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2화
악단이 장엄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자세를 바로 하고 단상을 보았다.
대신관과 황제가 단상에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 사이에 놓인 붉은 테이블엔 왕관과 지팡이가 놓여 있었다.
대신관이 지팡이를 잡더니 바닥을 세 번 내리쳤다.
탕- 탕- 탕-
대관식을 시작하는 소리가 예배당에 울려 퍼졌다. 그것을 신호로 예배당 문이 열렸다. 귀족들이 고개를 빼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우라 황자비가 과연 어떤 모습일지 그것만 한 구경거리가 없으니.
그러나 재미있는 광경을 기대하며 고개를 돌린 귀족들은 곧 멍하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아우라는 그들의 기대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얼굴이야 워낙에 유명했지만 곧은 자세라던가 똑바른 시선이 특히 그랬다. 그녀의 그 어디에서도 유폐의 흔적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귀족들은 하나같이 생각했다.
‘제법이네.’
한편, 아우라는 기도했다. 부디 이 선택이 틀리지 않기를. 도망칠 기회를 스스로 버리고 돌아온 이 자리가 그녀에게 핀을 안겨 주기를. 그래야 카를의 곁에 남은 걸 후회하지 않을 테니.
아우라가 천천히 걸어 대신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대신관이 위엄 있게 말했다.
“카사 제국의 황자비 아우라 카사는 이제 두 가지 보물을 받고 황후의 자리에 오르시오.”
그는 가느다란 은지팡이를 들었다. 지팡이는 신의 뜻을, 손잡이에 장식된 백합은 황후를 의미했다.
지팡이가 샹들리에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아우라는 양손으로 그것을 받았다.
다음은 황후의 왕관이었다. 왕관을 내릴 권리는 황권을 수호하는 카를에게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했다.
카를이 왕관에 손을 대는 순간이었다.
벌컥!
별안간 예배당 문이 벌컥 열리더니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카사의 국민은 제니아인 황후를 반대한다!”
“제니아의 핏줄로 카사를 더럽히지 마라!”
“카사는 카사의 핏줄로만!”
때아닌 시위대에 예배당은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어 갔다. 병사들이 나섰지만 쉽게 막을 수가 없었다. 시위대는 워낙 극성이었고, 온 힘을 다해 기사들을 밀쳤다.
검을 꺼낸다면 시위대쯤이야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예배당에선 그 어떤 경우에도 무기 사용과 폭력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시위대는 그 사실을 안다는 듯 겁 없이 들이닥쳤다.
“세상에, 평민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죠?”
“대체 이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저도 이런 일은 처음 봐요.”
놀란 귀족들이 한마디씩 했다. 그러나 놀란 것도 잠시, 그들의 시선이 하나둘 아우라에게 집중됐다. 그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가느다란 여자가 언제 울음을 터트리려나.’
한편 카를은 점점 밀고 들어오는 시위대를 노려보다가 검집을 잡았다. 예배당의 법도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이.
“카를.”
아우라가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어서 왕관을.”
흔들림 없는 그 말에 카를이 검집을 놓고 왕관을 잡았다. 그것을 위로 들어 올리자 시위대가 더 난리를 쳤다.
“안 돼!”
“카사의 피가 더러워집니다, 폐하!”
“아악-! 절대 안 돼!”
카를은 아랑곳하지 않고 왕관을 아우라의 머리에 얹었다. 이로써 대관식은 끝이었다. 이제 아우라는 카사의 황후였다.
“카를, 나를 일으켜 줘.”
카를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난 아우라가 뒤를 돌았다.
“…….”
병사들과 뒤얽힌 시위대는 고작 몇 걸음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그들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우라 왕녀는 물러나라!”
“제니아의 피를 인정할 수 없다!”
시위대가 발악하듯 외쳤다. 보다 못한 기사들이 하나둘 검집에 손을 대려 했다. 그때, 아우라가 손을 들어 기사들을 막았다.
‘예법에서 어긋나는 일이 일어나는 순간, 내가 지는 거야.’
당황하는 병사들, 호기심을 숨기지 않는 귀족들, 외국인 황후를 깔보는 시위대. 그들은 모두 잊은 듯했다. 아우라가 왕녀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는 것을.
아우라의 어머니인 이니아 왕비는 딸에게 종종 여러 가르침을 주곤 했다. 아우라가 평생을 살아갈 힘이 될 가르침을.
“아우라. 왕가의 여자는 평소의 행실이 무척 중요하다. 무슨 일이건 부드럽게 대처하되, 얕보여선 안 되지.”
“음…… 처세는 항상 어려워요.”
“어렵지. 하지만 꼭 해내야 해. 만약 운 나쁘게 국민과 대치하게 된다면 기억해라. 중요한 건 그들에게 느끼게 해 주는 거야. 그들이 마주한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어떤 위치에서 어떤 힘을 가졌는지.”
국민과의 대치라니. 자신에게 과연 그런 일이 일어날까 싶었다. 그녀가 아는 국민이란 언제나 왕실과 왕녀를 사랑했으므로.
이니아 왕비가 아우라의 손을 잡았다.
“아우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왕족은 국민과 싸워선 안 돼. 어디까지나 그들을 다뤄야 한다. 알겠지?”
아우라는 시위대 하나하나와 빠짐없이 눈을 마주쳤다. 당당한 태도와 명철한 눈빛이 그들을 모두 꿰뚫는 듯했다. 그것은 트루 블러드로서 태어나고 자란 이만이 가질 수 있는 기품이기도 했다.
시위대들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아무리 꽥꽥대며 외쳐도 이런 여자에겐 수치를 안겨 줄 수가 없다는 것을.
