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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7)화 (17/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7화

조쉬가 문을 열었다. 아우라는 집무실로 들어서며 빠르게 그 안을 살폈다.

널따란 집무실은 거대한 서류의 숲 같았다. 황태자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일까지 모두 카를의 몫이 되었으리라.

그리고 양쪽으로 난 샛문.

‘하나는 침실일 테고, 하나는 카를의 개인 서재인가.’

침실, 집무실, 개인 서재. 어디에 핀을 뒀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다만 집무실을 대강 훑어봤을 때 수정구로 보이는 건 없었다.

한편 집무실은 울음바다였다. 타샤는 바닥에 엎드려 통곡하고 있었다.

‘고작 1시간 갇혀 있어 놓고. 누가 보면 고문이라도 당한 줄 알겠네.’

아우라는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는 카를에게 물었다.

“왜 불렀어?”

“아우라,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겠어?”

카를이 서류에 서명을 하며 말했다. 좁혀진 미간에 상당한 귀찮음이 배어 있었다.

누가 봐도 남편을 키워 준 시녀를 괴롭힌 꼴이었다. 보통의 부인이라면 억울함을 토로하거나 질세라 눈물을 쏟았을 테다.

하지만 아우라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내 설명이 필요해? 보아하니 타샤가 다 말했을 것 같은데.”

“할 말이 없다?”

“내겐 타샤를 가둘 권력이 있고, 그래서 가뒀어. 그게 다야.”

카를이 그제야 시선을 들어 아우라를 보았다. 타샤 역시 얼이 나가 울음을 멈추고 아우라를 보았다. 그러나 이윽고.

“흑…….”

하고 다시 울기 시작했다.

“하아…….”

카를이 피곤하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아우라가 속으로 비웃었다.

‘안 됐군. 여자들 싸움에 끼어서는.’

“아우라, 정말로 할 말이 그게 다야? 권력이 있으니 패악질을 부렸다?”

“흐윽…… 폐하…….”

타샤가 애절하게 카를을 불렀다. 어서 아우라에게 벌을 내려 달라고 조르는 듯했다.

“좋아. 변명할 마음도 없다면 별수 없지. 아랫사람들에게 함부로 하지 마. 내가 네게 함부로 해도 된단 소리와 똑같으니까.”

“난 네 아랫사람이 아니야, 카를.”

“네가 말한 권력의 구조가 그래.”

아우라는 카를의 책상을 짚고 몸을 숙였다.

“그래서, 감옥에라도 들어갈까?”

카를의 서류에 아우라의 그림자가 졌다. 그는 그녀를 피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분간 근신해. 유모도 당분간 리엘을 돌보는 일을 쉬고.”

“아…… 아닙니다, 폐하. 리엘 황녀님을 혼자 둘 수야 없지요.”

“아, 리엘을 돌보는 일.”

아우라가 말했다.

“아까 보니 혈기 왕성한 꼬마를 감당하기엔 힘에 부치는 것 같던데.”

“그렇지 않습니다, 황후 폐하.”

타샤가 눈물을 뚝 그치고 일어났다. 어지간히도 리엘을 놓치기 싫어하는 태도였다.

카를은 더 말하기 싫다는 듯 쐐기를 박았다.

“황후는 근신, 유모는 휴식. 세 번은 말하게 하지 마.”

타샤는 뭔가를 더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닫곤 허리를 숙였다.

“소란을 일으켜 죄송합니다, 폐하.”

타샤가 집무실을 나가자 카를이 한숨을 내쉬었다. 격무에 시달린 모양인지 얼굴에 피곤함이 가득했다. 평소에 잠을 잘 자지 못한다는 조쉬의 말도 사실인 듯했다.

“너도 가, 아우라. 난 좀 쉬어야겠어.”

카를은 오른쪽으로 걸어가더니 샛문을 열었다.

아우라가 얼른 그를 따라갔다. 눈앞에 단정하게 정리된 커다란 침실이 펼쳐졌다.

‘이쪽이 침실이구나. 서재는 반대쪽이었어.’

막상 남의 침실에 들어오자 기분이 이상하긴 했다. 마치 와서는 안 될 곳에 발을 들인 느낌이었다.

카를이 목을 죄던 타이를 빼며 말했다.

“왜 따라와? 변명이라도 하고 싶어졌어?”

“변명하러 온 게 아니야.”

아우라는 누가 들을세라 샛문을 닫았다. 카를이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더니 셔츠 소매의 커프스를 느릿하게 풀었다.

“그러면?”

아우라가 대답 대신 소매에서 몇 장의 종이를 꺼내 내밀었다.

“타샤의 방에서 찾은 거야.”

“방까지 뒤지셨다? 기가 막히는군.”

카를이 무심코 종이를 받아 펼쳐 보았다. 곧 그의 얼굴이 서서히 굳었다. 그건 몇 년간 누군가에게 꾸준히 돈을 보낸 어음 증서였다. 아우라가 말했다.

“그 이름들, 오늘 아침 신문에서 봤어. 순혈주의자 단체의 수뇌부들이잖아.”

카를이 어음을 테이블에 툭 던져 놓았다.

“해결하지. 시위대가 어떻게 예배당까지 침입했나 했더니……. 대충 예상은 했지만 역시 그 여자 짓이었군.”

그 여자. 카를은 타샤를 그렇게 불렀다. 정말이지 감정이라곤 없는 사람처럼.

그래서 아우라는 더 혼란스러웠다. 국민의 신임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이 상황에서 카를이 정말 그 수뇌부들을 죽였을까.

“그 사람들…… 실종되었다던데.”

“나도 봤어. 신문에서.”

“네가 그랬어?”

