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3화
타샤가 뭐라고 일러바쳤는지는 알 만했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울어 댔겠지. 아우라에게 죽을 뻔했다고.
‘익사라니. 허리까지밖에 안 오는 욕탕이었는데.’
굳이 변명은 안 하기로 했다. 어차피 들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아우라는 팔짱을 끼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다시 봐도 그의 체구는 압도적이었다. 아직도 전쟁터에 있는 듯 형형히 살아 있는 눈빛도.
“황제 폐하 얼굴 한번 보기가 너무 어려워서 말이야. 난 또 상처 때문에 앓아누운 줄 알았지.”
아우라가 카를의 옆구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자신이 찌른 그 자리였다.
“조용히 정신을 가다듬을 시간을 준 건데, 별 소용이 없는 것 같군.”
“내가 미쳤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미쳤지. 그러지 않고서야 나를 찌를 리가.”
침묵이 흘렀다. 아우라는 감정싸움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전해야 할 말은 정해져 있으니까.
“카를. 나는 네 황후가 되어 줄 마음이 없어.”
“그 소리를 하고 싶어서 그 소란을 피웠던 건가?”
“그래. 알아들었으면-”
“아우라.”
카를이 말을 잘랐다. 예의 그 직설적인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넌 궁금하지도 않아? 왜 황태자가 그간 널 살려 뒀는지.”
“죽일 가치가 없었겠지. 제니아 왕가는 모두 죽었고, 넌 날 버리고 떠났으니.”
“순진한 소리.”
그가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녀의 고개가 자동으로 들렸다.
“3년 전, 나는 부황과 거래를 했어. 황태자가 널 죽이는 걸 막는 대가로 데블라를 토벌하겠다고.”
“…….”
“난 널 살리려고 3년을 짐승처럼 목숨 바쳐 싸웠어. 그런 내게 너는 검을 꽂았고.”
“……하.”
아우라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순진한 소리를 한다고? 그야말로 그녀가 순진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정말로 그랬다면 검까지 보내 그녀를 죽이려 했을 리가 없었다.
거짓말을 따지고 싶은 마음조차도 사라졌다. 어차피 결론은 하나였다.
“난 널 믿지 않아, 카를.”
그 말에 카를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네 믿음은 중요하지 않아. 어쨌거나 널 살린 건 나니까 너도 뭔가를 내어 줘야 계산이 맞지.”
“계산……?”
“그래. 황후가 되도록 해. 이미 말했듯이 난 네가 필요하니까.”
역시. 모든 게 계산속이었다. 3년 전 그녀를 버린 것도, 지금 그녀를 곁에 두려 하는 것도.
물건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언제 또 버려질지 모르는 그런 물건이.
치미는 분노에 아우라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게 트루 블러드가 탐이 나? 왜? 네 어머니 핏줄로는 자신 없니?”
“감히.”
카를이 아우라의 뒷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그에게로 몸이 쏠린 아우라가 흠칫 놀랐다. 어둠을 담은 눈이 그녀를 잡아먹을 듯했다.
게다가, 그의 손.
머리카락 사이로 느껴지는 손은 너무 컸고, 뜨거웠다. 이런 가는 목 하나 정도는 쉽게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우라도 여기서 물러나 줄 생각은 없었다.
“데블라 정벌은 마물들만 죽이는 게 아니라지? 무국적 지대를 땅따먹기하는 거나 다름없어 제국의 기사들이 온갖 살육전을 벌인다며. 대단도 하지. 그런 땅을 정벌하다니.”
아우라가 짐짓 상냥하게 물었다.
“얼마나 많이 죽였어?”
카를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우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수백 명? 수천 명? 거기에 나 하나 더하는 건 일도 아니겠네, 안 그래?”
“거기까지만 해, 아우라. 마지막 경고야.”
“괴물.”
“…….”
“네게서 피 냄새가 나.”
카를의 눈이 짙어졌다. 일말의 분노마저 싹 사라진 얼굴이 무표정했다. 그가 긴 팔로 아우라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무슨 짓을……!”
