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5화
아우라가 부스스 침대에서 일어났다. 밖은 어느덧 새벽이었다.
카를은 제 옆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그 어떤 경계심도 없이.
푸른 새벽빛이 그의 얼굴을 창백하게 적셨다. 소년 시절의 얼굴이 언뜻 비치는 것도 같았다.
문득, 아까의 일이 떠올랐다.
‘카를, 너 설마…… 아직도 날 좋아해?
‘그렇다고 한다면? 그럼 뭐가 달라지는데?’
아우라가 카를에게 속삭였다.
“……많은 게 달라지지.”
그가 자신을 가졌다고 생각한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져 줄 생각이었다. 그가 방금까지 이 침대에서 꿈꿨을 희망을 증오로 뒤집어 놓은 채로. 딱 그런 상처를 준 채로 영원히 사라져 줄 생각이었다.
‘인제 와서 황후가 되라고?’
아우라가 카를에게 다시 한번 속삭였다.
“아니. 네가 원하는 건…… 그 무엇도 안 들어줄 거야.”
아우라는 창밖을 보았다. 폭설이 푹푹 내리고 있었다.
‘……운도 없지.’
아우라는 침대 밖으로 조심히 다리를 내렸다.
“!”
극심한 통증이 하반신에 번졌다. 아우라는 카를을 흘겨보았다. 온갖 짓을 다 해 놓고는 세상모르고 자는 모습이 미웠다.
“후우…….”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걸쳤다. 얇은 실내복이었지만 별수 없었다. 기회는 지금뿐이니까.
그녀는 소파 아래로 손을 넣었다. 차가운 메스가 잡혔다.
아우라는 메스의 빛나는 날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걸로 사람이라도 죽이려고? 아니. 넌 절대 못 해, 아우라.’
‘네 말이 맞아, 카를.’
단검으로 카를을 찔렀을 때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겨우 이런 걸로 카를이 죽을 리 없다는 것을.
‘하지만 날 죽일 각오 정도는 되어 있어.’
아우라가 메스를 꽉 쥐곤 방을 나섰다. 방 앞에는 카를의 최측근 기사 하나가 서 있었다.
“전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네 이름이 뭐지?”
“조쉬 가넷입니다.”
“그래, 조쉬.”
아우라가 대뜸 메스를 제 목에 갖다 댔다.
“저, 전하?”
“소리 낮춰. 한마디라도 더 하면 찌를 테니.”
그녀의 목에서 피가 한 줄기 흘렀다. 조쉬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내가 너 때문에 죽으면 카를이 참 좋아하겠어.”
조쉬는 울 듯한 얼굴로 입을 닫았다. 그는 복종의 의미로 손을 들어 올렸다.
“말 한 마리를 구해 와. 당장.”
“말을 어디서 갑자기-”
“입 다물어.”
아우라가 메스를 더 깊이 찔렀다. 당장에라도 피가 왈칵 쏟아질 듯했다. 조쉬가 얼른 고개를 주억거렸다.
“말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아무도 안 다니는 길로.”
조쉬는 하는 수 없이 기사 전용 계단으로 아우라를 안내했다.
그들은 용케 아무도 모르게 마구간까지 왔다. 새벽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쉬가 말 한 마리를 꺼내 왔다. 아우라가 그에게 손짓하며 황궁 뒷문으로 갔다. 걸음마다 눈이 푹푹 밟혔다.
“문 열어.”
“전하…….”
“어서.”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조쉬는 한숨을 푹 쉬곤 보초병에게 달려가 뭔가를 말했다. 보초병이 물러나자 조쉬가 직접 문을 밀었다.
끼이이-
황궁 문이 활짝 열렸다. 아우라는 그 문 너머 세상을 멍하니 보았다.
저 문을 지나면 카를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신 돌아오지 않으리라.
“말.”
조쉬가 고삐를 내어 주었다. 옷소매의 금단추 세 개가 반짝 빛났다. 아우라는 대뜸 그 단추들을 뜯어냈다.
“……! 저, 전하?”
“빌려 갈게, 조쉬.”
조쉬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협박에, 갈취에. 이런 황자비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아우라가 말에 올라타더니 문을 나섰다.
