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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화 (1/144)

나를 증오하는 당신을 위하여

1화

아우라는 제니아 왕국의 유일한 왕녀였다.

상앗빛 백금발과 청록색 눈동자, 왕자들을 뛰어넘는 지성과 교양, 고귀한 혈통에 어울리는 긍지.

왕국의 모든 이가 그런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다.

따뜻하고 충만한 삶이었다. 카사 제국에서 국혼 제안이 오기 전까지는.

왕녀의 정략결혼은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국왕 부부는 내키지 않았다. 아우라는 열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귀한 고명딸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평민 후궁의 출생인 4황자였다.

난감해하는 국왕 부부를 설득한 이는 아우라였다.

“결혼할게요. 그게 왕족의 의무라면 할 수 있어요.”

아우라는 그렇게 혼자 카사 제국으로 갔다. 그녀는 결혼식에서 자신의 남편이 될 카를을 처음 봤다.

그는 호리호리한 체구의 미소년이었다. 창백한 피부에 칠흑 같은 머리칼과 눈동자. 그리고 무심한 듯 직설적인 시선.

카사의 황가는 모두 화려한 금발이었다. 카를은 그 빛 사이에 잠긴 어둠 같았다.

‘……아름다운 어둠이야.’

아우라는 그에게 첫눈에 반했다.

결혼식이 끝난 첫날밤. 어린 부부는 침대에 나란히 앉았다. 아우라는 이불을 꽉 쥐었다. 카를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떨리고 긴장됐다.

침묵하던 카를이 입을 열었다.

“난 네게 아무것도 줄 수 없어.”

아우라는 고개를 돌렸다. 카를은 권태롭게 허공을 보고 있었다.

“만나는 남자가 있다면 만나. 새로 만들어도 좋고.”

그 말만을 남긴 채 카를은 방을 나가려 했다.

“……!”

침대를 벗어나던 카를이 멈칫했다.

그의 소매를 잡은 작은 손. 그 손은 희고 가늘었지만 어떤 용기가 담겨 있었다.

카를이 말했다.

“바보 같은 애로구나. 사람들이 숙덕거리는 소릴 들었잖아.”

들었다. 그의 외모가 하필 천한 어머니를 닮았다는 것과 그 어머니조차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것도. 공부도 검술도 그저 그런 허울뿐인 황자라는 것도.

“내게 매달려 있으면 너도 불행해져. 네 행복은 네가 알아서 찾아.”

“제 이름은 아우라예요.”

그 떨리는 목소리에 카를이 서서히 시선을 들었다. 그는 비로소 제 부인을 제대로 마주 보았다.

“사람들이 우리더러 부부라고 했어요.”

“……그래서?”

“사실은 조금 무서워요. 갑자기 결혼하게 된 것도, 이곳 황실의 분위기도. 하지만 불행하진 않아요.”

아우라가 웃었다. 수줍고도 진실한 미소였다.

“같이 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우리 둘 다.”

카를은 무심한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다만 아주 천천히 목울대가 오르내렸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침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툭.

아우라의 손이 이불로 떨어졌다.

그날 밤 아우라는 조금 울었다. 카를이 원망스럽진 않았다. 정략결혼이 싫었을 수도 있으니까. 다만 제니아의 가족이 무척 그리웠다.

그렇게 다음 날 아침, 아우라가 부은 눈으로 침실을 나섰을 때였다.

“!”

수선화 한 다발이 불쑥 눈앞에 나타났다. 얼기설기 어설프게 엮은 꽃다발이었다. 노란 수선화들 사이로 카를의 얼굴이 보였다.

“카를이라고 불러. 존대할 필요는 없어. 동갑이잖아.”

놀란 것도 잠시, 아우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가 양손을 내밀었을 때였다.

“이걸 받으면, 네가 내 유일한 목적지가 되는 거야.”

“…….”

“그래도 괜찮다면 받아.”

누군가의 유일한 목적지가 되는 것. 그건 왠지 겁나는 일 같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올곧은 사랑을 주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우라는 수선화 꽃다발을 품에 안았다.

“고마워, 카를.”

카를이 엷은 미소를 지었다.

아우라는 카를이 좋았다. 남자답게 과묵한 성격도, 소문과는 다른 성실함과 명철함도.