아우라는 본능적으로 그를 힘껏 밀었지만 소용없었다. 돌 같은 육체가 그녀의 전신을 통해 여실히 느껴졌다.
“놔! 싫어!”
그녀가 소리치자 그는 그녀를 더 강하게 감았다. 틈새 하나 없이 밀착된 몸에서 압박감이 느껴졌다. 아우라는 숨이 턱 막혀서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놔.”
카를은 그 미약한 반항이 참으로 우습다는 듯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아래로 끌어내렸다. 자연스럽게 천천히 고개가 들렸다.
그가 서서히 다가왔다. 아우라의 눈이 커졌다. 그렇게 입술이 맞닿으려는 순간.
“…….”
카를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려 그녀의 귓가로 길을 돌렸다.
“맞아, 아우라. 난 괴물이야.”
귓가에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 아우라의 배 속까지 소름이 퍼졌다. 카를이 붙잡고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주저앉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네게 남은 것도 그 잘난 핏줄뿐이잖아.”
아우라의 치뜬 눈에 핏발이 섰다. 아플 정도로 정확한 말이었다. 그녀의 처지를 예리하게 찌르는.
“그래서 아쉬운 대로 그 핏줄이라도 써야겠다는데, 그게 그렇게 나빠?”
“…….”
“이제 너도 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닐 텐데.”
아우라는 자신이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두려움조차 잊고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볼 정도로. 그녀의 눈에 가늘게 눈물이 고여 갔다.
그제야 카를이 그녀를 놓아주었다.
“알아들었으면 대관식을 준비해. 제대로 먹고, 자고, 진료를 받아. 너 때문에 모든 일정이 늦춰지고 있어.”
그는 저벅저벅 방을 나섰다. 이윽고 쾅 하고 문이 닫혔다.
“……흡.”
아우라가 숨을 삼키며 주저앉았다.
그와 닿았던 모든 곳. 그곳들을 통해 스며들어 온 절망이 가슴에 켜켜이 쌓여 갔다.
자꾸만 새어 나오려는 눈물을 온 힘을 다해 참았다. 약해질 여유 따윈 없었다. 그의 곁에 있다간 절망의 늪에서 죽을지도 몰랐다. ‘잘난 핏줄’이라는 이름표를 단 인형이 되어.
아우라는 소파를 짚고 힘겹게 일어났다. 창밖엔 눈 쌓인 황궁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황궁을 나가야 해.”
저 밖으로 도망가 버릴 작정이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
다음 날.
아우라는 카를의 말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이제 너도 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닐 텐데.’
잔인한 말이었다. 맞는 말이기에 더욱 깊이 와 박혔다.
그녀에겐 돌아갈 가족도, 나라도 없었다. 카를의 부인. 그것이 지금 그녀가 가진 유일한 지위였다.
그렇기에 한시라도 빨리 황궁을 떠나야 했다. 그의 부인으로만 이용당하는 삶은 끔찍했다. 차라리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일단은 제니아인들을 만나자. 왕가가 무너진 후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해야 해.’
식사 시간이 되자 타샤가 시녀들과 함께 들어왔다. 시녀들은 테이블에 식사를 올렸다.
아우라는 타샤에게 물었다.
“제니아의 국민은 어떻게 됐지? 카사의 국민으로 대우받고 있나?”
“식사하십시오.”
무시나 다름없는 답이 돌아왔다.
“내 국민이 어떻게 됐냐고 물었어.”
“음식이 식습니다, 전하.”
아우라가 피식 웃더니 긴 팔로 테이블을 유려하게 쓸었다.
쨍그랑!
접시가 바닥으로 떨어져 깨졌다. 시녀들이 달려와 더러워진 바닥을 치우기 시작했다.
타샤는 무표정하게 시녀에게 명령했다.
“새로 가져오거라.”
“잠깐.”
아우라가 커피 잔을 손톱으로 튕겼다. 팅 하고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커피도 식었으니 다시 끓여 와.”
