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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0)화 (10/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0화

카를이 영수증을 내려놓았다.

“확인했으니 처리해.”

“……괜찮은 걸까요?”

“뭐가?”

테오가 말을 골랐다. 아우라는 곧 대관식을 치르고 황후가 될 여자였다. 아무리 황제의 보좌관이라 한들 말조심을 해야 옳았다. 하지만 보좌관이야말로 황실 재정을 다루기에 이 영수증의 금액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선대 황후 폐하께서 연회를 앞두고 한 달 동안 쓰신 비용이 이 숫자의 3분의 1 정도 됩니다, 폐하.”

카를이 깃펜을 놀려 서류에 서명을 했다.

“그런데?”

“예?”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건지 모르겠군.”

“……황자비 전하께서 돈을 너무 많이 쓰셨습니다.”

테오는 결국 직언을 던졌다. 카를이 그제야 깃펜을 펜 거치대에 내려놓았다.

“글쎄. 내가 생각하기엔 전혀 많지 않은데.”

“예?”

“아우라 황자비는 3년간 황실 돈을 한 푼도 안 썼잖아.”

“아.”

“선대 황자비들이 3년간 쓴 비용을 계산해 봐. 아우라 황자비가 쓴 돈이 그 비용을 넘길 때 다시 이야기하지.”

상당히 합리적이면서도 하염없이 너그러운 계산법이었다. 테오는 적잖이 놀랐다. 그가 아는 카를은 이런 식의 모순을 보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카를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깃펜을 다시 들었다.

“뭐, 그 많은 돈을 썼으면 기대를 충족시키겠지.”

“예?”

“아니야. 대관식 준비는?”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폐하.”

“말해.”

“이센 전하께서도 참석 의사를 표하셨습니다.”

서류 위를 오가던 카를의 깃펜이 멈칫했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센이?”

카를이 깃펜을 손으로 빙빙 돌렸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빠져 있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우라를 만나야겠군.”

***

밀가루와 꿀, 식물의 기름. 그런 고가의 재료들이 욕탕에서 묽은 죽이 되어 출렁였다. 아우라는 그 안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뺨에는 거즈에 받친 송아지 고기를 올려 둔 채였다. 이 모든 게 푸석한 피부에 영양을 주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귀찮긴 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몸은 미끈거렸고, 얼굴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했으니.

미나가 욕실로 들어섰다. 그녀는 깔끔하고 단정한 드레스를 입고 흰 두건으로 머리를 가리고 있었다.

“전하. 황제 폐하의 방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카를에게서?”

아우라가 눈을 스르르 떴다. 긴 속눈썹이 물기에 젖어 있었다.

“네. 오찬 후에 대관식을 위한 춤 연습이 있으니 대연회장으로 오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겠다고 해.”

“네, 전하.”

미나가 조용히 욕실을 나갔다. 아우라는 한숨을 쉬었다.

‘춤 연습이라.’

아우라가 오른쪽 다리를 들었다. 가는 다리에서 묽은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화상을 입은 곳의 붓기가 아직 상당했다. 산책만 해도 곧잘 화끈거릴 정도였다. 황궁의가 시간이 답이라고 했으니 춤을 출 상태가 아님은 분명했다.

하지만 카를에게 비협조적으로 굴 때가 아니었다.

그는 약속대로 제니아인들을 일반 시민으로 올렸다. 그 과정에서 대신들의 엄청난 반대가 있었지만 모두 묵살했다고 했다.

‘사교댄스를 연습하긴 해야지. 너무 오랜만에 추는 거니까.’

대관식에서 어설프게 몸을 움직이고 싶진 않았다. 그랬다간 귀족 부인들 사이에서 무슨 소문이 떠돌지 뻔했다.

“……그만해도 되겠어.”

그 말에 시녀들이 뺨에서 송아지 고기를 치웠다. 양 뺨에 자연스러운 분홍빛 생기가 돌았다.

아우라는 식사 후 옷을 골랐다. 발목의 붕대와 마른 몸을 가리기 위해 긴 엠파이어 드레스를 골랐다. 겨울에 어울리는 옷은 아니었으나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무도회장은 대연회장 한편에 있었다. 그곳엔 카를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타샤와 조쉬, 테오 등의 얼굴이 이젠 익숙했다.

그리고 카를.

그는 무도회장 가운데서 아우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의 햇빛이 그의 셔츠며 얼굴을 은은하게 적셨다.

카를이 말없이 손을 내밀었고, 아우라도 말없이 그 손을 잡았다. 딱히 오가는 미소도, 의례적인 인사도 없었다. 눈치 빠른 테오가 악단에게 눈짓을 하자 바로 연주가 시작되었다.

다행히 아우라의 몸이 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카를의 리드를 곧잘 따라갔다.

“…….”

카를의 시선이 아우라의 많은 곳을 훑었다. 또렷한 눈동자와 생기가 도는 뺨, 슬슬 윤이 도는 머릿결과 다행히 흉터를 남기지 않고 사라진 목의 상처까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직선적인 시선에 아우라는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기회라면 기회였다. 그가 눈치채지 못하는 선에서 핀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했다.

“대관식이 끝나면…… 난 황후의 방을 쓰는 거야?”

“그래야지. 그 방 정리도 끝났으니 미리 옮기고 싶으면 옮겨.”

“아니야. 대관식 마치고 갈게. 그게 예법에 맞으니까.”

그가 좋을 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라가 자연스럽게 물었다.

“너는?”

“…….”

