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7)화 (7/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7화

아우라가 당황해서 고개를 저었다.

“넌 제니아인들을 챙겨야지.”

“아니, 내가 챙길 사람은 너야.”

“루안.”

“제발. 날 두 번이나 후회하게 하지 마.”

거절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비단 제니아인들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만약 일이 잘못돼 황실군에게 잡히면? 카를은 루안부터 가만두지 않을 거다.

하지만 오랜 외로움과 고통 때문이었을까. 아우라도 루안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자경단은? 자경단은 어쩌고?”

“내 자리를 채울 인력 정도는 있어.”

그의 녹색 눈동자가 단단하게 빛났다. 온화하고 믿음직한 눈빛이었다. 아우라는 망설임 끝에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래. 함께 가자, 루안.”

***

루안은 자경단 수뇌부들을 설득했다. 그들 역시 아우라가 루안과 몸을 피하길 바랐다. 그들에게 아우라는 꼭 살아야 하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아우라는 지부 앞에서 자경단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상황이 정리되면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 역시.

저쪽에서 루안이 말 두 마리를 끌고 나왔다.

루안이 손을 내밀었다. 아우라가 말에 오르기 위해 그 손을 잡았을 때였다.

“아우라 왕녀님!”

누군가가 그들을 향해 뛰어왔다. 시장에서 빵을 훔쳤던 남자였다.

‘저 남자…… 설마 아까 날 알아본 건가?’

그의 곁에는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도 있었다. 노인은 대뜸 아우라에게 울며 외쳤다.

“왕녀님! 제발 마법사들을 살려 주십시오!”

“이봐! 갑자기 무슨 짓이야!”

자경단원이 노인을 막았다. 노인은 그에게 붙들린 채 연신 외쳤다. 제발, 제발 마법사들을 살려 달라고.

“루안. 저게 대체 무슨 말이야? 마법사들을 살려 달라니?”

아우라가 묻자 루안은 난감한 얼굴로 그녀를 말에 태우려 했다.

“신경 쓰지 마. 어서 말에 오르자.”

“루안.”

“지금은 해결 못 해. 가면서 설명할게.”

뭔가 이상했다. 아우라는 루안의 손을 놓고 자경단원에게 말했다.

“그를 놔줘요.”

자경단원은 하는 수 없이 노인을 놓아주었다. 노인은 바닥에 엎드려 빌었다.

“아우라 왕녀님. 제발 부탁입니다…….”

“차근차근히 말하세요. 듣고 있으니.”

노인이 고개를 들고 아우라를 우러러보았다. 그의 눈에는 눈물과 절실함이 가득했다.

“저는 제니아의 마법사였습니다만, 3년 전 정체 모를 마법사에게 마력을 빼앗겼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제니아의 모든 마법사가 말입니다!”

“마력을 뺏겼다고? 대체 어떻게?!”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제니아 국력의 기반인 마법을 빼앗겼다니. 그것도 모든 마법사가?

“왕녀님, 다행히도 목격자가 있습니다.”

“목격자?”

“네. 제니아가 점령당하기 며칠 전, 카사의 황태자가 웬 마법사와 함께 수도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들은 수정구에 저희의 마력을 모두 끌어 담고는 떠났습니다.”

“고작 수정구에? 그게 그렇게 쉬웠을 리가!”

“저, 저희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제니아의 마법은 절대 아니고, 이국의 마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우라는 그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됐다. 제니아가 이상할 정도로 쉽게 멸망한 것도, 힘없이 노예가 된 것도.

노인의 거친 손이 아우라의 손을 부여잡았다.

“왕녀님, 그들은 그 수정구를 ‘핀’이라고 불렀습니다.”

“‘핀’이라고……. 그래서? 그 수정구라는 건 어디 있지?”

“황궁에 있을 겁니다. 황태자가 가져갔으니까요. 제발, 제발 핀을 찾아서 그 봉인을 풀어 주십시오!”

황궁.

그 말에 아우라의 머릿속에 아득해졌다. 충격을 받은 아우라의 손목을 루안이 끌어당겼다.

“아우라, 괜한 생각 하지 마. 일단 지금은…….”

“루안. 너도 그럼 마력을 잃은 거야?”

루안은 대답하지 못했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아우라가 울컥했다.

“그런 일이 있으면 내게 말을 했어야지! 대체 무슨 생각으로!”

“네가 황궁에서 도망쳤으니까.”

루안이 참담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 겨우 황궁을 벗어난 네게……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아우라는 루안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이미 너무 많은 고생을 했다. 루안은 그녀에게 더는 짐을 지우기 싫었을 것이다.

“아우라, 핀은 우리 자경단이 조사하는 중이야. 넌 일단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해.”

“대장님! 대장님!”

저 멀리서 자경단원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대장님! 황실군이 쳐들어왔습니다. 곧 여기까지 들이닥칠 겁니다!”

“이런. 아우라! 어서 가자.”

루안이 아우라를 끌어당겼다. 자경단원이 덧붙였다.

“빨리 가셔야 합니다. 황제가 직접 왔다고 합니다.”

“뭐? 카를이?”

아우라가 놀라 되물었다.

이렇게 불안정한 시기에 황궁을 비운다는 것. 그건 의미가 남달랐다.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아우라를 잡겠다는 뜻이었으니.

