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나약하게 굴지 마, 하견. 날 실망시키지 마. 혼자 복수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던 거, 그간의 정 생각해서 내가 도운 거야.”
죽어 마땅한 사람.
어린 그와 그의 어머니를 죽이려 불을 내고, 결국엔 그의 어머니가 죽도록 내버려 둔 사람.
그러고도 모자라 아버지 문제로 윤정서를 협박하고, 그녀가 세상의 비난을 받게 만든 사람.
저지른 악행을 나열하면 끝도 없을, 어쩌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 득일 사람.
은호는 정말로 친절했다.
그에게 이런 기회를 떠먹여 주다니 말이다.
“그래. 맞네, 네가 날 도왔네. 동생이 이러는 동안 형으로서 받아 먹기나 하고, 면목이 없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이 그늘이 져 보이지 않았다.
정서는 제 손을 이끄는 은호의 손목을 쥐었다.
나갈 수 없었다. 이런 곳에 견을 혼자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나가, 윤정서.”
그러나 견의 생각은 달랐다.
설령 그가 하 회장이 죽도록 내버려 두든, 사람을 불러 뒤늦게라도 살리든.
어떤 선택을 하든 윤정서는 오늘 여기서 벌어진 일과 무관해야만 했다.
“우선 여기서 나가는 게 좋겠다, 차은호.”
“잘 생각했어요.”
은호는 정서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그녀는 끌려가는 대신 은호가 쥐어 당긴 손을 떼어냈다.
“여긴 내가 있을게.”
“지금 고집부릴 때 아니에요.”
“나가라고.”
“언제까지 저 새끼 때문에 멍청하게 굴 건데, 똑똑한 사람이.”
은호가 답답하다는 듯 외치자, 정서가 싸늘한 얼굴을 한 채 그를 올려봤다.
처음 보는 정서의 얼굴에 당황한 은호에게 건네진 말 역시 차갑기 그지없었다.
“나 지금 네 선택 존중하잖아. 뭐라고 안 하잖아. 그러니까, 너도 가. 귀찮게 굴지 말고.”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끝내 정서의 입술 새로 웃음이 샜다.
견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어서 나가라 재촉하는 마음이 담긴 눈빛임을 알고 있었으나, 그녀의 결정은 완고했다.
“이제야 겨우 시작이야, 내 사랑은.”
은호의 얼굴이 허물어졌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정서는 제가 아무리 설득한다고 저의 손을 잡지 않을 것이다.
입안이 썼다.
그러나 더 지체할 수는 없었다. 은호는 하는 수 없이 병실을 빠져나왔다.
미리 매수해둔 인력이 CCTV를 지우는 동안 그 역시 할 일이 많았다.
“미친 새끼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혼자 욕을 중얼거리던 하 회장은 침대에 딸린 비상벨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주사된 약이 무엇인지 알았으니, 이제 주치의를 불러야 했다.
그러나 몸이 여의찮았다.
벌써 손이 떨렸고 떨어지면서 다친 다리가 자꾸 말썽을 부렸다.
견은 정서에게 두었던 시선을 거두고 하 회장의 앞에 섰다.
진로를 방해하듯 덜컥 주저앉아 눈을 맞추는 그의 모습에 하 회장이 당황했음은 물론이었다.
“비켜라.”
“소란을 못 일으키는 이유는?”
“뭐?”
“아까 간호사한테 살려달라고 할 수도 있었잖아. 그러지 못한 이유가 뭐냐고 묻는 거야.”
“네놈이 감히, 건방지게…….”
“약점 잡혔지. 증거라도 있대? 네가 차은호 엄마 죽인.”
“웃기는 소리하지 마. 내가 얼마나 깔끔하게 정리했는데.”
“그래? 그럼 죽이긴 했단 소리네.”
당황한 하 회장이 입을 벌린 채 멍하니 견을 보았다.
견은 손을 뻗어 하 회장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효심이 지극한 아들이 부모에게 하듯이 아주 다정한 손길이었다.
“이렇게 시시하게 무너지지 마시지 그랬어요, 아버지. 그동안 쌓아둔 업보 청산은 하고 가셨어야죠. 제가 그간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데, 이러세요. 아쉽고 아깝잖아요.”
“…….”
하 회장은 대꾸 없이 그를 지나쳐 벨로 손을 뻗었다.
자꾸만 미끄러지는 그의 몸이 꼭 살충제를 맞은 벌레처럼 뒤집힌 순간, 정서가 견의 뒤에 섰다.
견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네가 이러면 내가 잔인해질 수 없잖아, 윤정서.”
“나도 그냥 목격자가 되어 주는 것뿐이야.”
“뭐?”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을 내가 지켜봐 줄게. 평생 기억해 줄게. 이제 내가 네 옆에 있을게.”
“…….”
하 회장의 입에 거품이 일었다.
호흡이 거칠어져 가슴이 크게 부풀자, 두 사람은 말이 없어졌다.
이대로 두면 하 회장은 죽을 것이다.
견은 고개를 비튼 채 하 회장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지겹다, 지겨워.”
짧게 말하고선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비상벨이 울리자 복도가 소란스러워졌다.
정서가 손을 뻗어 견의 손을 찾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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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렇게 보는 것도 마지막이네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검사님도 없는 죄 만들어서 무고한 사람 고생시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이고, 이런. 여전히 성미가 사나우시네요. 변호사 업계로는 영원히 복귀를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하 회장님 사건 담당하신 검사분을 아시면 잘 좀 부탁드려요. 관련된 죄 모조리 잘 찾아서 형량 잘 때려 주시라고.”