“집무실 정리는 다 끝났어? 황태자가 썼던 집무실을 그대로 쓰는 거고?”

“응.”

황태자는 선황을 대신해 황제의 집무실을 썼었다. 아우라는 그 집무실에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황태자가 그곳에 핀을 뒀다면…… 카를이 발견했을 거야.’

카를의 성격상 황태자의 물건을 샅샅이 뒤졌을 거다. 수정구는 함부로 버릴 물건이 아니니 일단 보관을 했을 테고. 문제는 카를이 그 수정구의 정체를 아느냐는 거였다.

알고 있다면, 절대 아우라에게 내어 주지 않을 테니까.

어쨌건 답은 하나였다. 카를의 집무실로 갈 만한 핑계를 만드는 것. 지금 당장은 부자연스럽지만 황후로서 일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생각이 많네.”

카를이 말했다. 아우라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우라의 등을 잡고 있던 카를의 손이 그녀의 날개뼈를 감쌌다. 툭 튀어나온 날개뼈에 살집이라곤 없었다.

“많이 좀 먹어야겠어.”

“먹고 있어.”

그의 손이 천천히 내려와 이번에는 갈비뼈를 훑었다. 그녀가 숨을 들이마시건 내쉬건 갈비뼈가 그대로 만져졌다.

아우라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자꾸만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안센나로 도망가기 직전 침대로 카를을 끌어들였던 날. 그때 몸을 더듬던 손길과 목소리. 괜찮아, 괜찮아. 그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했다.

아우라는 애써 머리를 비웠다. 그런 그녀를 돕듯 카를이 사무적으로 말했다.

“대관식까지 앞으로 사흘이야. 앙상한 모습을 보이면 온갖 소문이 다 돌겠지. 지금도 썩 좋은 소문이 도는 것 같진 않던데.”

“춤 연습이 아니라 잔소리하려고 불렀어?”

“칭찬이 필요해?”

“거절할게.”

아우라가 딱 잘라 말했다. 어쨌거나 그녀는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었기에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난 충분히 먹고 있어. 더 먹었다간 탈이 날 거야.”

카를이 방향을 크게 틀었다. 아우라는 발목이 순간 화끈거렸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낫지.”

카를이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데블라에서 많이 봤으니까. 차라리 마물에게 당하는 게 나아.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는데 숨 끊어지는 데엔 시간이 꽤 걸리거든.”

카를은 끔찍한 소리를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게다가 그렇게 죽은 이들 중엔 부하도 있을 텐데.

“내가 죽었으면 어땠을 것 같은데?”

“그게 무슨 소리지?”

“내가…… 네가 준 검으로 탑에서 죽어 버렸을 수도 있잖아.”

‘네가 바랐던 대로.’

아우라는 차마 뒷말은 붙이지 못했다.

카를이 아우라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별수 있어? 나약한 것까지 내가 어떻게 해 줄 순 없잖아.”

“모순적이잖아. 날 지키려고 반역까지 일으키셨다면서.”

“그렇게 해서-”

카를이 움직임을 멈췄다. 황제가 갑자기 춤을 그만두자 악단도 눈치를 보며 연주를 그쳤다. 적막 속에서 카를이 말했다.

“살아서 여기 내 앞에 있잖아. 그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해.”

“…….”

“그러니 아우라, 투정은 이제 그만 부려. 넌 어쨌거나 3년간 안전한 곳에서 있었잖아.”

안전한 곳.

아우라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발목에서 불길이 확 이는 듯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설명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아니, 설명한다고 해도 이 남자는 똑같은 얼굴로 똑같은 말을 할 것 같았다. 알았으니 투정은 이제 그만 부리라고.

아우라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춤은 충분히 연습한 것 같아. 그만할래.”

“아직 할 말이 남았어.”

“난 끝났어. 가.”

아우라는 연회장에 딸린 휴게실로 들어가 버렸다. 기분은 둘째 치더라도 발목이 아파서 더는 무리였다.

아우라는 소파에 앉아 오른발을 올렸다. 신발을 벗고 붕대를 손으로 감싸 보니 홧홧한 기운이 느껴졌다.

‘돌아가면 찜질부터 해야겠군.’

똑똑.

노크 소리에 아우라가 얼른 치마로 발목을 덮었다. 문이 열리더니 카를이 들어왔다. 아우라는 태연하게 신발을 꿰신으며 물었다.

“또 무슨 일이야?”

카를은 대답도 없이 아우라의 발을 물끄러미 보았다.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

발목 때문에 춤 연습을 멈췄다는 걸 안다면 또 투정을 부린다고 말할지도 몰랐다.

다행히 그는 그녀의 발목에서 시선을 거뒀다. 그런 사소한 부상은 자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대신 그는 의외의 이름을 꺼냈다.

“대관식에 이센이 올 거야.”

이센 카사. 그는 카를의 이복동생이자 후궁 출신의 막내 황자였다.

아우라는 결혼식에서 딱 한 번 이센을 봤다. 붙임성이 좋고 귀여운 미소년으로 어머니와 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결혼식이 끝나고 그는 다시 여행을 떠났다.

카를은 형제들 중 유일하게 이센을 살려 두었다. 애초에 이센은 황위 계승엔 관심이 없었고, 그와 유일하게 친분을 나눈 형제기 때문이었다. 친분이라고 해 봤자 대화를 나누는 것 정도였지만.

“이센이 황궁으로 돌아왔어?”

“그래. 아우라, 대관식에서 이센과 접촉하지 않도록 해.”

“왜?”

카를이 한 걸음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 녀석, 반역을 꾀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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