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5화
정사가 끝난 후 카를은 거의 바로 잠이 들었다. 그가 아우라를 뒤에서 껴안는 바람에 그녀는 그의 심장 박동을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쿵, 쿵, 쿵, 쿵…….
몸이 크면 심장도 큰 건가. 그래서 이렇게 심장이 힘차게 뛰는 걸까. 아우라는 하릴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그녀는 그의 팔을 걷어 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무거운 다리와 뻐근한 허리. 여기저기 몸에 남은 자국들. 그런 것들을 애써 무시하며 가운을 입었다.
그녀로서도 처음 들어와 보는 황후의 방이었다. 황자비의 방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넓고 화려했다.
‘카를의 방도 이 정도로 넓겠지.’
방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집무실, 개인 서재, 응접실 등등. 모든 곳이 넓고 뭔가를 숨길 공간은 많을 터였다. 그 안에 핀이 있을지는 미지수지만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할 곳임은 분명했다.
아우라는 바람이라도 쐴 생각으로 발코니로 갔다. 그리고 그 순간 멈춰 서고 말았다.
저 멀리 우뚝 선 북쪽 탑이 보였다. 운이 없게도 황후의 방 창문이 북쪽을 향한 탓이었다.
아우라는 홀린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자신을 그토록 고통받게 한 탑인데 이상하게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를 감시하던 존재를 이제야 알게 된 것처럼.
자신을 비웃는 탑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네가 황후에 방에 있다고 한들 이미 넌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어? 아무리 좋은 드레스와 장신구를 걸쳐도 유폐의 기억은 평생 널 따라다닐 텐데?
아우라가 커튼을 확 치곤 뒤를 돌았다. 보이는 건 곤히 자고 있는 카를뿐이었다.
그런 카를을 보며 아우라는 다시 다짐했다.
꼭, 반드시 꼭 핀을 깨고 이 황궁을 나가고 말겠다고.
***
이른 아침. 카를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옆자리가 비어 시종에게 물으니 황후가 혼자 산책을 갔다고 했다. 카를은 잠시 멍한 채로 앉아 있었다.
‘이상한데. 이렇게 잘 자다니.’
아우라가 안센나로 도망갔던 날도 그랬다. 아우라를 안는 순간 잠이 쏟아졌고, 그녀가 떠날 때까지 깨질 못했다. 심지어 그때는 아우라가 무슨 꿍꿍이가 있을 거라 경계까지 하고 있었는데.
옷을 갖춰 입고 나오자 테오가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그래. 놀랍게도.”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황후 폐하께서는 먼저 드신 것 같던데요.”
“난 생각 없어. 바로 집무실로 가지.”
느긋하게 아침을 즐길 겨를은 없었다. 정식으로 황좌를 이어받은 게 아니기에 정리할 일이 많았다.
그렇게 집무실로 향하는 그들 앞에 라이언 대공이 나타났다.
“폐하.”
“라이언 대공.”
라이언이 웃으며 예를 차렸다. 그 특유의 은발이 아침 햇빛을 받아 빛났다.
은발은 북부 지방 원주민의 특징이었다. 라이언의 어머니는 수트라의 평민이었고, 그는 거의 평생을 수트라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는 한때 황태자 패거리의 일원이기도 했다. 카를이 생각하는 두 번째 이센의 배후.
‘테인 공작은 제 조카를 내세워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려 하지. 하지만 라이언은…… 좀처럼 속을 보이지 않아.’
카를이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황후 대관식에 와 줘서 고맙군. 어제는 제대로 인사도 못 했는데.”
라이언이 그 손을 잡았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황궁 구경을 하겠습니까. 수도는 바람이 따뜻해서 좋습니다.”
“하긴. 수트라의 겨울은 정말 혹독할 테니.”
“하하…… 아무래도 그렇죠. 그나저나 어제 보니 황후 폐하께서 더욱 아름다워지신 것 같습니다.”
