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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1)화 (11/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1화

“반역? 확실해?”

“확실한 정황이 잡혔어. 지금은 일단 지켜보는 중이고.”

가능성이 없지도 않았다. 후궁 출생인 카를이 황제가 됐으니 이센도 못 될 것 없었다. 특히 지금처럼 황권이 자리 잡히지 않은 시기가 기회이긴 할 테니.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론이었다. 아우라가 본 이센은 마음 좋은 소년이었다. 아무리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한들 반역자로 변모할 인물은 못 됐다.

아우라가 비웃듯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 불안증이 심하시네. 멋모르는 제 동생까지 의심하는 걸 보면.”

카를이 받아쳤다.

“네 말이 맞아. 이센은 멋모르는 녀석이지. 문제는 배후가 있다는 거고.”

“배후?”

“죽은 황태자의 패거리 중 하나일 거야. 이센도 그들 중 한 명이었으니.”

아우라는 깜짝 놀랐다. 이센이건 카를이건 카사 황가의 트루 블러드에게 따돌림을 받았다. 그런 이센이 황태자와 가깝게 지냈다니.

그리고 그건 아우라에게 또 다른 기회이기도 했다. 그가 황태자의 패거리였다면 핀에 대해 아는 게 있을지도 몰랐다.

아우라는 조금 더 파고들어 보기로 했다.

“하지만 너도 이센과 꽤 친했잖아. 사이가 틀어진 거야?”

“황좌에 오르자마자 이센이 찾아오더군. 동부 지역의 영토와 통치권을 달라고.”

황제의 형제가 됐으니 그 정도는 요구할 만했다. 황실의 갈등과 반역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래서? 줬어?”

“아니.”

“왜?”

“그 녀석은 그럴 능력이 안 되니까.”

“…….”

“통치를 하고 싶었으면 더러워도 황실에 붙어 있었어야지. 여행을 다닐 게 아니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센이 어린 나이부터 여행을 다녔던 건 일종의 도피였다. 그런 그가 통치술을 제대로 알 리 없었다.

“……그럼 그건 그렇다 치고, 내가 이센과 대화해선 안 되는 이유는?”

“너도 이용당하기에 딱 좋은 위치에 있으니까.”

카를은 이따금 이렇게 아우라의 처지를 확실히 각인시키곤 했다. 외국인에다가 3년을 유폐당해 정신이 불안정한 황후. 반란을 꾀하는 입장에선 이용하기 좋은 먹잇감이라는 것을.

하지만 카를이 그 지점을 짚어 낸다는 건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마치 자신은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것처럼 들렸으니까.

말없이 카를을 쏘아보는 아우라에게 그가 경고하듯 말했다.

“약속해. 이센과 접촉하지 않겠다고.”

아우라는 그늘진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선선히 대답했다.

“그래. 약속할게.”

***

“……괜찮은 걸까?”

조쉬가 휴게실 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테오가 대답했다.

“아닐 것 같은데.”

황자비와 황제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며 휴게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어지는 감감무소식.

“저 안에서 황자비 전하를 칭찬하느라 바쁘신 게 아닐까? 요 며칠 새에 놀라울 정도로 예뻐지셨잖아.”

조쉬가 그 특유의 낙천적인 말투로 말했다. 테오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 그 많은 돈이 아깝지 않을 정도야. 하지만…… 폐하께서 과연 칭찬을 하셨을까?”

카를은 여자와 잘 지낼 만한 타입은 아니었다. 그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오해나 안 사면 다행이었다. 기사단에 몇 없는 유부남인 테오가 보기엔 답답할 따름이었다.

한편 타샤와 미나는 나란히 서 있었다. 타샤는 미나를 흘긋 보았다. 고작 마구간이나 관리하던 아이에게 시녀장 자리를 빼앗기다니. 여러모로 분통이 터지는지라 결국 한마디 뱉고 말았다.

“제니아인들이란…… 천박하긴.”

미나가 손을 꽉 맞잡았다.

