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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6)화 (6/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6화

다그닥, 다그닥…….

해가 하늘 가운데에 솟을 무렵이었다. 카를과 기사들의 말달리는 소리가 평야를 울렸다.

지리상 안센나는 왼편에 있었다. 그러나 그 앞엔 험준한 산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들은 평야를 달려 길을 돌아가느냐, 위험한 산을 가로질러 가느냐를 선택해야 했다.

카를이 망설임 없이 말머리를 왼편으로 돌렸다.

“폐하!”

한 기사가 카를을 불러 세웠다. 그는 측근 중 하나인 프릿이었다.

“뭐지?”

“평야로 가시지요. 산악 지대는 말에게 위험합니다. 말 다리가 부러지거나 산적을 만날 수도 있고요.”

“굳이 길을 돌아갈 이유는 없다. 말을 조심히 몰며 따라와라.”

카를이 다시 고삐를 당길 때였다. 프릿이 울컥했다.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뭘 이해할 수 없다는 거지?”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기사들이 두 사람의 눈치를 보았다.

프릿은 괜찮은 기사였지만 성격이 드세고 호전적이었다. 평소에도 이런저런 불만이 많은 게 단점이었다.

“3년이나 데블라에서 싸우고 나서야 황궁을 차지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황궁을 비우시다니요!”

“그건 내 결정이다. 정 불안하면 황궁으로 돌아가.”

조쉬가 얼른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희는 모두 폐하와 함께 갈 겁니다. 프릿, 네가 무례했다. 어서 사과드려.”

조쉬의 중재에도 프릿은 가만히 버틸 뿐이었다. 그러나 카를은 그마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시간 낭비를 했군. 가자.”

카를의 말에 기사들이 하나둘 고삐를 잡았다. 조쉬가 프릿의 어깨를 두드렸다.

“프릿, 일단 임무부터 끝내고,”

“고작 그런 여자 때문에……!”

카를이 멈칫했다. 그는 말머리를 돌려 프릿의 앞으로 왔다.

“다시 말해 봐.”

“…….”

“다시 말해 보라고 했다, 프릿.”

프릿이 주먹을 꽉 쥐었다.

“저희 앞에서 폐하를 모욕한 여자 아닙니까! 그런 여자가 저희의 고귀한 전투의 덕을 보고 황후가 되다니요!”

“프릿!”

조쉬가 그만하라는 듯 외쳤다. 그러나 카를의 검이 이미 하늘로 치솟은 후였다.

“폐하!”

“안 됩니다, 폐하!” 

기사들이 황급히 그에게 달려왔다. 카를의 검이 공기를 갈랐다. 프릿은 눈을 질끈 감았다.

검은 프릿의 말 목에 박혔다.

히이이잉!

말이 괴성을 내지르더니 쓰러져 죽었다.

“으윽!”

프릿이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카를의 이번에는 그의 목을 겨눴다. 

“고귀한 싸움이라고?”

“폐, 폐하…….”

“프릿. 넌 데블라에서 수백 명을 죽였어. 넌 그런 걸 고귀하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그걸로 얻게 될 권력이 고귀해?”

서슬 퍼런 말에 모두가 긴장했다. 카를은 상냥한 주군은 아니었다. 하지만 부하에게 이렇게 검을 겨눈 적은 없었다.

“그 여자라는 이유조차 없으면 우린 그저 열심히 살육을 했을 뿐이야. ……괴물처럼.”

“…….”

“자신이 뭘 지킨 건지도 모르는 놈을 부하라고 달고 다녔군.”

카를의 검 끝이 프릿의 어깨로 갔다.

툭.

기사 견장이 떨어졌다. 프릿은 떨어진 견장을 황망하게 보았다. 카를이 모두에게 말했다.

“프릿은 오늘부로 기사단에서 영구 퇴출이다. 결정에 불만이 있는 놈들은 지금 떠나도록. 붙잡지도, 탓하지도 않는다.”

그 누구도 나가겠노라 나서지 않았다. 그건 지난 세월 카를이 쌓은 신뢰이기도 했다.

