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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9)화 (9/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9화

낡은 마차가 황궁의 본궁 앞에 멈췄다. 기다리고 있던 궁인들이 술렁거렸다. 말을 타고 떠났던 황제가 마차를 타고 돌아온 걸 보아 도망친 황자비를 데려온 것 같았다.

시종이 문을 열자 먼저 카를이 내렸다. 뒤이어 아우라가 그의 손을 잡고 따라 내렸다. 그녀는 카를과 똑같은 모피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카를이 보좌관인 테오에게 물었다.

“황궁엔 별일 없었나?”

“네, 없었습니다.”

“폐하.”

아우라가 카를을 불렀다. 사람들이 일제히 그녀에게 집중했다. 카를 역시 물끄러미 그녀를 보았다. 그를 ‘폐하’라고 칭한 건 처음이었으므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보는 눈을 의식한 듯 격식을 갖춘 존댓말도.

“……하시오.”

“제 방의 사람을 좀 바꾸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 말에 카를이 구석에 서 있는 타샤를 흘긋 보았다. 그녀는 아우라가 돌아온 것에 실망감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카를에게 있어 타샤는 그 의미가 특별했다. 아니, 특별해 보였다. 다들 타샤를 카를의 어머니라고 생각하니까.

아우라는 선택지를 던진 셈이었다. 아우라가 타샤를 쫓아내게 해서 권위를 세워 주느냐, 그것을 막고 타샤의 체면을 세워 주느냐.

카를이 피식 웃더니 돌아섰다. 고작 그런 걸 묻느냐는 듯.

“뜻대로 하시오.”

“그러겠습니다.”

“피곤하군.”

카를이 테오와 조쉬를 데리고 본궁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이제 아우라와 타샤를 번갈아 보았다.

아우라는 천천히 타샤에게 다가갔다. 타샤는 모피 망토 사이로 드러난 아우라의 옷깃을 유심히 보았다. 옷깃엔 제니아의 전통 문양이 바느질되어 있었다.

아우라가 싱긋 웃으며 타샤에게 말했다.

“자네는 이제 내 방에서 나가는 게 좋겠어.”

곧 황후가 될 황자비의 방에서 쫓겨난다는 것. 그것은 시녀장의 자리에서 쫓겨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

다음 날.

타샤는 얌전하게 시녀장의 자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바로 황제의 방으로 귀속되었다. 그곳에서 그녀가 할 일은 전혀 없었으나 그것이 자존심을 지킬 유일한 방안이었다.

한편, 황자비의 방에 생각지도 못한 물건들이 들어왔다. 아우라가 제니아에서 가져온 책과 드레스, 보석들이었다.

시종을 이끌고 온 테오가 아우라에게 공손하게 예의를 차렸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황제 폐하의 보좌관 테오 실란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테오.”

내색은 안 했지만 아우라는 테오의 소문을 이미 들었다. 실란 가문은 대대로 훌륭한 기사를 배출한 명문가였다. 테오도 카를을 기사로서 모셨지만, 머리가 좋고 눈치가 빨라 수석 보좌관에 임명되었다고 했다.

확실히 그는 조쉬와 달리 퍽 점잖아 보였다. 다만 그 공손함 속엔 아우라에 대한 경계가 깔려 있었다. 그녀가 제 주군에게 득이 되는지 해가 되는지 아직 판단하지 못한 듯했다.

그렇다 한들 아우라는 굳이 카를의 부하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들도 언젠가 알게 될 테니. 그녀와 카를이 서로에게 득이 될 운명은 아니라는 것을.

아우라는 시종이 내려놓은 물건을 살펴보며 물었다.

“이건 다 어디에 보관하고 있었나요?”

“황제 폐하께서 따로 보관하고 계셨습니다. 물건이 맞는지 확인해 주십시오.”

테오는 교묘하게 대답을 피했다. 이 많은 물건의 보관 장소까진 말해 줄 수 없다는 듯이.

아우라는 더 추궁하지 않고 보석함을 열었다. 오랜만에 보는 장신구들을 손끝으로 쓸었다.

