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2화
아우라는 3년을 매일같이 꿈꿔 왔다. 이 검을 카를에게 꽂아 넣는 순간을.
새 황제를 찔렀으니 소란이 일어날 터였다. 그녀를 무릎 꿇리고, 목에 검을 대겠지. 어쩌면 바로 처형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우라는 두렵지 않았다. 그녀는 3년 전에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나 카를은 검은 망토로 찔린 옆구리를 가렸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아우라 황자비가-”
아우라는 흠칫 놀랐다.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낮고 두꺼운 음성. 소년의 흔적을 버린 완연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오랜 유폐 생활로 정신이 온전치 못한 모양이군.”
그가 가볍게 턱짓했다. 기사들이 재빨리 아우라를 둘러쌌다.
“본궁 4층 서쪽 복도 끝 왼쪽 방이 황자비의 방이다. 모셔 가도록.”
카를은 아우라의 방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똑똑히 들어 두라는 듯 아우라를 보며 덧붙였다.
“카사 제국의 황후가 될 분이니 극진히 모시도록 해.”
아우라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황후? 설마 인제 와서 부인 노릇이라도 하라는 건가?’
“하!”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한계를 넘은 분노가 폭소로 뒤집혔다.
“아하하하하!”
아우라의 마른 몸이 들썩였다. 푸석한 머리칼도 흐트러졌다. 신경질적인 웃음이 알현실을 채웠다.
기사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아무리 봐도 제정신이 아닌 이 여자가 새로운 황후라니.
아우라는 겨우 웃음을 가라앉혔다. 그녀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중얼거렸다.
“정신이 나간 건 대체 어느 쪽인지.”
청록빛 눈동자가 카를을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네 황후가 되느니 차라리 죽고 말지.”
“어째서?”
그는 참으로 태연하게 되물었다. 그 태도에 울컥한 아우라는 다짐했다. 가장 치욕적인 대답을 돌려주겠다고.
“너는 출생이 천하잖아.”
찰캉! 찰캉! 찰캉! 찰캉!
기사들이 순식간에 검을 뽑았다.
“폐하!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어떻게 저런 말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카를이 말했다.
“당장 그 검들 집어넣어.”
“하지만 폐하!”
“당장!”
맹렬한 기세에 기사들이 움찔했다. 그들은 그제야 하나둘 검을 넣었다.
카를이 아우라에게 다가갔다. 표정과 발걸음에 여유가 넘쳐흘렀다. 몸에 박힌 단검, 어머니에 대한 모욕. 그 무엇도 상관없다는 듯.
그는 아우라의 어깨를 잡고 조용히 속삭였다.
“네 말이 맞아. 나는 천출이지.”
카를의 입가에 비웃음이 번졌다.
“그래서 고귀한 네가 필요한 거야, 아우라.”
아우라는 말문이 턱 막혔다.
카를은 아우라를 이용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버렸던 물건을 다시 줍는 것처럼.
순간 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우욱.”
아우라가 입을 막고 주저앉았다. 세상이 어지럽게 돌았다. 누군가 온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헛구역질이 계속됐다. 하지만 속엔 게워 낼 것도 없었다.
아우라는 그대로 쓰러졌다. 정신이 어딘가로 아득하게 날아가는 듯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차라리 이 모든 게 탑에서 꾸는 악몽이었으면 좋겠다고.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황후 대관식이 딱 열흘 남았다.
아우라는 내내 황자비의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이 현실감이 없었다. 그저 아직도 탑에 갇힌 듯 멍하기만 했다.
기본적인 식사와 진료를 모두 거부했다. 음식을 먹고 치료를 받으면 그다음엔 드레스를 입고 구두를 신어야 할 것 같았다. 그 이후엔 대관식으로 끌려가겠지.
죽기보다 싫었다. 남은 인생을 카를의 곁에 있어야 한다니.
똑똑.
노크 소리에 이어 누군가가 들어왔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여인이었다. 그녀의 뒤로 시녀 한 무리가 따라왔다.