시위대는 서서히 조용해졌다. 그녀의 시선과 침묵은 귀족들조차도 숨죽이게 했다.
수치심을 주려는 시도가 꺾이자 시위대는 도리어 당황했다. 그들이 우왕좌왕하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병사들이 그들을 끌고 갔다.
“어, 어어……! 이거 놓으시오!”
“놓으시오! 놓으…….”
힘을 잃은 시위대가 허무하게 퇴장했다.
“하아…….”
아우라가 비로소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뱉을 때였다. 귀족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특히 귀족 부인들이 열광이 대단했다. 귀족 부인들이란 그런 종류의 기품에 매혹되기 마련이었다.
“올라와, 아우라.”
카를이 아우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우라는 그 손을 잡고 단상에 올랐다.
비로소 황제 부부가 나란히 서서 사람들을 향해 예를 차렸다. 새로운 황가의 탄생에 귀족들은 더 큰 박수로 화답했다.
***
그 시각, 시위대는 모두 감옥에 갇혔다. 그들은 아직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왜, 왜 말문이 막힌 거지?”
“그 여자 이상해. 어떻게 아무 반응도 안 할 수 있지?”
“마법 같은 거 아니야? 제니아인들 중엔 마법사들이 많잖아.”
“그럴지도 모르지.”
한 남자가 한숨을 푹 쉬곤 작게 말했다.
“그나저나, ‘그분’께서 몰래 황궁 뒷길 문까지 열어 주셨는데 큰일이야.”
“우, 우리는 괜찮은 거겠지?”
시위대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대장급인 남자가 말했다.
“괜찮을 거야. 그분께서 말씀하셨잖아. 아직 황권의 기반이 약해서 국민을 함부로 벌할 수 없다고. 며칠 가뒀다가 풀어 주는 게 고작일 거라고 말이야.”
“맞아. 게다가 우리가 예배당을 부쉈나, 황자비를 울렸나. 한 건 정말 아무것도 없다고.”
그때,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려왔다. 조쉬가 감옥 앞에 오더니 자물쇠를 풀었다.
“석방이다. 가라.”
“네?”
“벌써 말입니까?”
오히려 시위대가 놀라 되물었다. 조쉬가 짜증스레 대답했다.
“그럼 계속 있을 작정이냐?”
“아, 아닙니다. 가겠습니다.”
“갑니다, 가요.”
그들은 구물구물 감옥을 나섰다.
기사단은 시위대를 황궁 후문에서 내쫓았다. 그들은 황궁도 별거 아니라며 싱글벙글 웃으며 떠났다.
조쉬는 기사들에게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따라붙어.”
***
귀족들은 아우라와 카를이 단상에서 내려오자 줄지어 다가와 황제 부부에게 인사를 올렸다. 아우라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카사의 귀족이 이렇게나 많았나 싶었다.
특히 귀족 부인들이 아우라에게 보이는 관심은 지대했다. 동경과 호기심이 섞인 질문들이 쏟아졌고, 아우라는 적당히 대답했다.
귀족과의 인사가 끝나가 그들은 예배당을 떠나 대연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본격적인 연회의 시작은 무도회였다.
아우라는 카를과 춤을 췄다. 내내 별다른 말이 없던 카를이 입을 열었다.
“사람들을 다루는 재미있는 재주가 있던데.”
시위대에 대처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잘했다는 건지 아닌지 도통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검 뽑는 법밖에 모르는 사람은 검부터 뽑는 거고.”
아우라는 칼집에 손을 댄 카를을 조롱하듯 대답했다. 그럼에도 그는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했다.
“아우라. 시위대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아?”
“순혈주의자들이겠지.”
“맞아. 황태자가 집권하는 동안 바퀴벌레처럼 그 수가 늘었어.”
순혈주의자들은 카사의 피만이 우월하다고 여기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평민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분명 그 규모로 미루어 보아 자금을 대는 귀족이 있을 거였다.
카를이 물었다.
“그놈들에게 어떤 벌을 줬으면 좋겠어?”
“네 마음대로 해. 난 이제 관심 없으니.”
“그럼 다 죽일 텐데.”
거짓말 같진 않았다. 그러라고 하면 정말 하나도 남기지 않고 죽일지도 몰랐다.
아우라라고 해서 인자한 마음으로 그들을 용서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국민을 죽이는 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카사인이라고 하더라도.
“죽이진 말고. 그런 벌을 내리기엔 좋은 시기가 아니잖아.”
“지금 내 걱정 하는 거야?”
놀리는 듯한 말에 아우라는 당황했다.
아니라고 말하려는 순간에 음악이 끝났다. 딱히 답을 들으려는 의도는 아니었는지 카를이 그녀를 무도회장 밖으로 이끌었다.
“춤은 여기까지만 해.”
아우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발이 화끈거릴 참이었다.
그들이 막 돌아가려던 때였다.
“형님.”
누군가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환한 웃음을 짓는 금발의 남자는 바로 이센이었다.
“왔구나, 이센.”
카를이 담백하게 인사를 받았다. 이센은 아우라를 보고 구김살 없는 미소를 지었다.
“황자비……. 아니, 황후 폐하. 절 기억하십니까?”
“그럼요, 이센 황자. 여행은 즐거웠나요?”
“네, 무척 즐거웠습니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이센이 아우라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올해로 열아홉 살이 된 이센은 이제야 겨우 소년티를 벗은 듯했다.
“수도에 아주 돌아오신 건가요?”
“당분간은 그럴 예정입니다. 황궁이 그립기도 했고요.”
“이만 앉아서 쉬는 게 좋겠소, 황후.”
카를이 아우라의 손을 잡았다. 그때, 이센도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 혹시 괜찮으시다면 형수님께 한 곡 청하고 싶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