‘영영 잃어버리는 줄 알았는데.’

대부분 제니아에서 가져온 보석들이었다. 그녀는 검소했으므로, 대부분 선물 받거나 특별하게 사들인 것들이었다.

각각의 보석에는 이런저런 추억들이 담겨 있었다. 이제는 추억과 관계없이 이용해야 할 자금에 불과하지만.

아우라가 보석함을 탁, 닫았다.

“황제 폐하께 무척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테오.”

그날 오후.

아우라는 한 시녀를 수소문해서 찾았다. 지난 3년간 북쪽 탑을 관리한 시녀였다.

유폐는 끔찍했지만 그중에서도 식사는 더는 떠올리기 싫을 정도였다. 식사는 철문 바닥의 배식구를 통해 하루 한 번씩 들어왔었다. 그마저도 반쯤 썩어 있어 아우라는 자주 배앓이를 했다.

그런 아우라를 살린 건 접시 밑에 깔린 진통제였다. 시녀가 경비병 몰래 넣어 준 것이었다.

부름을 받은 시녀가 황자비의 방에 들어왔다.

“부, 부르셨습니까.”

“손을 좀 보고 싶은데.”

“예?”

“손 말이야.”

“아…… 예.”

시녀가 어색하게 손을 내밀었다. 투박하고 손톱이 짧은 손. 배식구를 통해 봤던 그 손이 맞았다.

아우라는 그제야 시녀의 얼굴을 살폈다. 시녀는 얼굴이 둥글고 주근깨가 많았다. 밝은 주황빛 머리는 더러운 두건으로 가리고 있었다.

‘저렇게 생겼었군.’

아우라의 시선에 시녀는 어쩔 줄 모르며 허리만 더 깊이 숙였다.

“이름이 뭐지?”

“미나 소넷입니다.”

“소넷이라. 처음 들어 보는 성인데.”

“그, 그러실 겁니다. 고향이 워낙 시골이라…….”

“뭐, 그렇겠지.”

아우라는 테이블에 둔 보석함을 열어 녹색 반지를 꺼냈다.

“가져가. 그동안 날 돌보느라 고생했으니.”

“가, 감사합니다.”

미나는 반지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양손을 내밀었다. 아우라가 그 떨리는 손에 반지를 떨어뜨렸다.

“내가 탑에 없으니 이젠 그곳에서 할 일은 없을 테고. 지금은 무슨 일을 하지?”

“마구간에서 여물을 주고 있습니다.”

말 관리는 시녀의 보직 중 가장 하급이었다. 이렇다 할 뒷배도, 잡은 끈도 없는 듯했다.

“잘됐군. 미나, 네게 시녀장을 맡기려 해.”

“……예?”

미나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둥그렇게 뜬 눈이 제법 크고 귀여웠다.

“시, 시녀장이요? 저, 저, 저는……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왜지? 말 여물 주는 것보단 나을 텐데.”

“제, 제발 명령을 거둬 주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미나가 대뜸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이유는 알곤 있었다. 지금 황궁엔 그녀에 대한 소문이 가득했다.

다들 아우라가 오랜 유폐 생활로 미쳤다고 했다. 시녀장을 익사시키려 한 것도 모자라 다른 시녀의 눈알까지 뽑으려 했다고 말이다.

“고개를 들어, 미나.”

미나가 덜덜 떨며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겁을 먹은 건지 뺨에는 눈물이 주룩 흘렀다.

“내가 유폐되어 있을 때, 넌 왜 나를 도왔지?”

“그게…… 실은 제 외할머니께서 제니아인이십니다. 그래서 차마 그냥 둘 수가…….”

그 말을 들어서였을까. 미나에게서 제니아인의 분위기가 은근히 풍기는 것 같았다.

“제, 제게는 동생이 셋이나 있어요.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셔서 그 애들에겐 제가 전부예요. 제가 잘못되면 제 동생들은 큰일 나요. 제발, 제발…… 절 보내 주세요…….”

“이래서야. 말이 안 통하는군.”

