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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4)화 (4/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4화

타샤와 시녀들이 황급하게 나갔다.

카를은 아우라의 손목을 잡은 채 성큼성큼 발코니로 갔다. 아우라는 속수무책으로 그에게 끌려갔다.

쾅!

그가 발코니 유리문을 힘껏 닫았다.

카를은 아우라를 그대로 난간까지 몰아붙였다. 아우라의 허리가 난간에 꺾이듯 눌렸다. 난간은 딱딱하고 차가웠다. 그녀가 처한 현실처럼.

“…….”

“…….”

아우라는 카를을 노려보았다. 카를도 아우라를 노려보았다. 둘의 숨결이 허공에서 하얗게 뒤얽혔다.

“그거 놔.”

카를이 그녀가 쥔 스푼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아우라가 놓지 않자 카를이 그녀의 손목을 좀 더 힘주어 쥐었다. 그 압박감에 아우라의 손힘이 풀렸다.

“읏…….”

쨍강-

스푼은 난간에 부딪히더니 발코니 밖으로 떨어졌다.

카를이 그르렁대듯 말했다.

“스푼? 그걸로 사람이라도 죽이려고? 아니. 넌 절대 못 해, 아우라.”

“놔.”

“네가 정말로 사람 눈을 파낼 수 있겠어? 너처럼 저 하늘 꼭대기에 있는 왕녀가?”

하늘 꼭대기. 그 말에 아우라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아니, 카를. 네가 잘못 봤어.”

“…….”

“나는 나락까지 떨어졌으니까.”

“함부로 말하지 마!”

카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우라도 물러서지 않았다.

“넌 내가 아직도 아무것도 모른 채 시집온 어린애로 보여?! 내가 얼마나 변하고 망가졌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망가졌다는 소리.”

“…….”

“한 번만 더 하면 용서하지 않아.”

아우라가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 겁을 먹어서가 아니었다.

그가 화를 내는 것. 그건 단순히 아우라가 일으킨 소란 때문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이유. 그것은 마치…….

‘아니야. 설마 그럴 리가.’

아우라가 하늘을 보았다. 어둑어둑한 하늘에서 눈송이가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하얀 이마에 눈이 내려앉았다. 차가웠다. 냉정해진 머릿속이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에게 복수할 기회가 온 건지도 모른다고.

“카를.”

한층 수그러든 말투에 카를이 멈칫했다.

“허리가 꺾일 것 같아. 날 좀 일으켜 줘.”

카를은 미간을 찌푸렸다. 또 무슨 꿍꿍이지? 그는 그렇게 묻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허리를 잡아 일으켜 주었다. 

“카를.”

그녀는 확실히 물어보기로 했다.

“너는 트루 블러드가 필요한 거지?”

“나는 네가 필요한 거야.”

카를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아우라가 침을 꿀꺽 삼켰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시험해 보자.’

“카를. 꼭 트루 블러드인 황족이 있어야만 황권이 안정되는 건 아니야. 나보다 조건이 좋은 아내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어. 그러니 날 폐위해.”

“그럴 수 없어.”

“그럼 이혼해.”

“그 역시, 그럴 수 없어.”

“죽여, 그럼.”

“말조심해.”

카를이 아우라를 쏘아보았다.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하던 그 표정으로.

‘또 저런 반응.’

말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아우라는 그 가능성을 잡아 보기로 했다.

‘어쩌면…… 카를은 어쩌면…….’

아우라가 손을 뻗어 그의 옷깃을 쥐었다. 그대로 그를 끌어당겨 눈을 똑바로 맞췄다.

그녀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여자였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분노와 비웃음으로 숨겨 놓았다고 해도.

“카를, 너 설마…… 아직도 날 좋아해?”

그의 입에서 흰 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그들 사이로 떨어지는 눈발이 점점 더 굵어졌다. 그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

“그럼 뭐가 달라지는데?”

아우라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말을 들은 기분이었다.

‘그래.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면 그 마음을 돌려줄 작정이었다. 그녀만의 방법으로, 증오를 담아.

아우라가 그대로 카를에게 입을 맞췄다. 피차 차가운 입술이 세게 맞닿았다. 누구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카를이 그녀를 떼어 냈다.

“너-!”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그에게 달려들었다. 카를이 재빨리 그녀의 양손을 움켜쥐고 발코니 창으로 밀었다. 아우라의 등이 창에 부딪혔다.

“하아…….”

숨을 뱉어 내는 아우라의 입술이 붉었다. 카를이 뭔가를 꾹 누르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지금 뭐 하자는 짓이지?”

“날 좋아한다며. 기회를 주는 거야, 카를.”

그녀가 입술을 길게 늘여 웃었다. 할 말을 잃고 굳은 그의 표정이 정말이지 보기 좋았다.

아우라가 입술을 살짝 물었다. 느낄 수 있었다. 이 말을 하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것을.

그걸 알면서도 아우라는 멈추지 않았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보기보다 순진하네.”

그녀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카를의 눈빛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는 아우라의 뒷목을 확 끌어당겨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이 그새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순간적으로 아우라가 굳어 버리자 그가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움찔하는 틈을 타 혀가 들어왔다.

“!”

