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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4)화 (14/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4화

“!”

어떻게 그렇게 유령처럼 기척도 없이 움직일 수 있는 건지.

카를은 아우라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차라리 완전히 어두웠더라면 나았을 것이다. 냉정하다 못해 얼어붙어 깨질 것 같은 시선이 아우라에게 와 박혔다.

아우라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카를은 그녀에게 따라붙었다.

물러나는 걸 멈출 수가 없어서 결국 등이 벽에 닿았다. 카를이 그녀를 가두듯 주먹을 벽에 툭 댔다.

별것 아닌 행동이었다. 이렇다 할 힘을 쓴 것도 아니고. 그러나 아우라는 묶인 듯 그 검은 눈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어?”

카를이 물었다. 아우라는 두려움을 꾹 누르곤 태연하게 대답했다.

“뭐가?”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걸 믿고 날 바보 취급하고 있잖아.”

직설적인 화법과 더할 나위 없는 정답. 변명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변명할 거리도 없게 만드는 말이었다.

아우라가 손을 올려 그의 한쪽 뺨을 부드럽게 툭툭 두드렸다.

“멋지네. 첫날밤의 첫 대화.”

그리고 그에게서 벗어나려 몸을 빼냈을 때였다. 카를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다시 벽으로 밀어 세웠다.

“이센과 무슨 얘길 했지?”

말해 줄 수 없었다. 핀이 걸려 있는 한, 절대로.

“안 됐네. 하나밖에 안 남은 형제를 의심하다니.”

“물어볼 때 말해. 어차피 알게 될 테니까.”

“그럼 네가 알아내면 되겠네.”

“아우라. 마지막 경고야.”

아우라는 그의 거친 명령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런 말투와 좋아하는 마음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도 이해가 안 갔고.

카를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가 이렇게 나올 때마다 아우라는 꺾이는 대신 가시를 세우게 된다는 것을. 고작 마음을 할퀴는 게 할 수 있는 전부라 해도.

“의심해, 카를. 계속 그렇게 의심해.”

“…….”

“난 네가 의심 끝에 네 동생을 잃었으면 좋겠어.”

카를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아우라는 멈추지 않았다.

“내가 내 부모와 오빠들을 잃은 것처럼 너도 그 몇 안 되는 네 사람을 잃었으면 좋겠어. 이센이건, 타샤건.”

그녀는 그의 양팔을 잡고 까치발을 들었다. 그의 귓가로 다가가자 삼나무 향유 냄새가 났다.

“네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계산이라는 걸 해 보니까, 그게 공평한 것 같아.”

카를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곁눈질했다. 자신의 팔을 겁도 없이 꽉 잡은 하얀 손도.

아우라가 천천히 물러나며 카를의 팔을 놓으려 할 때였다. 카를이 그녀의 양어깨를 잡더니 훅 다가왔다.

“!”

순간 놀란 아우라를 비웃듯이 카를이 말했다.

“그래. 어디 한번 계속 그렇게 해 봐.”

그가 아우라의 입술을 짓씹듯 머금었다가 떨어졌다. 아우라는 엉킨 숨을 애써 침착하게 삼켰다.

“다만, 그들에게 이용당한다면 그때는 정말 용서하지 않아.”

“읏, 그럴 일은-!”

카를이 다시금 그녀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아우라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다물었지만 집요하게 아랫입술을 빨아들이는 바람에 결국 힘이 풀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혀가 거침없이 들어왔다.

카를의 혀가 탐욕적으로 그녀의 입안을 헤집었다. 그녀가 혀를 뒤로 무르면 감아 끌어냈고, 고개를 돌리려 하면 턱을 쥐고 놔주질 않았다. 치열과 입천장을 훑을 때마다 아우라는 다리가 풀릴 것 같았다.

아우라가 그의 가슴이며 어깨를 있는 대로 밀어냈다. 그의 힘을 이길 순 없었으나 잠깐씩 숨통이 트였다.

“그만, 해, 좀……!”

“싫어.”

그 단호한 거절을 증명하듯 카를이 거칠게 그녀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다시금 입술이 들이닥쳤다. 고개가 뒤로 꺾일 정도로 혀와 숨결이 깊게 파고들었다. 그가 그녀의 윗입술을 머금으며 간지럽혔다.

“읏.”

아우라가 신음을 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가 침대를 향해 그녀를 안은 채로 척척 걸어갔다. 그는 아우라를 밀어 눕히곤 그 위로 올라왔다. 여자를 눕히는 일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차라리 잔뜩 화를 냈다면 나았을 것이다. 그와 자는 게 처음도 아니었을뿐더러 어느 정도는 각오했으니.

그러나 이런 건 견디기가 어려웠다. 이 모든 과정이 이토록 무감하고도 건조할 수 있다니.

카를의 손이 등으로 갔다. 슈미즈의 리본을 잡는 순간 아우라의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셨다.

그때, 카를이 우뚝 멈췄다. 그는 석고상처럼 하얗게 질린 아우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두려움에 찬 숨만 겨우 내뱉고 있었다.

“……젠장.” 

그는 자괴감 섞인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며 쓱 물러났다. 아우라는 반쯤 굳은 듯한 몸을 일으켰다. 카를의 뺨에 촛불이 일렁이고 있었다.

“자. 난 나갈 테니.”

카를이 한숨처럼 말하며 돌아섰다. 아우라는 비로소 안도하다가 무심결에 물었다.

“……어디로 가는데?”

“연회장. 여기서 이러고 있느니 술이나 마시겠어.”

순간 아우라의 머릿속에 이센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조카딸인 엘리제 영애를 후궁 자리로 밀어붙이려 합니다.’