카를이 거울 앞에서 셔츠의 목 단추를 풀었다.

“죽이진 않았어. 다신 수도로 못 돌아오게 했을 뿐이지.”

그러니까 굳이 왜. 아우라는 그렇게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황실 모독죄를 생각하면 사실 사형을 내려도 말이 됐으니까.

카를은 셔츠의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었다. 두꺼운 팔뚝이 가감 없이 드러났다. 아우라는 이런 식으로 그의 몸을 볼 때마다 그가 전사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지금은 저 흰 셔츠로 몸을 가리고 서류를 들여다본다고 해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검을 빼 들고 거침없이 누군가를 벨 것 같았다.

“리엘이 네 방에 있다지? 별궁으로 보내.”

“유모는 새로 지정할 거지?”

“아니. 안 그래도 지방의 기숙 학교로 보내려 했어. 타샤에게 맡긴 건 임시방편이었고.”

“뭐? 그러지 마.”

“리엘에게도 그편이 나아. 잊었어? 난 그 애의 아버지를 죽였어.”

“그렇다고 해도.”

아우라가 카를의 손목을 잡았다.

“지금은 아니야. 조금 더 자란 후에.”

카를은 자신을 붙잡은 아우라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보내지 않아야 할 이유라도 있어?”

“리엘은 똑똑한 애야. 지금 황궁 밖으로 보내면 쫓겨났다고 생각할 거야. 그 애에게 제대로 된 황녀 교육을 해 주고 자신이 원할 때 떠나게 해 줘야 해. 설사 정략결혼을 하더라도.”

“…….”

“이곳에서 받은 교육이 그 애의 남은 삶을 지켜 줄 거야.”

카를은 고개를 들어 아우라를 보았다.

“그거, 부탁이야?”

부탁이라고 하면 들어주기라도 하겠다는 건지, 부탁이니 너도 뭔가를 내어 줘야 한다는 건지 아우라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도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이건 어때? 집무실을 보니까 일이 상당히 많은 것 같던데. 도와줄게.”

“카사 황실을 위해서 일을 하겠다?”

“황후잖아. 설마하니 아무것도 안 시킬 작정이었어?”

카를은 말이 없었다. 정말 앉혀만 놓으려는 생각이었던 걸까. 아우라는 황당할 지경이었다.

그녀가 한마디 더 덧붙였다.

“내가 너보단 잘할걸?”

“뭐?”

카를이 어이가 없다는 듯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여태껏 자신의 손목을 붙들고 있는 아우라의 손을 잡고 떼어 냈다.

“좋아. 그렇게 해.”

아우라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리엘도 리엘이지만, 이걸로 카를의 집무실을 더 자주 들락거릴 수 있게 됐다.

아우라는 카를의 손이 닿았던 손등을 문지르며 뒷걸음질했다.

“그래. 그럼 쉬어.”

아우라가 샛문을 여는 순간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뒤로 다가온 카를이 문을 툭 밀어 닫았다. 등을 통해 느껴지는 기척에 아우라는 애써 태연하게 물었다.

“……더 할 말이라도 있어?”

그녀의 어깨에 카를의 손이 올라왔다. 아우라의 눈이 커졌다.

“조쉬가 그러더군. 타샤가 널 모욕했다며.”

“말 많은 부하를 뒀네.”

“왜 아까 말하지 않았어?”

아우라가 뒤를 돌았다. 카를은 진심으로 궁금한 표정이었다.

“말하면?”

“…….”

“투정으로 듣지 않을 마음은 있고?”

아우라가 문을 벌컥 열고 나가 버렸다.

쾅.

샛문이 험하게 닫혔다.

아우라의 어깨를 짚었던 카를의 손이 허공에 떠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 손이 툭 떨어졌다.

“아하.”

그는 씁쓸한 얼굴로 돌아섰다. 좀 더 편한 옷으로 아예 갈아입으려다가 침대에 몸을 던지듯 누웠다.

“…….”

드러난 손목에 아우라의 손길이 아직 남은 듯했다. 그녀의 손톱은 유폐의 흔적으로 여전히 상해 있었다. 그래도 뽀얀 손등이라던가 곧은 손가락에서 쉽게 눈을 거둘 수 없었다.

아우라는 흥미로운 여자였다.

집무실에서만 해도 그녀는 제멋대로 굴었다.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고, 타협의 여지도 없었다. 설사 상대가 제국의 황제라 해도.

그녀의 말을 빌리자면, 정말 나락으로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침실로 들어왔을 때 그녀는 성녀처럼 행동했다. 카를이 사람을 죽였을까 봐 전전긍긍하질 않나, 제니아를 멸망시킨 황태자의 친딸을 걱정하질 않나.

‘설사 정략결혼을 하더라도 이곳에서 받은 교육이 그 애의 남은 삶을 지켜 줄 거야.’

그녀는 분명 리엘에게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녀 자신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일곱 살짜리의 정략결혼을 걱정하는 걸 보면 말 다한 게 아닌가.

제멋대로 구는 쪽과 성녀인 쪽. 어떤 쪽이 아우라의 진짜 모습일까. 혹은 둘 다일까.

카를은 그것이야말로 의미 없는 고민 같았다.

‘어느 쪽이라 한들.’

아우라는 아우라였고, 자신은 그녀의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것이 그가 아는 유일한 사실이었다.

잠시 후, 카를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테이블에 뒀던 어음을 다시 한번 살폈다.

그가 샛문을 열고 다시 집무실로 들어섰다. 언제 온 건지 테오가 보좌관의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조쉬가 오늘 일을 테오에게 말한 듯했다. 카를이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

“네.”

“당장 가서 타샤를 데려와.”

드러난 그의 팔에 핏대가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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