라이언은 흥미롭다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전해 주지.”
“뭐랄까요…… 참 재미있으신 분 같습니다.”
카를이 그를 쓱 보았다.
“재미있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으시던데요. 이제야 소녀티를 벗으신 걸까요?”
“대공.”
라이언은 그제야 아차 싶었다. 그는 뭔가에 빠지면 이따금 이렇게 자신을 제어하지 못했다.
“남자들끼리의 농이었습니다.”
“남자들끼리의 농이라.”
카를이 창밖으로 불쾌함 가득한 시선을 던졌다.
“내가 남자들 농에 부인을 갖다 바치는 놈으로 보였다니. 의외로군.”
“……실언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폐하.”
라이언은 자존심 따위 버리고 바로 숙이고 들어갔다. 그는 이런 면에 있어선 낯이 두꺼웠다.
카를도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대관식 다음 날부터 황족끼리 얼굴을 붉힐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영지로는 바로 돌아가나?”
“아뇨. 휴가 삼아 좀 더 있다 갈 생각입니다.”
“북부는 겨울이 관건이라 할 일이 많을 텐데.”
“다 처리해 놓고 왔습니다. 이런 기회가 흔치 않아서요.”
‘그럼 황궁에 머무르겠군.’
잘됐다 싶었다. 그 역시 라이언에게 볼일이 있었으니.
“조만간 내가 부르겠어. 그때 빼지 말고 찾아와 주면 고맙겠는데.”
“물론입니다.”
라이언이 미소를 되찾았다. 자신 역시 바라는 바였다는 듯 그는 시원스럽게 예를 차렸다.
***
대관식이 끝나고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아우라는 이센도 카를도 찾지 않았다. 두 쪽 모두 아우라를 지켜보고 있을 게 뻔하니 조금 더 적당한 때를 두고 봐야 했다.
아우라는 아침 식사를 하며 오늘 자 신문을 보고 있었다. 신문을 넘기던 그녀가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이들은…… 대관식에 들이닥쳤던 시위대가 아닌가.’
[……하룻밤 만에 종적을 감췄다. 이들은 순혈주의자 단체의 수뇌부로 알려져 있으며 평소에도 외국인에 대한 범죄를 저질러 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하룻밤 만에 건장한 남자 다섯 명이 종적을 감췄다고…….’
아우라는 문득 건국제에서 나눴던 카를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놈들에게 어떤 벌을 줬으면 좋겠어?’
‘네 마음대로 해. 난 이제 관심 없으니.’
‘그럼 다 죽일 텐데.’
‘설마…… 죽인 건 아니겠지.’
아우라가 신문을 접었다. 그때 미나가 방에 들어왔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
“제 동생이 황립 아카데미에 입학했습니다. 조만간 들르라고 할까요?”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었다. 얼마 전에 써 준 추천장이 수리된 모양이었다.
“바로 오진 말고 비밀리에 몇 가지를 알아 오라고 해. 되도록 빨리.”
“네. 어떻게 전할까요?”
아우라는 조금 망설여졌지만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믿음 없이 아랫사람을 부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핀이라는 이름의 수정구에 대한 알아낼 수 있는 모든 정보. 특히 그것을 만든 이와 봉인을 푸는 방법까지.”
“네. 전하겠습니다.”
미나가 뭔가를 망설였다.
“또 할 말이 있어?”
“그게…… 별건 아닐지도 모르지만, 심상치 않은 소문을 들었습니다.”
“심상치 않은 소문이라니?”
“타샤가 리엘 전하의 유모가 되었다고 합니다.”
리엘 카사. 리엘은 죽은 황태자의 일곱 살 난 외동딸이었다.
권력을 뒷받침해 줄 아들을 원했던 황태자는 딸이 태어나자 크게 실망했다. 설상가상 황태자비마저 리엘을 낳다가 죽는 바람에 황태자는 제 딸을 별궁에 버렸다.