‘황자비 전하를 모욕하고 있어.’

타샤는 시침을 딱 떼고 휴게실 문만 응시했다. 미나는 타샤를 흘겨보다가 옷소매의 솔기가 터진 걸 발견했다. 잘 보니 옷깃과 치마 끝단도 색이 바랬다.

‘뭐야. 황제 폐하의 유모면 돈도 많이 벌었을 텐데. 옷 살 돈도 없나?’

미나는 피식, 타샤를 비웃었다.

그때 휴게실 문이 열리고 카를이 나왔다. 시종과 시녀들이 우르르 따라붙었다.

집무실로 향하는 길에 테오가 카를에게 슬쩍 물었다.

“황자비 전하와 무슨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필요한 이야기.”

그랬겠지. 문제는 필요한 이야기‘만’ 했을 것 같은 불안감이었다.

“황자비 전하께서 많이 노력하신 것 같던데, 치하는 하셨지요?”

“아니.”

“폐하, 그럼 지금이라도-”

“하려 했는데 거절하더군.”

“……아.”

“내 마음에 들자고 한 일들이 아닐 테니 내 칭찬도 필요 없는 모양이지.”

그렇게 말하는 카를에겐 서운한 기색 따윈 없었다.

‘차라리 서운해하시는 게 백배는 나은데.’

테오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곤 그 뒤를 따라갔다.

***

대관식의 아침이 밝았다. 황자비의 방은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황후의 정복은 여러모로 갖출 게 많았다. 머리 모양부터 구두까지 예법에 따라야 했다. 미나는 예법서를 봐 가면서 시녀들을 지도했다.

얼추 준비를 마쳤을 때 아우라는 화장대에 앉아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얼굴엔 장밋빛 홍조가 돌았고, 백금발의 윤기도 돌아왔다. 드레스도 아슬아슬하게 맞았다. 어쨌거나 지난 일주일의 노력이 효과를 본 듯했다.

“미나, 오늘 일과를 다시 말해 줘.”

“예. 대신전에서 황후 즉위식을 치르실 것이고 그 이후엔 귀족들의 인사가 이어질 겁니다. 무도회와 식사도 준비되어 있고요. 모든 식이 끝나면 합궁이 있습니다.”

황후 즉위식부터 합궁까지. 길고도 긴 일정이 될 것 같았다. 어느 하나 쉬워 보이는 것도 없었다. 특히 맨정신으로 카를과 한 침대로 가야 한다는 게 그 무엇보다 부담이 됐다.

그때 시녀 하나가 아우라에게 고했다.

“전하,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모셔.”

문이 열리고 카를이 방으로 들어왔다. 날이 날이니만큼 그 역시 정복 차림이었다.

“무슨 일이야?”

“데리러 왔어.”

‘데리러 오기도 하는구나.’

의외의 대답이었지만 예식의 절차가 그러려니 싶었다. 카를은 벽에 등을 기댄 채 거울을 통해 아우라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뭔가가 거슬리나?’

아우라도 자신의 모습을 살폈으나 딱히 부족한 점은 없는 것 같았다. 마침 황실 미용사가 아우라의 머리를 마무리했다.

“다 됐습니다, 전하. 지니고 계신 머리카락과 얼굴색이 고우셔서 크게 손대진 않았습니다. 기품이 넘쳐흐르십니다.”

“고생 많았소.”

아우라는 미용사에게 미소로 화답했다. 그는 짐을 챙겨서 공손히 인사를 하고 나갔다.

미나가 다가와 조용히 언질을 주었다.

“전하,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

“그래.”

아우라가 미나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잠깐만.”

카를이 다가와 아우라의 어깨를 짚었다. 미나가 얼른 뒤로 물러났다.

“발을 좀 봐.”

아우라가 카를을 올려다보았다.

“발은 왜?”

“안 좋잖아.”

역시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애석하게도 발은 다 낫지 않은 상태였다. 오늘 아침에도 황궁의가 와서 붕대를 갈아 주고 갔으니.

