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8화
루안은 창고의 발코니에서 몸을 숨기고 밖을 내려다보았다. 황제가 기절한 아우라를 안은 채 자경단에게 뭔가를 급히 명령했다.
잠시 후, 자경단이 마차를 가져왔다. 황제와 아우라는 그렇게 마차를 타고 유유히 안센나를 떠났다.
루안은 그제야 아우라가 그런 짓을 한 이유를 알았다.
아우라는 마치 몰락한 국민의 곁에서 죽으려 한 긍지 있는 왕녀처럼 보였다. 황제는 더는 아우라가 안센나에 온 이유를 추궁하지 않을 거였다. 핀을 찾기 위해 황궁에 가는 아우라로선 최선의 선택이었다.
아우라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걸 빼면.
그러므로 그건 루안에겐 최악의 결정이었다. 그녀의 추락을 막지 못했다는 것까지.
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손바닥을 펼쳐 보았다.
‘마법만 쓸 수 있었다면…….’
마력을 잃은 후 차선책으로 검술을 치열하게 익혔다. 고위 귀족 출신인 그는 원래도 검술에 능했기에 곧 뛰어난 기사가 되었다. 하지만 마법만큼 쓸모 있진 않았다. 특히 누군가를 지키는 데에 있어서는.
잠시 후, 자경단원들이 창고로 올라왔다.
“대장, 여기서 뭘 하고 계세요?”
“그래요. 왕녀님과 황제도 떠났는데.”
루안이 그들에게 물었다.
“뒤탈은 없었고?”
“네. 다행히 왕녀님만 데리고 떠났어요. 우리에게 뭘 따질 경황도 없어 보이던데요.”
“황제가 직접 올 줄은 몰랐어요. 간담이 서늘해서 원.”
“대장, 이제 어떻게 할 겁니까?”
자경단원이 그의 앞에 앉아 심각하게 물었다.
“기회가 되는 대로 황궁에 잠입해서 핀을 찾아보기로 했잖아요.”
루안은 마른세수를 했다.
“그 계획은 일단 미뤄 둬.”
“역시 왕녀님께서 직접 움직여 주시는 건가요?”
루안이 고개를 저었다.
“말조심해. 그런 소문이 돌면 아우라. 아니, 왕녀님께서 위험해지시니까. 다들 입단속부터 시켜.”
“아, 네. 알겠습니다, 대장.”
자경단원들이 기대를 거는 것도 이해가 갔다. 누군가가 황실의 일원이 된 건 핀을 찾을 절호의 기회이긴 했다. 그 위험한 일을 할 누군가가 아우라라는 게 문제지만.
루안은 문득 아우라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 너도 와서 날 도와줘.’
루안이 주먹을 꽉 쥐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다들 핀에 대해서는 잊고 있어. 함부로 움직였다간 일이 틀어져.”
“네, 대장.”
“알겠습니다.”
루안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 속에서 금단추 두 개를 잡았다가 하나만 꺼냈다.
“일단 이걸로 빈민들 장사 밑천을 좀 마련해.”
“그, 금 아닙니까? 왕녀님께서 주고 가셨군요!”
“맞지만 비밀로 해. 왕녀님은 여기에 죽으러 왔다가 실패해서 떠난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아…….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난 이제 여길 떠날 거야. 안센나는 너희에게 맡긴다.”
“……예?”
“갑자기요? 어디로 가시는데요?”
루안이 발코니 밖을 내다보았다. 안센나 너머로 펼쳐진 평야가 아득했다.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황궁으로.”
***
덜컹.
마차의 흔들림에 아우라가 눈을 떴다.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놀란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아.”
옆에는 카를이 앉아 있었다. 아마도 지금까지 그의 무릎을 베고 잠들어 있었던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우라는 치맛단을 꽉 쥐었다.
‘속았을까?’
아직 밖이 밝은 걸로 보아 바로 안센나를 떠난 것 같긴 했다. 제니아인들에게 불똥이 튄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안심할 순 없었다.
“내가 그렇게 믿음직했나?”
카를이 의미 모를 질문을 던졌다. 아우라는 눈만 깜빡였다.
“목숨을 걸고 뛰어내릴 정도로?”
“…….”
“아니면 정말 죽으려고 한 건가?”
이제야 그 질문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정말 믿었냐고 묻는 거라면, 믿었다. 그걸 믿고 이 눈속임을 시도한 것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대답해야 했다.
아우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죽으려 했다는 의미였다.
카를이 아우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우라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의 손이 아우라의 목을 감았다. 그리고 그녀가 조쉬를 위협하며 메스로 찔렀던 부분을 엄지로 쓸었다. 따끔한 느낌에 아우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정신으로 도망을 쳤지? 죽을 때까지 숨어 있는 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죽으려고 한 거야.”
그가 물끄러미 아우라를 보았다. 아우라가 정신을 잃기 전에 보았던 분노. 그런 것들이 그의 눈에 응축되어 있었다.
“굳이 나와 같이 밤을 보낸 건?”
“널 상처 주고 싶어서. 보아하니 성공한 것 같은데?”
그는 아니라고 하는 대신 서늘한 웃음을 지었다.
“안센나까지 가면서 잘 생각해 봤는데…… 황궁으로 돌아가면 네 주위의 경비를 좀 늘릴까 봐.”
“…….”
“아니면 널 위한 공간을 따로 마련하는 것도 좋겠지. 굳이 탑이 아니더라도.”
‘가두기라도 하겠다는 소리인가.’
아우라는 간담이 서늘했다. 그저 겁을 주기 위한 농담인지, 아니면 진담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벼랑 끝에 몰린 기분이었다. 뒤에는 낭떠러지, 눈앞에는 카를.