카를은 굳이 여자애인 리엘을 죽이지 않았다. 리엘에게 불행을 안겨 준 성별이 결국 목숨을 구하게 해 준 셈이었다.
“유모 배정은 카를이 한 건가?”
“아니요. 타샤가 직접 나섰다고 합니다.”
이상했다. 타샤는 유모를 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았다. 황제의 옆을 포기하고 별궁으로 갈 이유도 없고.
‘카를보다 리엘이 나은 점이 있다면…… 트루 블러드라는 것 정도인데.’
“미나.”
“네.”
“네 눈에 타샤는 어때 보여? 눈에 띄는 점이라든가.”
“음, 필요 이상 검소한 것 같습니다. 돈도 많이 벌었을 테고, 이렇다 할 가족도 없다고 하는데 차림이 항상 추레합니다.”
“그래……?”
과시적인 타샤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아우라는 끼고 있던 귀걸이 한쪽을 빼서 미나에게 주었다.
“타샤의 방을 청소하는 아이들에게 그 방을 뒤져 보라고 해. 이상한 게 있으면 다 보고하라고 하고.”
“네, 알겠습니다.”
미나가 귀걸이를 받아 챙겼다.
그때 복도에서 누군가의 경쾌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우라는 그를 바로 알아보았다.
“조쉬.”
“……아. 화, 황후 폐하.”
아우라는 기사단장을 상징하는 그의 금빛 견장을 보았다.
‘얼마 전에 황제군 기사단장에 임명되었다지. 카를이 테오와 조쉬를 계속 수족으로 부리려는 모양이야.’
황제군은 황실군에서 가장 뛰어난 자들만을 추린 소수 정예군이었다. 그들은 오직 황제만을 위해 움직였다.
조쉬가 아우라를 보고 꾸벅 인사했다. 그는 여전히 아우라를 무서워하는 듯했다.
“저번에는 미안했어요, 조쉬. 조만간 새 단추를 보낼게요.”
“네?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승진하면서 의복도 바뀌어서요.”
“그럼 승진을 축하하는 의미로 보내도록 하죠.”
조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무서운 사람과는 되도록 얽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마음이 보이는 듯해서 아우라가 빙긋 웃었다.
“혹시 저와 얽히고 싶지 않나요?”
“!”
‘……귀신.’
조쉬의 관자놀이에 땀이 맺혔다.
‘다른 이유를 생각해야 해. 그럴듯한 이유를!’
그때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섬광처럼 지나갔다. 요즘 들어 테오와 자주 나눈 이야기였다.
“그런 게 아니오라…… 감사드릴 점이 있어 그럽니다.”
“감사요?”
“그러니까,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황제 폐하께서 황후 폐하의 곁에서는 잘 주무시지 않습니까.”
“……? 폐하께선 항상 잘 주무시지 않나요?”
그녀가 본 카를은 항상 죽은 듯이 잤다. 어울리지 않게 잠이 많다는 생각까지 했는데.
조쉬는 그런 말 말라는 듯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불면증이 얼마나 심하신데요. 데블라에서는 마물보다 폐하의 불면이 더 걱정스러웠을 정도입니다.”
“……이상한 일이네요.”
“아무튼, 곁에서 모시는 신하로서 꼭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조쉬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우라는 미심쩍긴 했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군요. 어쨌거나 사과를 받아 줘서 고마워요.”
“아, 아닙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황후 폐하.”
조쉬가 안도의 한숨을 삼켰을 때였다. 갑자기 복도 모퉁이에서 한 여자아이가 튀어나왔다. 그 아이는 아우라의 다리에 퍽 부딪혔다.
“으악!”
아이는 새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리고 제 앞에 선 아우라를 올려다보고는 외쳤다.
“마녀다!”
아우라는 그 아이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황궁을 뛰어다닐 어린 여자아이는 리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