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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6)화 (16/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6화

아우라는 리엘의 앞에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동그란 황금빛 눈동자와 진한 금발. 누가 봐도 카사 황가의 핏줄이었다.

‘황태자와 덜 닮았으면 더 귀여웠을 텐데.’

한편 리엘은 아우라를 아는 눈치였다.

“……마녀.”

‘성격도 어쩐지 황태자와 닮은 듯하고.’

“마녀라니. 어디서 그런 소릴 배웠지?”

“당신이 북쪽 탑을 탈출한 마녀라고 했어.”

“리엘 전하!”

조쉬가 기겁을 하며 외쳤다.

“그래서?”

아우라가 되묻자 리엘이 되려 눈치를 슬쩍 봤다.

“그래서…… 당신이랑 말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어쩌나. 결국 말해 버리고 말았네?”

아우라가 웃으며 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리엘이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상황 파악이 된 듯 손을 뿌리쳤다. 약이 올라 씩씩거리는 얼굴이 제법 성질이 있어 보였다.

‘그나저나 리엘은 평생 별궁에서 살았는데. 나에 대해 어떻게 안 거지?’

그때였다.

“리엘 전하!”

복도 모퉁이에서 타샤가 나타났다. 아우라를 보고 흠칫 놀란 것도 잠시, 곧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일곱 살짜리 아이의 활력을 감당하기엔 그녀의 몸은 너무 노쇠했다.

‘마녀니 뭐니 하는 말을 누가 했는지 알 것 같군.’

“황후 폐하.”

타샤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숙였다.

“리엘 전하, 이리 오시지요.”

“싫어. 유모는 재미없어.”

리엘이 타샤에게 혀를 쑥 내밀었다. 타샤가 엄격하게 말했다.

“본궁에는 오시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지 않았습니까.”

“싫어. 별궁보다 본궁이 훨씬 넓은걸. 난 이제 여기서 놀 거야.”

황태자는 리엘의 본궁 출입을 금지했다. 그런 황태자가 사라졌으니 리엘은 해방감을 느끼는 듯했다. 황태자가 딸을 외면한 벌을 이렇게 받나 싶을 정도였다.

아우라는 그런 리엘을 보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래도 황태자의 친딸이야. 혹시 모르니 핀에 대해 아는 게 있는지 확인 정도는 해야겠지.’

물론 뭔가를 떠보기엔 리엘은 너무 어리기에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아우라를 그런 걸 가릴 계제가 아니었다.

“리엘. 그럼 마녀와 산책이라도 할까?”

아우라의 말에 리엘이 강아지처럼 귀를 쫑긋했다. 고지식한 노파보다는 젊은 마녀 쪽이 흥미로운 듯했다.

타샤가 딱 잘라 말했다.

“안 됩니다, 리엘 전하. 공부하러 가실 시간입니다.”

“아, 공부 시간이었구나. 그럼 내가 가르쳐 주지. 마녀의 마법학은 어때?”

“그, 그런 게 있어? 가르쳐 줘.”

리엘이 양손을 꽉 쥐고 눈을 빛냈다.

“좋아. 가자.”

아우라가 손을 내밀었다. 리엘이 신나라 하며 그 손을 잡았다.

“읏차-”

아우라는 리엘을 단번에 일으켰다. 몸이 훅 올라가자 리엘이 까르르 웃었다.

“황후 폐하, 그건 안 될 일입니다.”

타샤가 아우라를 막아섰다.

“왜지? 내가 내 시조카에게 교육을 좀 하겠다는데. 문제가 되나?”

“리엘 전하는 황녀님이십니다.”

“그런데?”

“왕녀와 황녀의 교육은 다르지요.”

타샤는 아우라의 출신을 비꼬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아우라와 완전히 척지기로 한 듯했다. 자신이 황제를 키웠다는 오만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리고 아우라는 그런 타샤를 더 참아 줄 이유가 없었다.

“조쉬.”

“예, 폐하.”

“이자가 날 모욕했습니다. 데려가서 감옥에 가두세요.”