카를과 아우라는 주로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책꽂이에 나란히 등을 기대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속을 터놓으며 비밀을 만들어 갔다.

아우라가 책장을 넘기는 카를의 손끝을 만졌다. 하루가 다르게 그의 손에 반창고가 늘어갔다. 혹독한 검술 훈련의 흔적이었다.

“왜 사람들은 네가 게으르고 무기력하다고 생각할까? 사실 책도 많이 보고 검술도 잘하잖아.”

“숨기는 거야.”

“왜?”

카를이 대답 대신 아우라를 응시했다. 낯선 느낌에 아우라가 어색하게 웃었다.

“뭐야. 왜 그렇게 봐?”

카를이 아우라의 뺨을 감쌌다. 생경한 반창고의 느낌에 아우라가 움찔했다. 그 순간, 카를이 입을 맞춰 왔다.

첫 키스였다. 두 사람 모두.

본능처럼 따뜻함을 찾아갔다. 오래도록 서로를 파고들었다. 아우라는 깨달았다. 진정으로 달콤한 것은 카를에게 있다는 것을.

카를이 속삭였다.

“나는 너만 지키면 되니까.”

행복한 나날이었다. 카를이 곁에 있고, 있어 줄 거라 믿었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

몇 개월 후, 황제가 병으로 인해 앓아누웠다.

황태자는 조급해졌다. 그는 적자라는 것 외엔 내세울 게 없었다. 어떻게든 능력을 증명해 권력을 무사히 이어받아야 했다.

그가 선택한 방법은 정벌이었다. 그리고 그 첫 표적은, 바로 제니아 왕국이었다.

제니아는 며칠 만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왕가는 모두 처형당했다. 대륙 최고의 마법사 보유국이 그렇게 멸망했다.

황태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아우라를 황궁의 북쪽 탑에 유폐했다. 반역의 꼬리를 자른다는 명분이었다.

유폐 기간은, 죽을 때까지.

탑은 끔찍한 곳이었다. 춥고 더러웠으며, 음산했다.

공포에 질린 아우라가 굳게 잠긴 문을 긁으며 외쳤다.

“카를! 카를을 만나게 해 줘! 제발……! 카를!”

남은 희망은 하나뿐이었다. 자신을 지켜 주겠다는 카를의 약속.

그러나 카를은 끝내 오지 않았다.

그녀의 목이 쉬고 손톱이 다 빠졌을 무렵이었다. 문밖에서 경비병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 카를 전하가 데블라로 정벌을 하러 가셨다고?”

데블라. 카사의 최북단에 위치한 무국적 지대였다. 흉포한 마물이 많아 ‘기사들의 무덤’이라고 불린다던.

‘카를이…… 데블라로?’

“말이 좋아 정벌이지. 황태자 전하를 피해 도망치신 게 아닌가.”

“황자비만 불쌍하게 됐구먼.”

“불쌍한 정도가 아니야. 카를 전하께서 떠나기 직전 전언을 보내셨어. 이걸로 황자비를 죽여 달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놀란 건 문밖의 경비병도 마찬가지였다.

“엥? 아무리 그래도 부인인데 죽이라고?”

“그 부인 때문에 발목 잡히기 싫으시다, 이거지. 일종의 새 출발이랄까.”

아우라는 고개를 저었다.

‘나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카를이 그럴 리 없어.’

경비병들은 곤란한 듯 말했다.

“그래도 난 못 하겠는데. 나중에 무슨 죄를 뒤집어쓸 줄 알고.”

“나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말인데…… 이건 어때?”

잠시 후.

철컹!

바닥의 배식구가 열렸다. 공포에 떨던 아우라가 흠칫 놀랐다.

쨍강.

단검 하나가 감옥으로 들어왔다.

“카를 전하께서 자결을 명하셨소. 그쪽도 그 꼴로 사느니 죽는 게 낫겠지.”

아우라의 눈빛이 어둠에 잠겼다. 그건 분명 카를의 검이었다.

그날 밤, 아우라는 죽으려 했다. 도저히 남은 생을 살아갈 엄두가 안 났다.

덜덜 떨며 검으로 손목을 그었다. 불에 덴 듯 뜨겁고 아팠다. 그런 격렬한 고통은 처음이었다.

