더군.”
“…….”
“뭐, 어머니도 없는 허울뿐인 황자를 돌보는 신세가 가련해서 듣는 척이야 했지만. 지금까지 그러면 쓰나.”
타샤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들처럼 키운 카를이었다. 그런 카를이 이렇게 아득히 먼 사람처럼 느껴질 줄이야.
“아, 그래. 생각해 보니 이상하긴 했어. 데블라에서 돌아왔는데 당신이 아직도 살아 있더군.”
“네, 네?”
“황태자는 날 그렇게도 싫어했잖아. 그런 내가 데블라로 갔으니 당신을 죽여야 정상 아니야?”
카를이 천천히 책상을 돌아 타샤에게 다가왔다.
“순혈주의자인 황태자와 한통속이었나?”
타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떨어졌다. 카를이 물었다.
“그래서 리엘에게 집착하는 건가? 리엘이 카사 황실의 핏줄인 데다가 트루 블러드라서?”
“리엘 황녀님만이 카사의 희망입니다!”
타샤가 대뜸 고함을 질렀다. 얼굴까지 새빨개진 그녀는 반쯤 이성을 잃은 듯했다.
“그 여자가 낳을 아이가 아니라! 리엘 황녀님과 카사인 사이에서 나온 분께서 다음 황제가 될 것입니다!”
카를이 타샤의 팔을 잡아챘다.
“타샤.”
“하아…… 하아…….”
“한 번만 더 그따위 소리를 지껄이면 재판까지 가지도 못하고 그 비루한 인생을 끝낼 줄 알아.”
타샤의 턱이 덜덜 떨렸다.
“네 말대로라면 리엘은 목숨을 걸고 내게 도전해야 해. 그러다가 죽을지도 모르지. 정말 그걸 바라?”
“……그거야말로 리엘 전하의 영광이지요.”
타샤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대답했다. 그때였다.
“……그런 거였어?”
그들은 그제야 문가에 선 리엘을 보았다. 카를이 얼른 타샤를 놓았다.
“황녀를 데려가라. 어서.”
시종이 리엘에게 다가갔지만 이미 늦었다. 리엘은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다들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리엘은 숨이 넘어갈 듯 울기 시작했다.
“그, 그래서, 끅, 끅, 지금까지 날 돌봤던 거였어?! 끄윽, 그, 그저 살려 두고…… 언젠가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리엘.”
보다 못한 카를이 다가가려 했다. 리엘은 주먹을 꽉 쥐고 비명처럼 외쳤다.
“난 가축이 아니야!!!”
“리엘!”
열린 문틈으로 아우라가 들어왔다. 아우라는 얼른 리엘을 안아 들어 올렸다. 리엘은 아우라의 목을 끌어안고 오열했다.
“흐아아앙! 난 가축이, 난……!”
“괜찮아, 괜찮아. 리엘.”
아우라는 리엘의 등을 쓸어 주었다. 그녀의 눈에 가늘게 눈물이 어렸다. 그리고 그 눈으로 타샤를 노려보다가 집무실을 떠났다.
집무실엔 충격과 침묵이 동시에 흘렀다. 그 가운데 선 카를이 서늘한 얼굴로 테오를 보았다.
“테오.”
“예.”
“타샤 웬더를 오늘 밤 즉결 재판에 넘겨. 죄목은 황족 모독죄와…… 반역죄로 한다.”
“예, 폐하.”
“바, 반역이라니요? 세상에! 화, 황제 폐하! 폐하!”
사색이 된 타샤가 다급히 외쳤다.
반역은 평민이건 귀족이건 황족이건 사형이었다. 타샤는 이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했다.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황궁을 나가 조용히 살 테니, 제발, 폐하, 황제 폐하!”
테오와 시종들이 타샤를 집무실 밖으로 끌고 갔다. 타샤는 애타게 카를을 불렀다. 그러나 카를은 창가를 향해 돌아설 뿐이었다.
카를은 주먹을 꽉 쥐었다. 조용해진 집무실 안에서 타샤의 목소리가 웅웅 울리는 듯했다.
‘그 여자는 고귀하기는커녕 제정신이 아닙니다.’
‘역시 더러운 제니아인의 본성이-!’
‘그 여자가 낳을 아이가 아니라!’
아우라는 쉽게, 너무나도 쉽게 빌어먹을 놈들의 타깃이 되고 있었다. 그녀가 강한지 아닌지와는 상관없이.
그러니 조금 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았다. 특히 반역이니 뭐니 하는 문제에서는 더욱.
설사 그녀가 그를 여기서 더 싫어하게 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