그리고 연회장에 남아 있던 테인 공작과 엘리제.

아우라는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 카를의 소매를 잡았다. 카를이 멈칫하더니 뒤를 돌아 아우라를 보았다.

놀란 건 아우라도 마찬가지였다. 왜 그랬을까. 그가 물러난 것에 그토록 안도해 놓고 왜 또 붙잡은 걸까.

답은 금방 내려졌다.

‘후궁은…… 아직 안 돼. 카를이 내게서 멀어지는 만큼 핀에 접근하는 것도 어려워져.’

“무슨 짓이야?”

카를이 그녀의 손을 보며 물었다.

그녀는 쉴 새 없이 밀어붙여진 탓에 심장이 아직도 아프도록 뛰었다. 그래도 그녀는 용기를 냈다. 겁을 먹고 물러날 여유 따윈 애초에 없었다.

이제부터는 이 생각만 해야 했다. 어떻게 그를 연회장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수 있을까.

“여전하네, 카를. 결혼식 날 밤에도 이렇게 나가 버렸잖아.”

“…….”

“그래 놓고 아침에는 꽃다발을 줬지. 좀 궁금하긴 해. 왜 그런 심경의 변화를 겪었을까.”

아우라가 그의 소매를 장난스럽게 툭툭 당겼다.

“이렇게 붙잡아서?”

“…….”

“그때 뭐라고 했더라. 맞아, 이렇게 말했었나.”

“…….”

“제 이름은…… 아우라예요.”

그렇게 말하며 아우라는 카를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카를이 천천히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무너지듯 아우라에게 달려들었다.

풀썩.

그녀의 몸이 다시 침대로 넘어갔다. 남자의 무게와 전신을 내리누르는 압박감. 게다가 그녀의 몸을 껴안는 힘. 그런 것들에 숨이 막히는 와중에 낮게 읊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길……. 미치지 않고서야.”

카를의 손이 아우라의 등을 더듬었다. 리본을 당기자 슈미즈가 허물처럼 느슨해졌다. 드러난 어깨에 카를이 입술을 묻었다.

“읏…….”

고작 어깨에 입술이 닿았을 뿐인데 아우라는 다리를 틀었다. 배 속에서 뭔가가 끓어오르는 느낌이 여전히 낯설었다. 카를이 입술을 떼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자신도 이 상황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었다.

“아우라.”

“……왜.”

“대관식에서 내가 얘기했었나? 네 발목에 정신이 팔려서 안 했던 것 같긴 한데.”

그가 아우라의 다친 다리를 잡고 들어 올렸다. 그리고 붕대에 입을 한 번 맞췄다.

“오늘 너, 대관식에서 정말 예뻐 보였다고.”

“……아.”

“내 칭찬 같은 건 필요 없겠지만 들어 둬. 드레스도 완벽했고, 춤도 잘 췄어. 시위대를 다룰 때는 당장 방으로 끌고 오고 싶을 정도였는데.”

카를이 슈미즈 안으로 손을 넣어 아우라의 가슴을 쥐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아우라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네가 이센과 말을 섞기 시작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정말이지 못 견디게 마음에 안 들어.”

순간 그가 그녀의 가슴을 조금 더 세게 쥐었다. 보다 강한 자극에 아우라가 숨을 멈췄다. 노골적으로 끝을 건드리는 손길에 아우라가 고개를 저었다. 쾌락이 여지없이 그녀의 몸을 침범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뒷목을 감싸며 그녀를 일으켰다. 스륵, 슈미즈가 내려갔다. 카를이 그녀의 등을 단단히 잡아 자신을 마주하게 했다.

“그런데도 난 이 방을 못 나가고 있지.”

그의 손이 제멋대로 아우라의 상체를 유영했다. 어깨와 턱, 목덜미 곳곳에 그의 입술이 와 박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속삭였다.

“네가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그의 검은 눈이 아우라의 앞에 나타났다. 그가 엷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입 맞춰 줘. 네가 붙잡았으니까.”

아우라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니라고 잡아떼는 것도 우스운 일인지라 그의 얼굴을 감싸곤 입을 맞췄다.

조금 서툰 입맞춤을 그는 참을성 있게 받아 주었다. 골반과 허리를 더듬는 손길에 아우라가 몸을 떨었다.

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특히 계속 맞대고 있는 혀와 입술이.

그의 손이 가슴으로 다시 왔을 때, 아우라는 결국 입술을 떼고 말았다.

“하아…….”

참았던 숨을 뱉어 내는 순간 카를이 그녀를 밀어 눕혔다. 아우라의 몽롱한 눈이 욕망에 젖은 카를의 눈과 마주쳤다. 이상했다. 저 눈만 보면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기분이었다.

아우라는 그 흐름에 취한 듯 물었다.

“……내가 네게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카를과 달리 아우라는 그 답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카를의 등을 끌어안아 내렸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잘못된 길인 줄 알면서도…… 계속 걷게 하는 거야.”

그리고 그 말은, 아우라가 자신에게 건네는 것이기도 했다.

카를이 그녀의 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다만 그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몸을 세웠다.

아우라의 팔이 힘없이 떨어졌을 때, 그가 그녀의 다리를 벌렸다.

“아읏…….”

하반신이 갈라지는 감각에 아우라가 눈을 꽉 감았다. 카를이 몸을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췄지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이런 게 익숙해지는 날이 오긴 할까 싶었다. 이 통증도, 쾌락도.

이윽고 그녀의 몸 안에서 쾌락이 간헐적으로 치밀었다. 아우라는 아랫입술을 물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번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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