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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3)화 (13/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3화

카를이 아우라의 손을 좀 더 단단하게 잡았다. 거절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 앞에서 아우라가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황자의 춤 상대를 해 드려야겠습니다.”

“진심이오?”

카를이 나지막이 물었다. 아우라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럼요. 폐하의 하나밖에 없는 형제 아닙니까.”

아우라는 이센의 손을 잡고 무도회장으로 다시 가 버렸다. 카를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었다.

‘약속 지켜. 이센과는 접촉하지 마.’

‘그래, 알았어.’

그때 아우라가 보였던 희미한 미소. 그 의미를 이제야 알 듯했다.

‘약속이건 뭐건 말을 들어줄 마음이 없다 이건가.’

“……돌게 하는군.”

카를은 기둥에 등을 툭 기대곤 팔짱을 꼈다. 그리고 춤을 추는 아우라와 이센을 빤히 보았다. 그들의 춤이 끝날 때까지 눈을 떼지 않겠다는 듯이.

“황제 폐하.”

그때 한 중년 남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카를은 그의 등장이 성가셨지만 무시할 순 없었다.

“테인 공작.”

“부인을 맞으신 걸 축하드립니다. 영지에 일이 많아 이제야 황궁에 도착한 걸 용서해 주십시오.”

테인 공작은 죽은 황태자의 최측근이었다. 카를이 황좌에 오른 후 개인 군사를 바치며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여전히 미심쩍은 데가 많아 이센의 배후가 아닐까 의심하고 있는 자였다.

“폐하, 이 경사를 축하하는 마음으로 제 조카를 데리고 왔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인사를 받아 주십시오.”

“조카라면…….”

카를은 테인 공작의 뒤에 선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내 그는 오랜 기억을 끄집어낸 듯 반가움을 표했다.

“엘리제로군. 오랜만이야. 어렸을 때 이후로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영광입니다, 폐하.”

엘리제가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주위 귀족과 기사들이 그녀를 흘긋거렸다. 그만큼 엘리제의 용모나 차림은 눈에 띄게 아름다웠다.

카를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데블라에 있느라 선대 공작인 그대의 아버지의 장례에 애도의 뜻을 표하지 못했지. 늦었지만 마음을 받아 줬으면 좋겠군.”

“정말 감사합니다, 폐하. 아버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엘리제가 진심으로 기쁜 듯 활짝 웃었다. 그러자 카를도 흔치 않게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춤을 추고 있던 아우라와 눈이 마주쳤다.

‘신경이나 쓰겠나. 내가 누구와 있건.’

카를은 아우라를 비웃듯 시선을 거두고 엘리제와의 대화를 이어 갔다.

***

이센과 아우라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이센의 황금빛 머리카락이 샹들리에 불빛에 빛났다.

“황자는 선황 폐하를 많이 닮으셨습니다.”

“하하, 맞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많이 서운해하시죠.”

이 외모와 유들유들한 성격. 그런 것들 때문에 이센은 카사 황족과 더 쉽게 어울렸다. 그래도 반쪽짜리 취급을 받긴 했지만.

이센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형수님 소식은 익히 들었습니다. 그간 고생이 많으셨을 텐데 도움이 못 되어 죄송합니다.”

“걱정해 준 마음만이라도 감사합니다.”

“그래도 3년이면…… 그런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지요. 지금은 괜찮으십니까?”

이센이 그렇게 아우라를 떠봤다. 이를테면 카를에 대한 아우라의 마음 같은 것을.

그리고 아우라는 그 장단에 일단은 맞춰 주기로 했다. 그녀 역시 이센에게 얻을 게 있는 만큼.

“황자. 황자가 괜찮다면…….”

그녀가 카를 쪽을 살폈을 때였다. 카를이 웬 영애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누구지?’

그 영애는 풍성한 금발을 부드럽게 내려뜨린 미인이었다. 그 영애가 활짝 웃자 카를도 편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우라로선 처음 보는 표정으로.

‘귀족과의 대화는 귀찮아하는 줄만 알았더니.’

“형수님?”

멍한 아우라에게 이센이 말했다. 아우라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이센에게 말했다.

“아, 미안합니다. 황자만 괜찮다면 테라스로 갈까요?”

“좋지요. 안 그래도 드릴 말씀이 있으니까요.”

아우라는 이센과 무도회장을 벗어나 테라스로 갔다.

그녀가 테라스의 커튼을 치려고 할 때였다. 여전히 영애와 대화를 나누던 카를과 눈이 마주쳤다.

연회 중간에 테라스로 간다는 것. 그건 은밀한 대화를 나누겠다는 암시나 마찬가지였다. 카를은 당장 그곳에서 나오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아우라는 그대로 커튼을 쳐 버렸다.

이센은 난간에 등을 기대고 선 채 아우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형수님.”

“황자.”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묘한 기류가 흘렀고, 이센이 먼저 웃었다.

“먼저 말씀하시죠, 형수님.”

“아닙니다. 먼저 말씀하세요.”

겨울바람이 불어왔다. 낮게 뜬 이센의 눈이 깊어졌다.

“안센나로 도망치셨다가 돌아오셨다지요?”

아우라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해는 합니다. 3년이나 기약도 없이 탑에 버려둔 남편에게서 도망가고 싶으셨겠지요.”

싱긋 웃는 이센에게 아우라가 말했다.

“황자는 다정해서 좋네요. 이렇게 걱정도 해 주시고.”

“형수님이 시집오셨을 때부터 친해지고 싶었어요. 제니아의 문화를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요. 특히 그쪽 소설은 마법사들이 많이 나와서 그런가 신비로워요.”

“그렇게 말해 주니 감사하군요. 시집올 때 책을 몇 권 가져왔으니 다음에 빌려드리죠.”