그 순간, 아우라는 자신에게 물었다.

‘내가 왜 죽어야 하지?’

쨍강-!

아우라는 검을 버렸다. 그리고 치맛자락으로 상처를 꾹 눌러 지혈했다. 죽을 만큼 아파서 죽을 만큼 울었다. 하지만 죽진 않았다.

“……살 거야. 살아서…… 그 낯짝을 꼭 한 번은 다시 보겠어.”

지옥 같은 탑살이가 시작됐다. 식사는 썩어 가는 채소뿐이었고, 얼음장 같은 물은 더러웠다. 쥐와 벌레들이 들끓으며 밤낮으로 그녀의 신경을 긁었다.

하지만 가장 큰 고통은 버려졌다는 절망감이었다. 그리고 그 절망감은 곧 카를에 대한 증오로 뒤집혔다.

아우라는 변해 갔다.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던 모습으로.

찬란하게 빛나던 금발은 잿빛으로 바랬고, 눈빛은 탁해졌다. 복수심과 오기는 왕족의 긍지를 몰아내고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그렇게 3년이 지났다. 그리고 폭설이 쏟아지던 날, 오랜 투병 끝에 황제가 서거했다.

장례가 치러지던 밤이었다.

황궁이 소란스러웠다. 아우라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전쟁이라도 난 듯 여기저기서 연기가 올라왔다.

‘반란이라도 일어난 건가.’

그때였다.

철컹, 끼이이…….

영원히 잠겨 있을 것 같던 문이 열렸다. 문을 박차고 검은 옷을 입은 기사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아우라에게 무릎을 꿇었다.

“아우라 황자비 전하. 황제 폐하께서 전하를 모셔 오라 명하셨습니다.”

“네 황제가 누구기에.”

기사들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고운 진흙처럼 가라앉은 분노. 그런 분노가 그들을 압도했다.

“카를 폐하십니다.”

침묵이 흘렀다. 기사들이 하나둘 고갤 들어 그녀를 보았다. 아우라는 대뜸 실소를 터트렸다.

“하하…… 염치도 없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이 모든 상황이.

잠시 후, 아우라는 기사들의 부축을 받으며 탑을 나섰다.

밖은 장관이었다. 땅을 덮은 눈, 눈을 덮은 시체, 시체를 덮은 피, 그 위를 다시 덮은 눈.

아우라는 그 눈을 맨발로 밟았다.

그녀는 기사들을 따라 황궁으로 들어섰다. 눈과 피가 뒤섞인 발자국을 남기며.

알현실 문이 열렸다. 피비린내가 훅 풍겨 왔다. 황실군이 하나도 남김없이 죽어 있었다.

저 멀리 황좌에 카를이 앉아 있었다. 그의 발아래엔 세 구의 시신이 나뒹굴었다. 황태자와 두 명의 황자였다.

완벽한 반란. 피로 빚어낸 새 황제의 탄생이었다.

아우라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카를 옆을 지키던 기사들은 그녀의 몰골에 깜짝 놀랐다. 가시처럼 마른 몸과 생기 없는 눈빛. 그녀는 마치 갓 관을 탈출한 유령 같았다.

그 자리에서 오직 카를만이 그녀를 담담히 바라보았다.

그는 황좌에서 일어나 아우라에게 다가갔다. 아우라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머리 하나는 더 자란 듯한 키, 벌어진 어깨와 두꺼워진 몸, 냉정과 열정을 한껏 담은 듯한 시선 그리고…… 피비린내.

무기력한 소년은 전사가 되었다. 아니, 황제가 되어 세상을 얻었다. 아우라가 모든 걸 잃는 동안.

아우라가 카를에게 제 몸을 던지듯 안겼다. 그리고 그에게 가만히 속삭였다.

“개자식.”

“!”

카를이 한 걸음 물러났다. 그의 옆구리에 단검이 깊이 꽂혀 있었다. 검붉은 피가 주룩 흘렀다.

아우라는 카를을 보고 웃었다.

그녀는 이제 죽어도 좋았다. 아니, 죽을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이 잔인한 인생에서 홀가분하게.

……카를은 그렇게 해 줄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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