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모든 일들은 빠르게 진행됐다.
하 회장은 면회를 전부 거부했다.
정확히는 하 회장의 주치의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이유로 면회를 전면 금지 시켰다.
깨어났다는 거네, 안 죽었다는 거네.
견은 정서의 연락을 받고 그렇게 생각했다.
검사들은 원하는 답을 들을 때까지 조사를 멈추지 않겠다는 듯 굴었고 견이 건넬 수 있는 답은 늘 똑같았다.
“이수연 비서의 주장에는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바른대로 말하는 게 좋을 겁니다. 서로서로 피곤한 일 만들지 말자고요. 다른 작품들은 누구에게 부탁해 구매했습니까. 박찬혁 실장? 아니면 김민영 비서?”
“그러니까 왜 자꾸 피곤하게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지? 나는 아닙니다. 내가 비자금 조성을 목적으로 미술품을 구입하려 했으면 더 좋은 명목이 몇 개나 있어. 작품에 쓰겠답시고 한 장면을 위해 값비싼 미술품을 구입하는 건 일도 아니란 말입니다.”
“대표님.”
정서가 견을 제지하듯 목소리를 내었다.
가볍게 손등을 토닥이는 그녀의 손길을 본 이 검사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시선을 돌렸다.
어제 조사받았던 수연이 떠올랐다.
무슨 고장 난 테이프를 틀어둔 듯 ‘하견 대표님께서 지시하셨습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하던 그녀는 결국 그가 던지듯 건넨 말에 반응했다.
‘회장님한테는 뭘 약속받았어요? 아, 이건 오프더레코드. 어차피 지금은 녹음도 안 되고, 걱정할 거 없으니 말해 봐요. 내가 궁금해서 그래. 집행유예를 받더라도 기록은 남잖아. 기사화도 됐고.’
그녀는 텅 빈 눈동자를 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긴 조사에 지친 기색도 하나 없이 성실히 준비한 자료를 모조리 제출해 홀쭉해진 핸드백을 들고선.
‘그게 중요한가요.’
‘예?’
‘그냥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본인이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을 한 건지. 그래서 결국 어떤 일까지 겪게 됐는지.’
그때는 수연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이제 좀 윤곽이 잡혔다.
왜 모든 일을 견이 지시했다 주장하면서도 견 역시 피해자라 말했는지, 실질적으로 횡령을 지시하고 꼬드긴 것이 정서라 말했는지를 말이다.
“기사 보셨죠. 백영 재단에서 재단의 장학생을 압박한 사례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건 하 대표님께서 백영 엔터테인먼트 본부장직에 오르기 훨씬 전부터 이뤄지던 일이고요.”
“그러니까 왜 이 타이밍에 그런 기사가 나느냔 말입니다. 하곤 회장님은 쓰러지고 그 아들인 하견 씨가 이렇게 잡혀 온 이 시점에. 마치 누가 사주해 쓴 기사 같잖아요?”
“이거 뭐, 답정너네. 정해져 있는 답 들을 때까지 계속 이럴 거면 서로 시간 소모 그만하죠. 어차피 원하는 답 나는 못 주니까 없는 증거 찾으려 보강 수사를 하든, 날밤을 까든 나는 좀 빼고 해요. 보시다시피 내가 신혼이라, 일정이 아주 바쁘거든.”
견은 이만 가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한 채 자신을 올려 보는 이 검사에게 정서가 지난 일 년간 자금 운영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알 수 있도록 영수증 하나 빠트리지 않고 모조리 복사한 서류를 건넸다.
“이게 다 뭡니까?”
“자료요. 수사에 도움이 되실까 해서 제가 특별히 손수 정리해 가져왔습니다.”
“환상의 커플이네.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칭찬 감사드려요. 그럼 다음에 뵙죠.”
견은 정서가 조사실을 빠져나올 수 있도록 문을 잡아 주었다.
긴 복도를 걸으며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결혼식 이후 일주일, 두 사람은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보냈다.
기자들은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해왔고 투자자들은 투자를 철회하겠다 협박을 해오기도 했다.
“고생했어.”
“대표님도.”
기다리고 있던 기사에게 대충 인사를 한 뒤 견은 정서를 차에 태웠다.
분명 조사실에 들어갈 때만 해도 날이 밝았는데 해가 꼬박 져서 이제는 온통 어둠이었다.
그가 맞은편 문으로 향해 차에 오르자 멀리서 기다리던 기자 몇 명이 그들을 발견하고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디로 모실까요.”
“병원으로 가요.”
“알겠습니다.”
정서는 차창에 고개를 기댔다.
그들의 결혼식에서 비가 왔던 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연일 맑고 청명한 날씨가 지속됐다.
백영 그룹 내에선 하 회장의 건강 이상설이 돌았고, 아들인 견마저 수사를 받고 있으니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하단 목소리가 불거지고 있었다.
“기댈래?”
견이 자기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정서와 눈을 맞췄다.
정서는 가만히 견을 바라보다 얌전히 몸을 기울여 견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탄탄하고 따뜻한 품은 여전히 좋았으나, 가끔 불안한 마음이 일렁이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지치지 마.”
견이 불쑥 말했다.
정서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자 다정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견의 얼굴이었다.
돌이켜 보면 견은 종종 이런 얼굴로 그녀를 눈에 담았다.
“안 지쳐.”
“도망가고 싶어지면 쌩하니 갈 거잖아, 너.”
“네가 날 구했어.”
“……어?”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널 구할 차례야.”
농담처럼 던진 말에 돌아온 정서의 답은 진지하기만 했다.
정서는 제 아버지에게서 자신이 어떻게 벗어났는지 알고 있었다.
영원히 못 잊을 악행을 저질렀을 때, 만약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삶을 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견이 있어 줬기 때문에 그녀는 온전히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엔 견이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이 있어 줄 차례였다.