“황자비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여인은 허리를 최소한으로 굽혔다. 황궁의 시녀장이자 카를의 유모인 타샤. 그녀는 죽은 친모 대신 카를을 기른 여자였다.
아우라는 한때 타샤와 잘 지내려 애썼었다. 타샤가 몰락한 귀족 출신임에도 존대를 하고 상냥하게 대했다. 카를에겐 어머니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나 거리를 둔 건 타샤 쪽이었다. 그녀는 아우라를 영 마뜩잖아했다.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았다. 우연히 타샤와 시녀의 대화를 엿들었을 때였다.
‘카사의 차고 넘치는 귀족 영애들을 두고 더러운 제니아인과 결혼하시다니. 이런 치욕이 있나.’
타샤는 변함없어 보였다. 고집스러운 얼굴과 오만한 표정까지. 카를이 황제가 됐으니 어련할까 싶었다.
“전하. 도통 식사를 못 하신다고 하여 와 봤습니다.”
“카를이 보냈어?”
타샤의 표정에 괘씸함이 감돌았다. 아우라는 타샤와 카를 모두를 하대하고 있었다.
“듣던 대로 정신이 혼미하시군요. 상황이 상황인 만큼 식사부터 돕지요.”
여차하면 억지로 먹일 기세였다.
아우라는 화가 났다. 타샤도 타샤지만, 특히 카를에게. 자신의 상태를 보고받았을 텐데 고작 시녀를 보내다니.
와서 달래 달라는 어리광 따위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어물쩍 아우라를 다루는 태도. 그것을 도저히 참아 줄 수 없었다.
아우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타샤까지 행차를 한 마당이니 뭐라도 먹어야겠어. 일단 씻고 들지. 영 찝찝해서.”
“식사부터,”
“씻는다고 말했어, 타샤.”
“……준비하지요.”
잠시 후, 그들은 욕실로 갔다.
아우라는 아무렇지 않게 옷을 벗었다. 그녀는 왕녀이자 황자비였다. 시녀에게 몸을 보이는 건 예삿일이었다.
도리어 시녀들이 그 몸을 보고 경악했다. 갈비뼈는 다 드러나고 팔은 가시 같았다.
“많이 드셔야겠습니다. 송장이나 다를 바 없으십니다.”
아우라는 타샤의 말을 못 들은 척 욕탕에 들어갔다.
물은 적당히 따뜻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찬물을 써 왔던 아우라에겐 아니었다.
“뜨거워. 찬물을 더 넣도록 해.”
시녀가 찬물을 욕탕에 살살 흘려 넣었다.
“더. 아직도 뜨거워.”
시녀가 또 찬물을 넣었다. 수증기가 사라질 정도로 물이 식었다. 그래도 아우라는 뜨겁고 답답했다.
“더.”
“제가 살피겠습니다.”
타샤가 욕조 앞에 앉아 주름진 손을 물에 넣었다.
“더 넣으면 물이 차가워집니다.”
“나는 뜨거워.”
“감기라도 걸리시면 대관식을 어떻게 치르시려고요.”
아우라가 타샤를 물끄러미 보았다.
‘이 여자가 이렇게 주제를 모르던 사람이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과거의 자신은 너무 착했다. 이런 여자에게 절절매다니.
“시녀라면 대관식이 아니라 물 온도를 신경 써야지.”
“황자비 전하. 저는 황제 폐하의 유모입니다.”
“난 네 직급에 대해 말하고 있어, 타샤.”
타샤는 얇은 입술을 꾹 닫았다. 그녀는 시녀장이었고, 시녀장은 어쨌거나 시녀였다. 타샤는 상대하기 싫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참…… 여러모로 고장이 나셨군요.”
“고장?”
아우라가 타샤의 팔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그녀를 힘껏 욕탕으로 당겼다.
“으, 으악!”
풍덩!
시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입을 틀어막았다.
“시녀장님!”
“시녀장님! 어, 어떡해!”
아우라는 허우적대는 타샤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쿠, 쿨럭! 쿨럭!”
물을 먹은 타샤가 캑캑댔다. 얼굴은 창백하게 질리고 머리는 해초처럼 늘어졌다.