“문 닫아.”
조쉬가 순순히 문을 닫았다.
“내가 사라질 때까지 거기서 움직이지 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우라는 그대로 말을 몰고 가 버렸다.
거친 눈발 사이로 그녀가 몸을 감췄다. 그 즉시 조쉬가 뒤돌아 전속력으로 뛰었다.
잠시 후, 그가 황자비의 방 방문을 벌컥 열었다. 카를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조쉬는 당황했다.
‘옆에서 사람이 떠나는지도 모르고 주무셨다고? 아니, 애초에 깊이 잠드시다니.’
하지만 놀라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폐하.”
조쉬의 목소리에 카를이 바로 눈을 떴다. 그는 옆자리를 더듬고는 몸을 일으켰다.
“아우라는.”
“황궁을 떠나셨습니다.”
“……이런.”
카를이 이마를 짚었다. 굵고 긴 손가락 사이로 그의 검은 눈이 차갑게 빛났다.
“잡아. 안센나로 갔을 거다.”
“네, 바로 가겠습니다.”
조쉬가 뛰어나갔다. 카를은 침묵 속에서 잠시 그렇게 앉아 있었다.
등이 따끔했다. 그는 팔을 뒤로 돌려 등을 더듬었다.
길게 나 있는 여러 줄의 생채기. 그 생채기의 정체를 깨달은 순간, 카를은 날카로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핫.”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자신과 밤을 보낸 이유를. 자신의 아래에서 덜덜 떨면서도 끝내 그만하라고 말하지 않았던 이유를.
이 치밀어오르는 허무함과 분노. 이걸 안겨 주고 싶어 그토록 애를 썼던 것이다. 자신을 던져 가면서, 미련하게.
그리고 그녀의 시도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절묘하고 훌륭했다. 카를의 속이 못 견디게 끓어오르고 있었으니까.
‘놓여날 자신이 없으니 버리겠다 이건가.’
아우라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카를, 너야말로 이제 와서 멈출 수 있겠어?’
카를은 이 질문을 지금의 자신에게 던졌다.
대답은 역시나 같았다.
‘아니.’
고작 한 번 버림받았다고 여기서 멈춰 줄 마음 따윈 없었다.
부하들은 그녀를 금방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돌아오면…… 똑똑히 알게 해 줄 거였다. 그녀가 그의 무엇을 건드렸는지.
카를은 침대에서 일어나려다가 창밖에 내리는 폭설을 보았다.
“하아…… 하필.”
카를은 미간을 찌푸리며 옷을 챙겨 입었다. 옷장을 열어 모피 망토 두 개를 꺼내 밖으로 나갔다.
그가 향한 곳은 마구간이었다. 마침 기사들이 막 말에 오르고 있었다.
“폐하?”
“나도 같이 간다.”
“폐하, 지금 황궁을 비우시면 위험합니다.”
수석 보좌관인 테오가 말렸다. 카를은 황위에 오른 지 며칠 되지 않았다. 자리를 비우기엔 불안한 시기였다.
“그럼 네가 남아서 책임져.”
“예, 예?”
카를이 테오의 말에 훌쩍 올라타더니 마구간을 나가 버렸다. 기사들이 급히 그를 따랐다.
그들이 황궁을 벗어났을 때였다. 점점 굵어지는 눈발이 시야를 흐릿하게 가렸다. 카를이 조쉬에게 물었다.
“황자비는 뭘 입고 갔지?”
“보통의 실내복이었습니다.”
“……빨리 가야겠군.”
카를이 안센나를 향해 말을 몰았다.
***
아침 무렵 눈이 그쳤다. 아우라의 옷은 새벽 내내 눈을 맞아 푹 젖어 있었다. 그래도 아우라는 평야를 달리고 또 달렸다. 이제 안센나가 멀지 않았다.
“하아…….”
잠시 말을 멈추고 손에 입김을 불었다. 손이 다 부르트고 얼어서 감각이 없었다.
지금쯤 카를도 상황 파악을 끝냈을 거다. 그녀가 안센나로 갈 거라는 것 정도는 눈치챘을 테고.