모두가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아우라는 우뚝 서 있었다. 루안의 말처럼 이대로 도망을 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핀이라고…….”

그녀가 중얼거렸다.

북쪽 탑에서 나와 카를을 찌른 이후, 아우라는 이젠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소중했던 모든 것이 다 사라지거나 무너져 버렸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녀는 살아야 할 이유를 찾은 것 같았다. 이를테면 탑에 유폐되며 잃었던, 삶의 의미 같은 것.

“루안. 나 황궁으로 돌아가야겠어.”

“안 돼, 아우라.”

루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우라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말했다.

“누가 나한테 말하던데. 내가 아직도 저 하늘 꼭대기에 있는 왕녀라고. 이 모양 이 꼴이 됐는데도 말이야.”

아우라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분하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 내가 아직 바닥까지 떨어지진 못했나 봐.”

“아우라…….”

“이대로 도망치진 못하겠어.”

루안이 그녀의 양어깨를 잡았다. 그는 미치겠단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겨우 도망친 황궁으로 돌아가겠다고? 널 3년이나 탑에 버려둔 남자의 곁으로?”

아우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황궁으로 돌아간다는 건, 카를의 곁으로 간다는 뜻이라는 것을.

“그래. 하지만 알잖아, 루안. 지금 이 상황에서 누군가는 황궁에 가야 하고, 나만 한 적임자도 없다는 거.”

“……그럼 나도 가겠어. 널 혼자 보낼 순 없어.”

“그래. 너도 와서 날 도와줘.”

아우라가 루안의 얼굴을 감싸고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 기억해 두라는 듯.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정체를 완벽하게 숨기고 적당한 때를 기다려 황궁으로 들어와.”

저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우라가 급히 덧붙였다.

“잘 들어, 루안. 지금부터 절대 카를의 눈에 띄어선 안 돼. 그리고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의 앞에 나타나지 마.”

“……너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그래?”

아우라가 대답 대신 루안을 확 안고는 그에게 속삭였다.

“약속할게. 죽지 않는다고.”

“아우라…….”

“황궁에서 다시 만나자.”

그 말을 남기고 아우라가 루안을 놓아주었다. 그리곤 지부 건물로 달려 들어갔다.

말발굽 소리는 더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루안은 순간 불길한 직감이 들었다.

“……안 돼…… 아우라!”

루안이 아우라를 따라 지부 건물로 들어갔다.

***

아우라는 나무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화상을 입은 발목이 화끈거렸다.

카를이 자신을 잡으러 안센나까지 왔다. 그 사실만으로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순순히 잡혀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카를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었다. 아우라가 안센나에 온 이상, 제니아인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캐낼 거였다.

‘내가 핀의 존재를 알게 됐다는 걸 그가 아는 건 시간문제야.’

카를에게 어떻게든 숨겨야 했다. 자신이 핀에 대해 안다는 것을.

벌컥!

아우라가 꼭대기 층 창고의 문을 벌컥 열었다. 저 앞으로 마침 발코니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철컥.

그녀는 창고의 문을 잠그곤 마음을 가다듬으며 발코니로 걸어갔다. 저 밑으로 지부의 빈터가 보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달려오는 카를과 기사들도.

‘죽으러 안센나에 온 것처럼 보여야 해. 아무런 작당도 꿍꿍이도 없이, 그저 죽으러.’

그럴듯한 그림이었다. 국민의 곁에서 죽으려 한 왕녀. 이 정도는 되어야 카를을 속일 수 있을 거였다.

쾅! 쾅!

“아우라! 아우라! 이 문 열어!”

문밖에서 루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우라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저 바보가…… 숨어 있으라니까.”

그녀는 침착하게 다리를 하나씩 난간 밖으로 넘겼다. 어쩔 수 없는 공포가 밀려 들어오고 난간을 잡은 손에는 빠르게 땀이 찼다.

마침 저 아래 빈터에 카를이 도착했다. 그는 아우라를 발견하곤 사색이 되어 말에서 내렸다.

“아우라!”

카를이 지부를 향해 달려오며 외쳤다. 그때였다.

쾅!

잠겼던 문이 부서지고 루안도 달려 들어왔다.

“아우라!”

루안의 목소리에 아우라는 얼른 아래를 보았다. 카를과 지부 건물의 거리는 상당했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아우라는 난간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우습긴 하지만, 그녀는 그런 믿음이 있었다. 카를은 절대 자신을 죽게 둘 수 없을 거라고.

아우라는 그대로 곤두박질쳤다. 몸의 장기가 한꺼번에 끊어지는 통증에 눈을 질끈 감았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을 때, 누군가가 그녀의 몸을 아슬아슬하게 받아 냈다.

“으읏…….”

아우라가 참았던 신음을 뱉어 냈다. 추락의 가속력 때문에 그와 부딪친 부분이 아팠다.

눈을 뜨니 아니나 다를까, 카를이 보였다. 그의 눈에 설명할 길 없는 분노가 이글거렸다.

카를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게 될까. 또 자신은 카를에게 무슨 짓을 하게 될까. 아우라는 그것이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론 궁금해졌다.

이윽고 하늘이 핑 돌았다. 정신이 서서히 저편으로 날아감을 느끼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