“비정한 며느리네요. 고부갈등, 뭐 비슷한 거라도 겪으셨나.”
정서는 대답하는 대신 싱긋 웃으며 돌아섰다.
견의 사건은 혐의없음으로 종결되었으나 그간 떨어진 주가를 회복하고 소란스러운 회사를 정리하는 일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더구나 견의 혐의가 고스란히 하 회장의 몫이 되어 백영은 크게 휘청였다.
“응, 난 끝나서 막 나왔어.”
― 늙은이들이 뭔 말이 그렇게 많은지 여긴 아직 끝나려면 멀었어. 하 회장을 대신해 누굴 앉혀야 할지에 대해 떠들어 대는데. 성가셔 죽겠다.
하 회장은 다행히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중병에 걸렸다 우기며 계속해 검찰 출석을 거부하고는 있었지만 버티는 일에도 한계가 있어 보였다.
그를 고발하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며 재벌의 파벌 싸움과 핏줄에 의해 이뤄지는 고용 승계에 대한 문제가 불거졌다.
기회를 틈타 백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이 앞다퉈 견을 불러대는 바람에 정서와 견은 자기 전에나 겨우 만날 수 있었다.
“무사히 빠져나와서 회사에서 봐.”
전화를 끊고 난 뒤 정서는 검찰청을 빠져나와 백영 엔터테인먼트로 향했다.
수선스러운 기운이 맴돌기는 했으나 그동안 이와 비슷한 일을 많이 겪었던 탓인지 직원들은 금세 자신의 업무에 집중했다.
오히려 하 대표에 대한 동정론이 돌아 애사심을 내비치는 직원도 있었다.
대표실과 같은 층에 생긴 미래전략팀실로 들어간 정서는 저를 맞이한 여자 직원에게 웃어 보인 뒤 자리에 앉았다.
잠깐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검토해야 할 서류가 또 수북이 쌓여있었다.
“팀장님,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뭔가요.”
“저번에 대표님이 말씀해 주셨는데 팀장님이랑 대표님께서 원래 아는 사이셨다고 하셨던 것 같아서요.”
“아. 맞아요. 잠깐 고등학교 같이 다녔었어요.”
“대학도 같이 다니셨다던데, 한 학기 정도?”
“대표님께서 그런 얘기도 했어요?”
대학 시절에 관한 얘기는 따로 나눠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새내기 사원은 정서가 직접 고른 여자로 사회초년생 특유의 어수룩함은 있었으나 웃는 모습이 기분 좋은 사람이었다.
정서가 뽑은 직원이니 특별히 대해 줘야겠다고 말하더니, 정말 먼저 말도 걸었던 모양이다.
“네. 진짜 로맨틱하세요, 두 분.”
“……무슨 얘기를 들었는데요.”
“그 흉터요. 대표님 입가에 난 흉터. 그거 팀장님 지키려다 생긴 영광의 상처잖아요.”
흉터?
그 얘기는 들은 적이 없는 얘기였다.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정서의 반응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송 사원은 참새가 재잘거리듯 말을 이어 나갔다.
“워낙 인기가 좋아서 팀장님만 따라다니는 스토커가 있었다면서요. 팀장님 같은 과 선배랬나? 팀장님 좋아하는데 팀장님이 안 만나 주니까 앙심을 품고 비가 막 쏟아지는 날 도서관에서 공부 중이던 팀장님을 찾아가서 확!”
송 사원이 손을 들어 누군가를 찌르는 시늉을 해 보이다 끔찍하다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없는 얘기를 지어 할 사람이 아니라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제야 어렴풋이 한 사람이 생각났다.
학과 선배 중 복학을 하고 정서와 같은 조가 되었던 남자는 정서가 아르바이트하는 곳에까지 종종 나타났다.
아르바이트비를 줄 테니 저와 어울리자는 그 말이 얼마나 같잖던지.
정서는 싸늘한 얼굴로 수업 중 성희롱의 예시로 그와 있었던 일화를 까발렸다.
비가 쏟아지던 날, 도서관에 있던 그녀를 밖으로 불러내는 그 흉흉한 얼굴까지 떠올리자 오랜 의문이 풀렸다.
왜 그렇게 부르고 나서 정작 나갔더니 자리에 없었나 싶었지.
곧 경찰차와 구급차가 학교에 도착하고 그 선배가 크게 다쳐 휴학을 했단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창피해서 도망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설마, 그때.
그때 자신을 구해 준 것이.
“아무튼 진짜 영화 같아요.대표님 얘기 들으니까 이제껏 제가 한 연애나 사랑은 다 거짓말 같더라니까요. 어…… 팀장님?”
정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급하게 나오느라 외투를 내려둔 것도 잊은 채, 마침 열리는 엘리베이터로 뛰어든 정서를 끌어안은 것은 견이었다.
“뭐야, 어디 가. 나 이제 왔는데.”
“……너, 너였어?”
“응?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일 있었어, 그새?”
“네가……. 네가 그때, 그래서 유학을.”
두서없이 쏟아지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하는 견의 천진한 얼굴을 들여다보던 정서가 조심스럽게 흉터를 쓸어내렸다.
그리고 곧장 그를 끌어 입술을 맞대었다.
예기치 못한 반응에 놀라는 것도 잠시 견은 이내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춰 주며 능숙히 그녀의 입술 새를 벌려 파고들었다.
느긋하게 엘리베이터의 닫힘 버튼을 누르는 손에는 그녀의 손에 끼워진 반지와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