설령 그게 끔찍하고 두려운 일이라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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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아직 면회 금지라……. 죄송하지만, 오늘은 그냥 돌아가셔야 할 것 같아요. 시간도 너무 늦었고.”
“열어요, 문.”
“아무리 대표님이셔도 저희 원칙이…….”
아니나 다를까 병실 앞에서 제법 긴 실랑이가 이어졌다.
정서가 보호자의 접견을 이토록 오래 막는 것이 도의적으로 옳은지 따져 물을 때였다.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문 안쪽에서 들렸다.
곧 침대에 누운 누군가가 버둥거리듯 무언가가 덜컹거리는 볼썽사나운 소리가 이어졌다.
“무슨 일이죠?”
정서의 물음에 놀란 간호사가 문을 열려 손을 가져다 댔으나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안쪽에서 누군가 잠근 듯했다.
“환자분, 괜찮으세요! 회장님!”
답이 없었다. 다급하게 카운터로 달려가 열쇠를 찾기 시작한 간호사를 뒤로한 채 견이 문에 귀를 대고 기척을 확인하는가 싶더니 정서에게 손을 뻗었다.
“위험하니까 물러나.”
“뭐 하려고. 너 그러다 다쳐.”
“됐어.”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던 견이 앞으로 빠르게 달려 나가며 발로 문을 찼다.
그러자 고리 부분이 덜컹거리며 금이 갔다.
한 번 더 발길질을 해 완전히 부순 뒤 문을 연 견의 눈앞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엎드린 채 누군가를 노려보는 하 회장이었다.
그리고 하 회장의 시선 끝에 선 것은…….
“차은호.”
정서가 놀란 듯 은호의 이름을 불렀다.
대충 몸에 걸쳐두었던 가운을 벗어 던진 은호가 한숨을 깊게 내쉰 뒤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시큐리티 팀 불러 주세요, 김 간호사.”
놀란 듯 뛰어온 간호사가 황급히 하 회장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을 때였다.
하 회장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나가!”
“환자분, 저 보세요.떨어지셨나요? 통증이 느껴지시는 곳은 없으세요?”
“나가라고, 당장.”
상황이 단번에 파악되지는 않았다.
면회가 불가한 상황에서 은호가 어찌저찌 하 회장의 병실에 침입했고, 하 회장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면 하 회장은 지금 도움을 청하는 것이 옳았다.
그런데 오히려 자신을 도우러 온 사람을 쫓아내다니. 꼭 무언가를 숨기려는 사람 같았다.
“나가 보세요. 문제가 있으면 제가 부르겠습니다.”
“아무리 그러셔도 원칙상…….”
“더 시끄러워지는 건 원치 않으실 것 같은데. 책임은 내가 질 테니, 나가 봐요.”
견이 다시 한번 부드럽지만 완고한 목소리를 냈다.
간호사가 하는 수 없다는 듯 병실을 빠져나가고 정서는 본능적으로 문을 닫았다.
여기서 오고가는 말이나 행동이 바깥으로 새어나게 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너희들도 나가.”
“회장님. 여기서 저 새끼가 회장님 죽이면 우리가 유일한 목격자가 되어드려야 하는데, 내보내셔도 되겠어요?”
견은 그렇게 말하며 은호와 눈을 맞췄다.
격분한 하 회장이 무어라 고함을 질렀으나 견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은호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뭐 해. 면회 안 된다고 해서 우리도 겨우 들어왔는데.”
“조사받느라 바쁜 거 아니었어? 효자네. 조사 끝나자마자 아버지부터 찾고.”
“내 효심 운운하기 전에 목적부터 밝히지.”
은호의 시선이 일순 정서를 향했다.
정서는 하 회장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눈에 띄는 외상은 없고 침구가 흐트러진 걸로 봐서는 낙상 사고가 일어난 듯했다.
움직이기 불편한 듯 무릎을 움켜쥔 모양새가 통증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다행히 바닥에 떨어진 주사기나 약물은 없어 보이고, 위협이 될만한 흉기도 없다.
은호가 불손한 목적을 가지고 찾아왔다면 하 회장을 깨우지 않고 일을 저지르는 편이 훨씬 편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단순히 대화를 하러 온 걸까.
“아뇨, 유감스럽지만 틀렸어요.”
“……뭐?”
정서의 생각을 고스란히 읽은 듯 느지막이 입을 연 은호가 걸음을 옮겨 하 회장에게 다가갔다.
하 회장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렇게 크고 정정하던 사람이 이렇게 작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죽이러 왔으니까, 내가.”
“은호야.”
“대신 기회는 줄게, 하견. 이건 마지막 내 자비예요, 하 회장님. 너 같은 쓰레기 새끼한테 주어질 마지막 동아줄이고. 버려져 죽는 건, 어쩔 수 없을 테고.”
“그게 무슨 소린지 설명해.”
견이 차분한 음성으로 나직이 말했다.
은호가 시선을 돌려 그를 보았다.
“백영 그룹의 하곤 회장. 병원 측 실수로 인슐린 과다 복용 후 저혈당 쇼크로 사망.”
“…….”
“여기서 한 시간만 벌어 주면 나올 기사의 제목이야.”
“…….”
“미술품을 사들인 것도, 백영 재단의 이름으로 비자금을 조성한 것도. 주가를 조작한 대가로 거액의 뒷돈을 챙긴 것도 모두 하 회장이지, 네가 아니잖아. 억울하게 당할 필요 있어?”
“……너 진짜 골때리는 새끼다.”
“고맙게 여겨.”
은호는 그렇게 말하고선 정서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나가, 나랑.”
“……뭐?”
“이 선택은 하견 몫이니까, 나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