‘그래도 제니아인들을 살펴봐야 해. 그 직후에 다른 곳으로 떠나는 한이 있더라도.’
국민을 돌보는 건 왕족의 의무였다. 혹은 왕녀로서의 마지막 자존심.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건, 카를이 직접 따라오진 않을 거란 점이었다. 이런 시기에 황제가 황궁을 비울 리는 없으니.
어쩌면 카를은 이대로 아우라를 포기할지도 몰랐다. 상처를 주겠답시고 몸을 던지는 여자 따위, 한 번 비웃고는 털어 버릴지도.
“…….”
그녀는 어쩐지 서글퍼졌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괜한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잠시 후, 그녀는 안센나에 도착했다.
거대한 빈민촌이 펼쳐졌다. 제니아인들은 집도 없이 불가에 모여 앉아 있었다. 재주 좋게 장사를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허접한 좌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마법사들의 흔적이 없어.’
제니아는 대륙 최대의 마법사 보유국이었다. 제니아인이 모인 곳이라면 어디든 마법이 보이기 마련이었다.
그때였다.
“요, 용서해 주십시오!”
“어서 내놔!”
한 남자가 빵을 끌어안고 웅크려 있었다. 파란 망토를 두른 남자들이 그 빵을 뺏으려 했다.
‘저 망토를 두른 자들은…… 자경단들 같은데.’
남자는 절박하게 매달렸다.
“아, 아이가 정말 아픕니다. 오늘까지 아무것도 못 먹으면 죽고 말 겁니다!”
“사정은 딱하지만 모두의 사정을 다 봐주면 질서가 다 무너지고 만다. 놔!”
자경단원이 결국 빵을 빼앗아 빵 장수에게 넘겨주었다.
“으흑…… 흐흑…….”
남자가 엎드려 울었다. 자경단은 씁쓸하게 남자를 외면하고 떠나갔다.
남자는 비척비척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는 굴러다니던 유리병을 주워 벽에 세차게 내리쳤다.
쨍!
병이 깨지며 비죽비죽한 날이 드러났다.
“그래,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그가 눈물을 닦고 뒤돌아섰을 때였다. 아우라가 골목 입구를 막고 있었다.
“뭐, 뭐야! 비켜. 죽고 싶어?”
남자가 병을 휘둘렀다. 아우라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그녀는 금단추 하나를 바닥에 던졌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금이라니. 저거면 온 가족이 한 달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아이를 먹이도록 해라. 주위의 굶는 아이들 역시. 오늘의 부끄러움은 잊지 말고.”
“으, 으흑…… 흐윽!”
남자가 무너져 내렸다. 그는 금단추를 쥐곤 엎드려 오열했다.
그 참혹한 광경에 아우라의 마음이 내려앉았다.
제니아가 멸망하기 전까지는 평범한 가장이었을 것이다. 3년의 노예 생활이 모두를 망쳐 놓았다.
‘자경단 수장을 만나자. 그게 상황을 가장 빨리 파악할 길이야.’
아우라는 골목을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멀리 파란 망토를 두른 남자들이 보이자 재빨리 따라붙었다.
“저기.”
자경단원들이 뒤를 돌았다.
기름진 말을 모는 귀족 차림의 여자. 하지만 여자는 너무 말랐고, 몰골이 좋지 못했다. 그들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아우라를 경계했다.
“당신은 뭐요?”
“그대들의 대장을 만나고 싶은데.”
“허 참. 당신이 누군 줄 알고 대장에게 데려가? 꺼져!”
자경단원이 짜증스레 받아쳤다. 남자와의 일 때문인지 그들은 예민해 보였다.
아우라는 머뭇거렸다. 이 말을 내뱉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어쩐지 어색했다.
“나는 제니아 왕가의 왕녀, 아우라다.”
그 순간 자경단의 얼굴에 놀람과 경외감이 번졌다. 그들은 그제야 왕녀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와, 왕녀님!”
“왕녀님……!”
그들이 무릎을 꿇으려 했다. 아우라가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쉿. 일어나라.”
여기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진 않았다. 게다가 언제 황실군이 올지 모르는 마당에.
“어서 날 너희 대장에게 데려가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