게다가 핀은 황궁에 있다고 했다. 게다가 황태자가 가졌던 것이라면…….
‘지금은 높은 확률로 카를에게 있어.’
아무리 따져 봐도 그녀의 답은 하나였다.
카를 카사. 그가 지금 아우라에게 보이는 일종의 집념. 나쁘게 말하면 소유욕.
아우라는 바로 저 마음을 이용해야 했다. 적당한 거리에서 이 관계를 당기고, 혹은 밀어내면서.
아우라가 카를의 팔을 잡았다.
“대관식이 언제라고 했지?”
의외의 질문에 그가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황후가 될게. 네가 바라는 대로.”
그 순간 카를이 그녀를 천천히 끌어당겼다. 점점 다가오는 새카만 눈동자가 그녀의 배 속까지 훑는 듯했다.
서로의 숨결이 섞일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그가 물었다.
“무슨 꿍꿍이야?”
“……하랄 땐 언제고. 꿍꿍이라니.”
“죽어도 싫다며. 그래서 안센나까지 간 거 아니었어?”
그의 엄지가 자꾸만 목의 상처를 지분거렸다. 아우라는 그 통증을 참으며 카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안센나에서 제니아인들과 어떤 작당을 했지?”
역시,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안 했어. 보기만 했지. 그 비참한 모습들을.”
“그래서, 불쌍한 그들을 두고 죽으려 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잖아.”
아우라가 카를의 손등을 잡았다.
“뭔가를 해 줄 수 있는 건 카를 황제 폐하시고.”
“날 증오한다면서, 이용은 해야겠다?”
“보아하니 넌 내가 어딜 가도 쫓아와 끌고 갈 것 같아서. 죽으려 하는 것도 살려 가면서.”
아우라의 눈꼬리가 살짝 휘어졌다.
“그래서 널 좀 이용하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나빠?”
‘그래서 아쉬운 대로 그 핏줄이라도 써야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나빠?’
언젠가 카를이 아우라에게 했던 말. 그녀는 그걸 그대로 돌려주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를 테지만 어차피 무슨 말을 하건 벼랑 끝인 건 똑같았다. 그러니 던질 수 있는 건 다 던져 볼 생각이었다.
“제니아인들을 2등 시민에서 일반 시민으로 올려 줘. 보통의 카사인처럼. 그것만 약속해 주면 얌전히 황궁에 있을게.”
갓 황좌에 오른 카를에겐 부담스러운 제안이었다. 제니아인들을 챙기는 만큼 카사인들의 불만을 살 테니.
카를이 손목을 돌려 아우라의 손을 잡았다.
“내가 널 어떻게 믿을 수 있지?”
“…….”
“네가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겠냐고 물었어.”
합리적인 질문이었다. 또한 아우라의 제안에 대한 조건부 수락이기도 했다. 떠나지 않는다는 확신만 준다면 제니아인들을 일반 시민으로 올려 준다는.
아우라가 그의 귓불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말해 봐.”
“첫째는 아까 말했던 것처럼 너에게서 벗어나긴 그른 것 같다는 거고.”
“그리고?”
“둘째는…… 너에게 상처 주는 일 말이야. 그거, 나름대로 즐거워서 계속해 보려고.”
“…….”
“어때. 싫어?”
아우라가 카를의 귀를 놓았다. 어느새 귓불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카를이 그녀에게 다가와 입을 맞췄다. 아우라는 순간 놀랐지만 체념하듯 길을 열어 주었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머금은 채 혀로 그녀의 입안을 쓸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아우라를 바라보는 시선, 그 꿰뚫는 듯한 시선과는 다르게 입맞춤 자체는 부드러웠다.
그 짧은 입맞춤 끝에 카를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해 보자.”
“…….”
“나도 싫지 않거든. 너도, 네가 날 상처 주는 방식도.”
순간 아우라의 등에 소름이 번졌다. 그는 마치 아우라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설사 그녀가 그를 증오한다고 하더라도.
카를은 자신의 셔츠 깃 속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힘주어 당기니 줄이 뚝 하고 끊어졌다. 목걸이에는 두 개의 반지가 매달려 있었다.
“이건…….”
“기억은 하는 모양이지?”
잊었을 리 없었다. 그건 그들의 결혼반지였으니.
‘유폐될 때 병사들에게 빼앗겼는데…….’
어떻게 반지를 가져온 건지 카를은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아우라의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한때는 꼭 맞던 반지가 지금은 헐렁했다.
‘이걸 카를이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손을 반지에 맞추도록 해. 대관식까지 일주일이 남았으니까.”
“……일주일 안에는 불가능해.”
아우라가 손을 보며 중얼거렸다.
결혼반지를 다시 끼게 될 줄은 몰랐다. 볼품없는 손가락에 걸쳐진 반짝이는 반지가 어색했고, 이상하게도 울컥했다.
‘아니. 할 거면 제대로 하자. 대외적으로는 그럴듯한 황후가 되어야 해.’
아우라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 쥐었다.
“……그래도 노력은 해 볼게.”
“좋아. 그러도록 해.”
카를은 그 대답에 만족했는지 아우라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 이마에 손등을 대고 눈을 감았다. 그는 기도하고 있었다.
창밖으로 해가 져 가고 있었다. 석양이 그의 어깨와 한쪽 뺨을 물들였다.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것만 같았다.
카를이 눈을 떴다. 아우라는 손을 슬쩍 빼며 물었다.
“무슨 기도를 했어?”
카를이 미소를 지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 알려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