아우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보석함을 다시 열었다. 이윽고 미나의 앞에 반지 세 개가 놓였다.

“이건 네 동생들 몫이야. 말 여물 줘 가면서 보내는 돈보다야 많겠지.”

많은 정도가 아니었다. 그녀가 평생 일해도 살 수 없는 것들이었다.

미나는 물끄러미 아우라를 보았다. 그녀의 눈에 아우라는 악마 같기도, 천사 같기도 했다.

“동생이라……. 동생들은 뭘 하지?”

“마, 막내 쌍둥이들은 너무 어려서 고모님이 돌봐 주시고, 첫째 남동생은 시골 학교에서 마법학을 배워요.”

“마법학?”

아우라가 눈이 빛내며 되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나이는?”

“열아홉 살입니다. 처, 철은 좀 없지만 뛰어난 아이입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해서든 공부를 시키고 있어요.”

‘마법학을 공부하는 뛰어난 학생이라.’

“그럼 이건 어때? 황립 아카데미에 마법학과가 있어. 평민도 입학 가능하지. 내가 추천서를 써 줄 테니 수도로 올려 보내서 공부를 시키도록 해.”

미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황립 아카데미라니. 동생의 인생에 다시 안 올 기회였다.

아우라가 손을 내밀었다.

“미나. 나는 네가 구한 사람이야. 네가 충성만 보여 준다면…… 네 동생들은 편히 살 수 있도록 살펴 주마.”

동생들을 살펴 준다는 말. 그 말에 미나의 눈물이 그쳤다.

이 하얀 손의 주인은 소문만큼 미친 것 같진 않았다. 아무리 봐도 보통 사람은 아닌 듯했지만.

미나는 입술을 꾹 물더니 반지를 그러모았다. 그리고 아우라의 손을 잡고 머리를 조아렸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황자비 전하.”

아우라가 미소를 지으며 미나를 일으켰다. 어느새 단단하게 빛나는 미나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일주일 후가 대관식이야. 할 일이 아주 많아. 한 번만 말할 거니까 잘 들어 둬.”

“예, 전하.”

“이제부터 아침저녁으로 목욕을 할 거야. 욕조엔 물 대신 밀가루와 꿀, 식물의 기름을 섞어서 가득 채워. 그리고 목욕할 때마다 갓 자른 어린 송아지의 생고기를 준비하도록 해.” 

그건 제니아 왕가의 미용법이었다. 카사에서는 생경한 조합이기에 미나는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뇌었다.

“또 식사는 올리브와 육류 위주로 하되 진한 포도 주스를 곁들이는 걸로. 그게 살이 오르는 가장 빠른 방법이니까.”

“예, 준비하겠습니다.”

“나가 봐.”

“그리고 미나.”

“예, 전하.”

“동생이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대로 내게 데려와.”

동생을 데려오란 말에 미나가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허리를 공손하게 숙여 보이곤 방을 나섰다.

기대 이상의 소득이었다. 충성스러운 시녀장과 마법학을 배우는 학생. 특히 미나의 남동생을 잘만 이용하면 핀의 봉인을 푸는 방법을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마법사들이 마력을 되찾는다면 제니아도 다시 살아날 수 있을 테고, 그럼 아우라도 어떻게든 카사 황궁을 떠날 수 있었다.

‘물론 그 전에 얌전히 대관식을 치러야 하겠지만.’

아우라가 거울을 보았다. 여전히 낯빛이 나쁘고 뼈가 앙상했다. 이 꼴로 대관식을 치르면 웃음거리가 될 게 뻔했다.

‘앞으로 일주일…….’

그녀는 스스로를 격려하듯 말했다.

“그래. 한번 해 보자.”

***

사흘 후.

황제의 집무실에 테오가 들어섰다. 그는 업무를 보고 있는 카를의 책상에 뭔가를 슬쩍 올려놓았다.

“뭔가?”

“황자비 전하께서 지난 사흘간 쓰신 돈의 영수증입니다.”

카를이 무심하게 영수증을 보았다. 그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영수증엔 실로 어마어마한 금액이 청구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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