얼마간은 별거 아닌 소소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로부터 잠시 후, 입을 다물고 있던 이센이 물었다.

“제니아인들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이센은 노골적으로 나왔다. 그의 눈에 욕망이 보이는 듯했다. 황좌건, 권력이건.

아우라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다면.”

아우라가 천천히 이센에게 다가갔다.

“황자가 절 도와줄 건가요?”

“형수님.”

“네.”

“형수님께서는 핀의 존재를 아십니까?”

아우라의 머리칼이 겨울바람에 흩날렸다. 목덜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물으려 했던 게 질문으로 돌아왔다. 아우라는 자신에게 되뇌었다. 이럴 때일수록 급해서도, 마음을 내보여서도 안 돼.

“핀? 그게 무엇인가요?”

“제니아 마법사들의 마력을 봉인한 수정구입니다. 안센나에 가 보셔서 아시겠지만, 제니아 마법사들은 핀에 마력을 다 빼앗겼죠.”

아우라가 놀란 척 이센의 팔을 잡았다. 

“……정말인가요? 누가 그런 짓을…….”

“돌아가신 황태자 형님의 짓입니다. 저도 안 지는 얼마 안 됐죠. 하지만 너무 좌절하진 마십시오. 그 봉인을 깨면 마력은 다시 돌아갈 테니까요.”

“그럼 그 핀이라는 건 대체 어디 있죠?”

아우라가 다급하게 물었다. 이센이 입술을 길게 늘여 웃었다.

“지금으로서 드릴 수 있는 정보는 여기까지입니다. 만약 핀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시다면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이센은 은근슬쩍 자신에게 배후가 있음을 드러냈다.

아우라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를 돕고 핀을 얻는다면 모든 게 쉽게 풀릴 수도 있었다. 이센이 하려는 게 반역만 아니라면 바로 그의 편이 되고 싶을 정도였다.

“제가 황자를 도우면 카를 폐하가 위험해지나요?”

“대가 없는 보상은 없지요. 다만, 음…… 이것만 말씀드리죠. 핀의 봉인만 해제하시면 형수님께선 황궁을 훨훨 벗어날 수 있으실 겁니다. 자유롭게요.”

“…….”

“갈등하시는군요.”

“시간을 주세요. 생각할 시간을.”

“네, 그러지요. 아, 이왕 말씀드리는 김에 결정을 도와드리죠.”

이센이 아우라의 곁으로 오더니 커튼을 걷었다. 그가 저 멀리 테인 공작과 서 있는 엘리제를 가리켰다. 카를은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저기 저 영애 말입니다. 테인 공작가 선대 공작의 외동딸인 엘리제 테인이라고 합니다.”

‘엘리제 테인.’

아우라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엘리제에게 보였던 카를의 미소가 다시금 떠오르는 듯했다.

“현 공작인 웨일 테인은 황실에 줄을 대고 싶어 하죠. 그래서 조카딸인 엘리제 영애를 후궁 자리로 밀어붙이려 합니다. 이미 귀족가에 암암리에 도는 소문이죠.”

후궁이란 말에 아우라의 얼굴이 천천히 굳었다. 그녀는 일부러 더 감정 없이 대답했다.

“결혼은 때때로 정치의 좋은 수단이 되니까요.”

아우라의 반응에 이센은 조금 당황한 듯했다.

“뭐, 제가 말씀드리는 건…… 황후의 자리라는 것도 견고하지만은 않다는 겁니다. 특히 카를 형님의 부인 자리라면 더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잘 생각해 보세요.”

이센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테라스를 떠났다. 혼자 남은 아우라만이 차가운 바람을 맞았다.

심경이 복잡했다. 핀의 정보를 얻는 일에 반역이라는 선택지가 끼어들 줄이야.

그래도 어쨌거나, 어느 방향으로 가건 답은 하나였다. 핀을 깨야 한다는 것.

그녀는 어두운 하늘을 보며 가만히 중얼거렸다.

“자유…….”

그리고 뒤를 돌아 연회장의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후궁이라…….”

***

아우라가 테라스에서 나왔을 때 연회는 이미 끝나 있었다. 몇몇 귀족만이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테인 공작과 엘리제도 있었다.

그때 미나가 아우라에게 다가왔다.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선 이미 침실로 드셨습니다. 합궁 준비를 도와드리고 침실로 모시겠습니다.”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하지만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우라는 순순히 시녀들의 안내를 받아 합궁을 준비했다. 황후 대관식 직후의 합궁이라 첫날밤이라고 여겨도 무방했다. 그러나 설렘이나 기대감 따윈 없었다. 목욕은 길고 단장은 번거로울 뿐.

슈미즈를 입으며 아우라는 테라스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각했다.

결정은…… 보류였다. 당장 이센의 손을 잡기보다는 카를 쪽을 좀 더 파고든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았다.

또 당장 오늘 밤이 두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테라스에서 커튼을 쳤을 때 마주쳤던 카를의 눈빛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잠시 후, 아우라가 황후의 방 앞에 섰다.

시녀가 조심히 문을 열었다. 그녀는 중간 복도를 혼자 지나 안쪽 문 앞에 도착했다.

‘화가 난 남자와 밤을 보내야 한다니.’

침을 꿀꺽 삼키곤 마음을 가다듬었다. 카를의 손을 놓고 이센과 춤을 추기로 했을 때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어차피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는 받아들이는 일만 남았을 뿐.

아우라는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섰다. 방 안에는 어슴푸레한 어둠이 깔려 있었다. 군데군데 켜진 촛불만이 희미한 빛을 낼 뿐이었다.

달칵.

뒤에서 문이 닫혔다. 아우라가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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