혀를 강하게 감아올리는 감각에 아우라가 숨을 삼켰다. 입술을 빨아들이고, 혀를 깨물고, 입안 곳곳을 거칠게 배회하는 움직임에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의 욕망을 여실히 느끼며 아우라는 깨달았다. 좋아하는 자는 증오하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이토록 탐욕적이고 갈급할 리가 없었다. 그녀를 이해하지도, 믿지도 못하면서 이렇게 그녀를 원할 리 없었다.

기회. 아우라는 카를에게 기회를 준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 기회를 잡은 건 아우라 자신이었다.

그녀는 발코니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목을 끌어안고 뒷걸음질 쳤다. 카를이 눈이 가늘어졌다.

방으로 들어온 그는 그녀를 더 깊고 강하게 몰아붙였다. 그 힘에 그녀가 정신없이 뒤로 밀려났다.

종아리에 뭔가가 툭 닿는 순간이었다. 카를이 먹이를 사냥하는 맹수처럼 그녀를 뒤로 쓰러뜨렸다. 침대가 물결처럼 일렁였다.

“하아…… 하아…….”

그녀가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카를이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제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근사한 근육이 서서히 드러났다. 온몸을 덮은 크고 작은 흉터와 옆구리에 감은 붕대까지도.

“너.”

“……하아…….”

“정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마치 그녀가 도망갈 길을 열어 주는 듯한 말이었다. 아우라는 그 여유로운 태도가 우스웠다. 타오를 것 같은 눈으로 그녀를 훑어보는 주제에.

아우라가 카를의 목을 휘감아 확 끌어 내렸다.

“안 해.”

그 대답은 그녀 자신에게 건네는 다짐이기도 했다.

“카를, 너야말로 이제 와서 멈출 수 있겠어?”

카를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대답 대신 그녀의 목에 입술을 묻었다.

“……!”

혀와 이가 닿는 곳부터 전기가 퍼지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는 긴장감에 몸이 파르르 떨렸다. 카를이 그녀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 쥐었다.

“네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는 도저히 모르겠지만…….”

“…….”

“후회 안 하게 할게, 아우라.”

카를이 눈을 맞추고 속삭였다. 아우라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목을 쓰다듬던 손길이 등 뒤로 갔다. 툭, 툭. 드레스 단추가 풀렸다. 그 싸한 감각과 욕망에 젖은 카를의 낯선 표정. 태어나서 처음 느껴 보는 남자의 압도감. 그것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드레스가 확 내려갔다.

상상을 뛰어넘는 수치심에 아우라가 눈을 꽉 감았다. 맨가슴을 쥐는 손길이 너무 뜨거워서 데일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엄지가 가슴의 끝을 쓸었을 때.

“잠깐……!”

생경한 감각에 놀란 아우라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카를이 그녀를 달래듯 입을 맞춰 왔다. 뭉근하게 퍼지는 쾌락 저편에서 카를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괜찮아.

그 말과는 달리 그의 손길은 집요하기 짝이 없었다. 어쩐지 아랫배가 간지러워 시트를 움켜쥐고 다리를 비틀었다. 그 비튼 다리를 벌리고 카를이 자리를 잡았을 땐, 그녀는 마음을 굳게 먹어야 했다.

그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넘기며 허리를 세웠다. 허벅지에서 시작한 손길이 종아리를 타고 쭉 올라왔다. 그리고 발목의 붕대에 도착하는 순간,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 정말…….”

카를이 그 붕대에 입을 맞췄다.

아우라는 못 견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그의 손에서 발을 빼 그의 어깨를 툭 찼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뭔가를 나누고 싶어서 너와 자는 게 아니야.’

카를의 얼굴에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그가 아우라의 양 무릎을 잡았다. 이윽고 생경한 통증이 아우라의 온몸을 관통했다.

“아!”

아우라가 비명 섞인 신음을 뱉었다.

카를이 아우라의 아래를 파고들어 와 길을 만들어 냈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멈추지 않고.

신음과 숨이 떠밀려 올라와 제멋대로 터져 나왔다. 제대로 숨 쉬는 방법을 잊은 것만 같았다.

“괜찮아. 천천히, 숨 쉬어.”

그가 그렇게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아우라는 고개만 내저으며 그 시간을 견뎠다. 그만하라고 하지 않을 거였다. 버텨 낼 거였다.

아래의 감각이 사라져 갔다. 아니, 너무 많은 감각에 시달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가 드나들수록 이물감이 익숙해지고 통증은 쾌락으로 변했다. 그 쾌락이 느껴지는 순간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아우라.”

카를이 허리를 숙여 눈가에 입을 맞췄다. 그다음은 다시 입술이었다. 엉망으로 엉키는 숨결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달콤했다. 그는 시트를 움켜쥔 그녀의 손을 제 목에 둘렀다. 그리고 그녀를 강하게 몰아붙였다.

“아!”

아우라는 자기도 모르게 카를을 안았다. 그 순간 카를이 지은 미소를 그녀는 보지 못했다.

그는 그녀가 그를 놓을 틈을 주지 않고 계속 몰아붙였다.

“아아……! 제발, 읏!”

자신이 뭘 빌고 있는지 그녀도 알 수 없었다. 당장 그만뒀으면 싶다가도, 본능적으로 이 쾌락에 이끌렸다.

아우라는 애써 정신을 차렸다. 이끌리고 싶지 않았다. 즐기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그를 버리는 과정에 지나지 않아야 했다.

그녀가 손톱을 세웠다. 그 다짐을 단단히 하듯 그녀는 그의 등을 있는 힘껏 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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