“볼 필요 없어. 다 나았어.”

“그건 내가 확인해. 봐.”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우라는 한 번 더 돌려서 거절했다.

“보여 주려면 침대에 앉아서 다리를 뻗어야 해. 이 옷을 입곤 무리야. 발을 올릴 만한 발판도 없고.”

“그럼 그냥 앉아 있어.”

카를은 대뜸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거리낌 없는 행동에 모두가 놀랐다.

시녀들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아내 앞이라도 황제가 무릎을 꿇다니.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불경죄를 짓는 듯했다.

그는 아우라의 발을 들어 구두를 벗겨 냈다. 붕대를 감은 발을 제 무릎에 올리더니 발목을 이리저리 만졌다.

좁혀진 미간과 조심스러운 손길. 그런 것들이 아우라를 혼란스럽게 했다.

‘지난 3년의 고통은 투정으로 치부하면서 고작 발목의 화상은 꼭 보고야 말겠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알 수 없는 남자였다. 모순적이었고, 짐작하기 어려웠으며, 그녀를 끊임없이 당황하게 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곤 있지만.

카를이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대체 누가 이렇게 붕대를 형편없이 감아 놓은 거지?”

“황궁의가 데리고 다니는 보조.”

“잘라야겠군.”

발목의 붓기는 많이 가라앉아 있었지만 피부는 여전히 붉었다. 그는 환부를 손으로 감싸 쥐었다.

“아직 뜨거워. 춤은 나와 한 곡만 추도록 해. 나머지 시간은 앉아서 쉬고.”

카를은 다시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붕대는 마치 피부처럼 발목에 밀착됐다. 내심 놀란 아우라가 물었다.

“이것도 데블라에서 얻은 재주야?”

“죽지 않으려면 익혀야지. 별수 있겠어?”

카를이 그녀의 발에 구두를 다시 신겼다. 그리고 아우라와 눈을 맞췄다.

“약속 지켜. 이센과는 접촉하지 마.”

아우라가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알았어.”

***

대관식은 황궁 대신전 예배당에서 열렸다. 신전은 카사의 귀족과 외국 사절단으로 시끌벅적했다.

귀족들은 아니나 다를까 황후가 될 황자비를 두고 열심히 숙덕거렸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소문이 있던데요?”

“유폐 때문 아니겠어요? 살아 계신 게 용하죠. 모습이 꼭 해골 같다던데 화장으로 가려질지 모르겠어요.”

“저는 너무 걱정됩니다. 안 그래도 황권이 불안정한데 제니아 사람을 황후로 맞는 것도 좀…….”

“누가 이런 위험천만한 자리에 시집을 오겠어요. 뭐, 그래도 아우라 황자비가 트루 블러드긴 하니까요. 나라는 망했어도.”

귀족 여인네들이 까르르 웃었다. 귀빈석에서 그 모습을 보던 이센이 혀를 찼다.

“다들 말들이 너무 심하네요. 안 그래요, 삼촌?”

“황족을 두고 찧고 빻는 게 귀족들 취미인데 뭐.”

곁에 앉은 라이언 대공이 말했다. 그는 카사 최북단 수트라의 통치자이자 전전대 선황의 늦깎이 아들이었다. 고작 스물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카를과 이센의 삼촌인 셈이었다.

“결혼식 이후로 아우라 황자비를 보는 건 처음인데.”

“저도요. 제 기억으로 정말 아름다운 분이었어요.”

“그래? 난 그저 그랬어. 너무 순하고 바른 여자는 재미없달까.”

“하여간 삼촌 취향 진짜 이상해요.”

라이언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기대를 좀 걸어 보는 중이야. 소문이 좀 흉흉해야지.”

“그 소문, 다 저기서 나오는 것 같던데요.”

이센이 사용인들 사이에 앉아 있는 타샤를 가리켰다. 타샤의 주위엔 그녀를 따르는 시녀들이 아직 수두룩했다.

그때 황실 시종장이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부터 황후 대관식을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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