“이런. 네 꼴이야말로 송장 같은데.”
“히, 히익…….”
“내가 고장이 났다고? 그럼 당장 네 주인을 데려와. 그 자식이 만져 보면 알겠지. 이 물이 뜨거운지 차가운지.”
“으흐…….”
“나는 네 주인과 할 말이 있으니까. 어서.”
아우라가 타샤를 밀듯이 멱살을 놓았다.
“으하악!”
타샤는 뒤로 넘어가며 다시 물에 빠졌다. 그녀는 허우적대다가 겨우 욕탕을 빠져나왔다. 축 처진 치마를 끌며 도망가는 꼴이 볼품없었다.
욕실은 고요해졌다. 시녀들은 구석에서 잔뜩 굳은 채 서 있었다. 아우라가 욕탕 벽에 머리를 툭 기댔다.
“뭘 하고 있어? 찬물.”
“예? 예!”
시녀 하나가 얼른 찬물을 퍼 왔다. 탕에 물을 붓는 손이 덜덜 떨렸다. 아우라가 그 손을 물끄러미 보며 물었다.
“무서워?”
시녀가 기겁하며 놀라더니 대뜸 엎드려 빌었다.
“죄, 죄송합니다! 황자비 전하. 죄송합니다…….”
아우라는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이런 걸 무서워하다니.’
두려움을 언제 마지막으로 느껴 봤던가. 탑에서 가장 먼저 잃은 게 두려움이었다. 어둠이 지속되면 공포부터 무뎌지는 법이었다.
아우라는 천천히 욕탕에 몸을 담갔다. 굳어 있던 몸이 서서히 풀렸다. 제대로 된 목욕이 좋긴 좋았다.
“후우…….”
아우라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안개가 낀 것 같던 머리가 점점 맑아졌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카를은 왜 나를 버리지 않는 걸까.’
죽기를 바랐던 부인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찌르기까지 했는데 죽이거나 폐위시키긴커녕 황후가 되라고 강요하다니.
‘그래서 난 고귀한 네가 필요한 거야, 아우라.’
고귀.
아우라는 그 말에서 힌트를 얻었다.
‘카를은 ‘트루 블러드’가 필요한 거야.’
트루 블러드란 황실이나 왕실의 적자, 적녀를 뜻했다. 이들은 존재만으로 국민의 동경을 받는다. 한때 아우라가 그랬던 것처럼.
카를은 트루 블러드와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반역으로 황위에 올랐다. 국민의 지지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상황.
‘트루 블러드인 부인을 얻는 게 황권 안정에 도움이 될 거야. 하지만 어느 황실이 반역자에게 적녀를 내어 주겠어? 그러니 결국 나를 이용하자는 계산속이겠지.’
계산. 그것만큼 카를에게 어울리는 단어가 있을까.
예전부터 그랬다. 그는 명석한 머리와 뛰어난 검술 실력을 숨겼다. 남들보다 좀 더 노력할 수 있는 인내심도. 황태자의 견제를 받아 봤자 손해니까.
‘데블라로 떠난 것도 일종의 계산이었겠지.’
반역을 위한 힘을 기를 때까진 숨어 있는 게 이득이니. 자신의 부인이 겪게 될 고통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그리고 그의 계산은 맞아떨어졌다. 이렇게 황위에 오르지 않았는가.
아우라가 가만히 입술을 씹었다.
‘더는 일이 네 뜻대로 흘러가게 두지 않을 거야.’
잠시 후, 아우라는 욕실을 나왔다. 목욕만으로도 얼굴빛이 한결 맑아졌다. 좋은 비누로 감은 머리칼에 윤이 돌았다. 언뜻 예전의 아름다움이 비치는 듯했다.
아우라는 황자비의 방으로 돌아왔다. 기사복 대신 셔츠를 입은, 머리를 말끔히 넘겨 매끈한 이마를 드러낸 남자가 창가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를이었다.
그는 냉정한 눈빛으로 물었다.
“유모를 익사시키려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