시녀가 얼른 커피 잔을 거둬 갔다.
“제대로 뜨겁게 해 와. 시녀장이 커피에 빠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타샤는 입꼬리를 가늘게 떨며 모욕을 참았다.
시녀가 식사와 커피를 다시 가져왔다. 커피 잔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아우라는 커피 잔을 들었다가 실수인 척 놓아 버렸다.
달각-
커피가 아우라의 치마와 발목으로 쏟아졌다. 발목이 불에 덴 듯해 비명이 절로 나왔다.
“아!”
“전하! 괜찮으십니까?”
시녀가 달려와 수건으로 발목을 닦았다.
아우라가 눈을 꽉 감고 통증을 견뎠다. 화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그녀는 가만히 보고만 있는 타샤에게 쏘아붙였다.
“뭐 해? 의사를 불러오지 않고.”
잠시 후, 황궁의가 달려 들어왔다. 그는 왕진 가방을 테이블에 올려 두고선 바닥에 나무 디딤대를 두고 그 앞에 앉았다.
“발을 올려 두십시오, 전하. 제가 살피겠습니다.”
아우라가 맨발을 올렸다. 발목에는 벌써 물집이 잡히고 있었다. 황궁의가 혀를 찼다.
“많이 데이셨군요. 당분간 고생을 좀 하시겠습니다.”
황궁의는 약을 꺼내려는 듯 왕진 가방에 손을 뻗었다. 그때, 아우라가 가방을 슬쩍 테이블 밖으로 밀었다.
가방이 엎어지며 속의 것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아우라의 발만 보고 있던 황궁의가 당황했다.
“어, 어이쿠! 죄송합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황궁의와 시녀들이 모두 몰려들어 물건을 주웠다. 모두가 정신이 없는 와중에 아우라는 발 옆에서 반짝이는 뭔가를 보았다. 간단한 시술용 메스였다.
그녀는 툭 하고 메스를 뒤꿈치로 쳤다. 메스는 테이블 옆의 소파 밑으로 들어갔다. 그 뒤 황궁의는 메스가 사라진 줄도 모른 채 아우라의 발목에 붕대를 칭칭 감은 후 방을 떠났다.
타샤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식사를 마저 하셔야 합니다.”
아우라의 앞에 다시 식사가 놓였다. 아우라가 수프용 스푼을 들었다.
“타샤.”
“예, 전하.”
“마지막으로 묻지. 제니아의 국민은 어떻게 됐지?”
“식사하십시오.”
시녀 하나가 마침 물 잔에 물을 채웠다. 아우라는 시녀의 멱살을 잡고 힘껏 밀었다.
“꺄악!”
시녀가 뒤로 넘어졌다. 아우라는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
“저, 전하!”
모두가 달려들려는 순간, 아우라가 시녀의 눈에 스푼을 들이댔다.
“한 걸음이라도 더 와 봐. 눈알을 파 버리겠어.”
시녀들이 멈칫했다. 아우라에게 깔린 시녀가 몸을 벌벌 떨었다.
“사, 살려…… 살려 주세…….”
“말해. 제니아인들은 어디 있지?”
“아, 안센나에…….”
안센나. 수도 외곽의 황무지였다. 물이 부족해 농사도 지을 수 없는 척박한 땅.
“제니아인들이 왜 안센나에 있어!”
“노, 노예였다가 2등 시민으로 막 올라가서…….”
“뭐? 노예?”
아우라의 머릿속에서 뭔가가 뚝 끊겼다. 그녀는 스푼을 더 가까이 들이댔다.
“……누구야. 누구 짓이야.”
“돌아가신…… 화, 황태자 전하께서…….”
아우라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까지 비참하게 당했다고?
“마법사들이 있잖아! 마법사들이 있는데 대체 어떻게?!”
“그 마법사들은……!”
그때였다.
벌컥!
방문이 다급하게 열렸다. 카를이 성큼성큼 걸어와 아우라의 손을 낚아챘다.
그가 모두에게 외쳤다.
“다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