조쉬는 난감해했다. 타샤는 눈을 부릅뜨고 조쉬를 보았다. 감히 일개 기사 주제에 황제의 유모를 가둘 수 있겠냐고 묻는 듯했다.

아우라가 냉정하게 되물었다.

“조쉬, 내 말이 들리지 않나요?”

조쉬가 딱! 하고 발끝을 모았다.

“네. 알겠습니다, 황후 폐하.”

“조쉬 기사단장님!”

당황한 타샤가 크게 외쳤다. 그러나 조쉬는 타샤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따라오십시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나는 황제 폐하의 유모입니다!”

“그래. 유모일 뿐이야. 어머니가 아니라.”

아우라가 나지막이 말했다. 타샤가 제 가슴을 탁 쳤다.

“저는! 폐하의 어머니 대신입니다!”

“그 역시 맞는 말이지, 타샤. 그래서 참 애석한 일이기도 하고.”

아우라의 눈매가 가늘게 휘어졌다. 청록빛 눈동자가 그 안에서 예쁘게 빛났다.

“당신 같은 천한 여자가 카를의 어머니 노릇을 하고 있다니. 난 카를이 참 불쌍하거든.”

타샤는 할 말을 잃은 듯했다. 그녀는 뭐라도 말하려는 듯 입을 뻐끔댔지만 그대로 조쉬에게 끌려가고 말았다.

***

미나는 씩씩대며 복도를 걷고 있었다.

‘왕녀와 황녀의 교육이 다르다고? 그 못생긴 노파가 감히……!’

생각만 해도 열불이 터졌다. 마치 자신이 모욕을 당한 것처럼.

미나의 동생들은 모두 아우라가 준 돈으로 교육을 받고 있었다. 아우라는 미나에게 은인이자 천사였다. 기사들이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기분을 알 것도 같았다.

미나가 우뚝 멈춰 섰다.

‘가만히 있을 순 없지. 마침 타샤가 감옥에 갇혔으니…… 기회야.’

미나는 본궁과 이어진 작은 건물로 갔다. 사용인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그 건물 꼭대기 층에 미나와 타샤처럼 황궁에 입주한 시녀들의 방도 있었다.

계단을 오르던 그녀는 마침 꼭대기 층에서 내려오는 여자아이와 마주쳤다. 사용인들의 숙소를 청소하는 아이였다.

“안녕하십니까, 시녀장님.”

“얘. 잠시만.”

미나는 주위를 둘러보고 복도 구석으로 그 아이를 데려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네가 꼭대기 층을 모두 청소하지?”

“네, 그렇습니다.”

미나는 다시 한번 주위를 살피고 아이에게 귓속말을 했다.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미나가 아우라의 귀걸이를 쥐여 주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타샤의 방으로 갔다. 아이는 떨리는 손으로 열쇠로 방문을 열었다. 방은 단출하고 초라했다. 드레스는 단 세 벌이었고, 식기엔 이가 빠져 있었다.

미나가 아이를 내보내며 말했다.

“넌 복도에서 망을 봐. 알았지?”

“네, 네. 시녀장님.”

“겁먹지 마. 타샤는 지금 못 돌아오니까.”

미나는 떨고 있는 아이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그리고 타샤의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워낙 짐이 없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옷장과 책상 서랍, 잡동사니 상자까지 다 뒤져도 나오는 건 없었다. 미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닌데. 분명 뭔가 수상한데…….”

미나는 책상 서랍을 다시 열었다. 그 안엔 머리망과 깃펜, 잉크가 전부였다. 실망하며 서랍을 닫으려던 미나가 멈칫했다.

그녀는 바닥에 앉아 서랍 아래 판의 밑부분을 더듬었다. 바스락하고 뭔가가 만져졌다.

몸을 더 숙이고 열린 서랍을 올려다보았다. 누런 낡은 봉투가 서랍 밑에 붙어 있었다.

“……찾았다.”

***

리엘은 내내 말이 없었다. 준비해 준 동화책도 케이크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리엘의 앞엔 아우라가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일단은 방에 데려오긴 했는데 리엘은 내내 저런 태도였다.