“……가자.”

카를은 산을 향해 말을 몰았다. 기사들이 말없이 그를 따랐다.

프릿이 멍하니 그 뒷모습을 보았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죽은 말과 떨어진 견장뿐이었다.

“……큭.”

프릿이 흙을 움켜쥐었다. 저 멀리 말들의 뒤꽁무니가 흙먼지에 사라져 갔다.

***

아우라는 자경단원들을 따라 자경단 중앙 지부에 도착했다. 지부는 그나마 그럴듯한 저택이었다.

“기다려 주십시오.”

자경단 하나가 지부 안으로 들어갔다. 아우라는 초조하게 기다렸다.

잠시 후, 지부의 문이 벌컥 열렸다. 

“아우라!”

아우라는 순간 굳어 버렸다.

“……루안?”

꿈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우연이. 아니, 행운이 갑자기 주어질 리 없으니까.

그녀에게 달려오는 연갈색 머리의 수려한 미남. 그는 분명 제가 아는 루안이 맞았다.

“아우라!”

루안은 아우라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우라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루안…….”

아우라는 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았다. 루안이 울음을 참으며 그녀를 더 꽉 안아 주었다.

“아우라…… 아우라…….”

두 사람은 소꿉친구였다.

3년 전, 아우라가 카사로 떠나기 전날이었다. 루안이 그녀를 찾아왔다.

“제발 허락해, 아우라. 카사 제국 황실은 너무 혹독한 곳이야. 네 남편 될 사람의 소문도 나쁘고. 시종이건 기사건 좋으니 널 따라갈게. 누군가는 널 지켜야 하잖아.”

“루안.”

아우라는 루안의 손을 잡았다. 루안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럴 수 없어. 너는 제니아에서 네 삶을 살아야지.”

“이게 내 삶이고 인생이야. 난 마이어 가문의 사람이고, 마이어가는 대대로 왕실을 모셨어. 그리고…… 우린 평생 함께였잖아.”

루안이 아우라의 손을 꽉 맞잡았다.

“아우라. 나는, 나는 너를…….”

“루안.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아우라는 일찍이 알고 있었다. 루안이 자신을 마음에 담았다는 것을.

한때는 그런 생각도 했다. 왕녀로서 정략결혼을 안 해도 된다면 루안과 결혼해도 좋을 거라고. 그는 착하고 따뜻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정략결혼이 현실이 된 이상 루안을 놔주는 게 맞았다. 좋은 여자를 만나 예쁜 가정을 꾸릴 수 있도록.

아우라는 루안을 안아 주었다.

“나는 꼭 행복해질게. 약속해.”

“아우라…….”

“그러니 너도 부디 행복했으면 좋겠어, 루안.”

3년 전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우라의 모습이 그것을 증명하는 듯했다.

“아우라, 너…….”

루안이 말을 잇지 못했다. 아우라는 너무 말랐고, 아파 보였다. 게다가 목의 상처와 발목의 붕대까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녀는 애써 웃었다.

“조금 힘든 일이 있었어. 그런데 설마 루안, 네가 자경단 대장이야?”

아우라가 루안이 이끌고 나온 자경단원들을 보며 말했다.

루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센나에 모인 젊은 남자 중에 그나마 우리 집안이 알려진 편이라 그렇게 됐어.”

“당연하지. 자랑스러운 마이어가의 장남인데. 세상에, 정말 든든해.”

루안이 있다면 안센나에도 희망이 있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꿈만 같아. 아우라를 평생 다시 못 만날 줄 알았는데.’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아우라. 너 옷부터 좀 갈아입어야겠어. 이 날씨에 그렇게 얇은 차림으로 돌아다니다니.”

루안이 아우라를 일으켰다. 그는 그녀의 손을 감싸 쥐고 지부로 향했다.

어렵게 다시 잡은 손이었다. 다신 놓고 싶지 않았다.

***

자경단 지부의 내부는 제법 넓고 깔끔했다. 그럴듯한 꼴을 갖추기 위해 애를 쓴 티가 났다.