제 유모가 기사에게 끌려간 모습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했다. 황녀의 자존심에 티는 못 내고 있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니 아우라는 좀 미안해졌다.

“리엘. 책도 케이크도 싫으면 산책할까?”

리엘이 고개를 휙휙 젓더니 아우라에게 쏘아붙였다.

“당신 정말 마녀 같아.”

“왜? 타샤에게 천하다고 해서?”

“황족은 국민을 사랑해야 해. 천하다고 하면 안 돼.”

리엘은 제법 기특한 말을 할 줄 알았다. 그래서 아우라는 더 놀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리엘, 너도 날 마녀라고 하지 않았어?”

“그건-!”

“나도 이젠 카사 성을 가진 국민인데, 사랑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

“그건…….”

“아니면…… 제니아 왕국 출신이라 사랑을 덜 받아도 되는 건가?”

“그렇지 않아!”

리엘이 작은 손으로 테이블을 탕 쳤다. 아우라는 놀란 척 뒤로 물러났다.

“왕국 출신인 건 상관없어. 그래서 마녀라고 한 게 아니야! 나는 그냥…….”

“그냥?”

“유모가…… 당신이 유모를 물에 빠트려 죽이려고 했다길래…….”

아우라는 할 말을 잃었다.

‘고작 일곱 살짜리 어린애에게 무슨 소리를 한 거지? 리엘이 받을 충격은 생각하지도 않는 건가?’

이쯤 되니 핀에 대해 묻기도 망설여졌다. 리엘은 이미 충분히 충격을 받았고, 알게 모르게 이용당하고 있을 테니까.

아우라는 리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네 유모에게 심하게 한 거 사과할게. 사과의 의미로 케이크를 줄 테니까 먹어 줄래?”

리엘은 그제야 딸기가 쏙쏙 박힌 케이크를 보았다. 배가 고프긴 했던 모양인지 침을 꿀꺽 삼키곤 고개를 끄덕였다. 

“……먹을래.”

“자.”

아우라가 포크를 내어 주었다. 그러자 리엘이 포크로 푹푹 케이크를 떠먹기 시작했다. 입가에 크림을 묻히는 모습이 딱 일곱 살짜리였다.

그때 미나가 방으로 들어왔다.

“폐하, 황제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지금? 어디로?”

“황제 폐하의 집무실로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집무실이란 말에 아우라가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태연하게 리엘에게 물었다.

“리엘, 난 잠깐 삼촌에게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 케이크 혼자 먹을 수 있지?”

“응.”

리엘은 이미 케이크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우라가 방을 나섰을 때, 미나가 따라붙으며 말했다.

“폐하, 잠시만요.”

“왜 그래?”

미나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주머니에서 몇 장의 종이를 꺼냈다.

“타샤의 방에서 나왔습니다. 꽤 중요해 보여서요.”

아우라가 미나를 가만히 보았다.

“벌써 다녀온 거야?”

“타샤의 무례함에 너무 화가 나서요. 감옥에 들어간 틈을 이용해 그 방을 청소하는 아이를 매수해서 함께 뒤져 보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미나의 눈이 열의로 빛났다. 아우라가 보기엔 미나도 보통 아이는 아닌 것 같았다.

아우라는 종이를 받아 그 내용을 살폈다.

‘이건…… 재미있네.’

잠시 후, 아우라는 카를의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그녀는 커다란 나무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집무실 앞을 지키던 조쉬가 다가왔다.

“저, 황후 폐하.”

“조쉬. 또 만나는군요.”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 타샤의 이야기를 고하니 바로 석방하셨습니다. 지금 안에서 타샤가 황제 폐하를 만나 뵙고 있습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조쉬는 카를에게 상황을 고해야 하고, 카를은 타샤를 꺼내 줄 테고, 타샤는 가만히 있을 리 없으니.

그러나 아우라는 타샤에게 고마울 지경이었다. 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갈 기회를 만들어 주지 않았는가.

아우라가 조쉬에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열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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