아우라는 빈방에서 따뜻한 수건으로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었다. 루안이 준비해 준 겨울옷이었다. 가슴팍에는 제니아의 전통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방에서 나온 아우라를 루안은 접견실로 데려갔다.

“오래 머무를 순 없어, 루안. 필요한 말만 얼른 나누고 떠나야 해.”

“알았어. 일단 이리 와.”

접견실엔 간단한 음식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우라가 손을 내저었다.

“루안, 정말 이럴 시간이-”

“뭐라도 좀 먹이고 보내야겠어. 어서.”

“……그럼 먹으면서 이야기해.”

아우라는 자리에 앉아 수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수프가 식도를 적셨다. 이곳까지 오는 여정이 고돼서였을까. 고작 수프의 온기에 울컥 눈물이 나려 했다.

애써 눈물을 삼키는 아우라를 보며 루안이 한숨을 삼켰다.

“제니아가 멸망하고 너에 대한 온갖 소문이 다 돌았어. 탑에 갇혔다, 갇히지 않았다, 도망을 갔다, 미쳐 버렸다, 심지어…….”

루안이 멈칫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죽었다는 말까지 돌았어.”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탑에 갇히긴 했지만 이렇게 잘 살아 돌아왔으니…… 난 괜찮아. 그것보다 그간의 이야기를 해 줘. 카사에 점령을 당한 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괜찮다고 말하는 아우라는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루안은 그녀의 자존심을 잘 알았기에 더 캐묻지 않았다.

“그래. 일단…… 죽은 황태자가 제니아인들을 노예로 강등시켰어.”

노예. 그 단어에 아우라가 스푼을 내려놓았다. 예상은 했었지만 막상 루안의 입을 통해 들으니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다.

“다들 뿔뿔이 흩어져서 노예 생활을 했어. 나 같은 귀족 젊은이들은 겨우 은거지에 숨어 있었고.”

“카를이 황제가 된 후엔?”

카를의 이름에 루안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마지못해 말했다.

“우리를 2등 시민으로 올려 줬어. 즉위하자마자.”

2등 시민에겐 제약이 많았다. 토지를 가질 수 없었고, 장사를 못 했다. 정치 활동도 금지되었다. 그래도 노예 신분보단 훨씬 나았기에 아우라는 한시름 놓았다.

“현재 상황은 어때?”

“나쁘지 않아. 황실이 안센나를 제니아인 지구로 지정한 후로 사람들이 많이 모였어.”

“마법사들은? 마법사들이 보이지 않는데.”

루안이 아우라의 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마법사들은 아직 모이지 않았을 뿐이야.”

“아니야, 루안. 아무래도 이상해. 제니아가 그렇게 쉽게 당한 것도. 마법사들이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을 텐데.”

“아우라, 마법사들은 괜찮아. 봐. 나도 멀쩡하잖아.”

마이어 가문은 제니아에서 가장 유명한 마법사 집안이었다. 루안 역시 마이어가의 장남답게 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수려한 손으로 아우라의 팔을 쓰다듬었다.

“우린 걱정하지 마. 안센나를 기반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어. 지금은 네 생각만 하고 널 지켜. 우리를 위해서라도.”

진심이 담긴 부드러운 위로에 아우라의 마음이 녹을 듯했다.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런 따뜻함을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워했던가.

하지만 더는 이곳에 있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 황실군에게 잡혔다간 제니아인들도 추궁을 당할 테니까.

“루안, 나 실은 카를에게서 도망치는 중이야.”

“……역시. 그랬을 줄 알았어.”

“곧 황실군이 들이닥칠 거야. 그 전에 떠나야 해. 상황이 좀 잠잠해지면 다시 돌아올게.”

아우라가 품에서 금단추 두 개를 꺼냈다.

“필요한 곳에 사용해.”

“아우라.”

“황실군에겐 내가 돈을 훔쳐서 어디론가 가 버렸다고 말해. 절대 그들에게 대항하지 말고.”

그때, 루안이 아우라의 손을 잡았다.

“나도 같이 가. 널 혼자 보낼 순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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