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잊어 버리신 것 같아서 다시 한번 상기시켜드리는데 법적으로 보호자는 접니다, 선생님.”
아들 결혼식에 쓰러진 대기업 회장.
결혼식날 압수 수색을 당한 재벌가 아들.
스캔들을 딛고 성공하는 듯했으나 결국 결혼하지 못한 신부.
언론사들은 앞다퉈 그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기에 바빴다.
VIP 병동이 위치한 13층의 복도까지 침입하려 한 탓에 경호 인력이 다수 동원됐다.
긴급 검사를 마치곤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파리한 안색으로 병실로 온 하 회장은 말이 없었다.
눈을 내리감고선 잠든 것인지 죽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얼굴만 내비치는 탓에 견은 하 회장의 주치의를 쫓아가 상태를 물어야만 했다.
보호자로서는 대단히 타당한 질문을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주치의는 말이 없었다.
오랫동안 하 회장을 담당했던 주치의였다.
무언가 문제가 있다면 진즉에 알았을 테고, 그 정보를 견에게 공유하지 말라 하 회장이 단단히 일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쓰러진 타이밍이 수상했다.
머리를 찧으면서 넘어진 탓에 아무도 의심할 수 없을 중태라는 것 또한 마음에 걸렸다.
비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뛰어와 응급처치를 했다.
우연이라는 것은 이런 상황에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설명해드리려 했습니다.”
“무슨 상황입니까.”
“처음엔 가벼운 뇌진탕 증세를 보이셨습니다. 뇌출혈은 다행히 아니지만, 평소 앓고 계시던 지병이 재발해서 아직 의식이 없는 위중한 상황이며…….”
“지병?”
견의 물음에 주치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답답한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자꾸 인내심을 시험하려는 태도에 한숨이 샜다.
“똑바로 말 안 합니까.”
“평소에 앓고 계신 지병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달라는 지시가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들인 나에게도 말하지 못한다?”
“아버님!”
그때였다.
뒤에서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 흐트러진 머리를 한 채 아이의 손을 잡고 뛰어 들어오는 여자가 보였다.
경호원이 앞을 막아서자, 여자는 얼굴을 굳히며 외쳤다.
“제가 이 집 며느리입니다. 어디 감히 내 앞을 막아요!”
며느리?
견은 제 앞에서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도망갈 궁리를 하는 주치의를 내버려 둔 채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경호원은 여자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정서가 아님에 당황한 듯했다.
“내가 그쪽이랑 결혼을 했던가?”
여상한 목소리로 던져진 물음에, 그로 향한 눈빛에 담긴 것은 명백한 분노와 경계였다.
굳이 여자가 스스로를 소개하지 않아도 견은 알 수 있었다.
정서에게 들은 그 여자, 죽은 하 회장 아들의 씨를 품고 애를 낳았다는 그 여자가 바로 이 여자라는 것을.
“어떻게 감히 그딴 더러운 입에…….”
“더러워? 누가. 내가?”
견은 피식 웃었다.
여자가 빳빳이 고개를 들고 선 이유를 견이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정서에게 듣고 나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여자는 자신이 좋아한 남자가 하 회장의 아들임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만난 기간 역시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
그 기간 동안 두 사람이 사랑을 했든, 하지 않았든.
장례식장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그 여자가 돌연 하 회장에게 자신의 아들이 하 회장의 손자라 주장할 때는 바라는 것이 분명히 있어서다.
없는 집안의 자식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하 회장의 마음에 찰만한 여자도 아니었다.
하 회장은 아이를 받아들인 것이지 여자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내가 충고 하나 할까. 당신 자식 같은 경험을 내가 해 본 적이 있어서 그러는데 너무 믿지 마, 하 회장을.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하게 며느라기로 당신 받아 줄 생각이었다면…….”
짝, 소리와 함께 견의 뺨에 알싸한 통증이 퍼져나갔다.
여자의 뒤에 서 있던 애가 놀란 듯 몸을 움찔거렸다.
옅게 나는 술 냄새가 그녀가 취했음을 짐작게 했다.
어쩜 이렇게 뻔할까.
견의 입술 새로 비실비실 자꾸만 헛웃음이 샜다.
하 회장이 자신의 뒤를 잇게 만들고 싶어 한 이 아이는 결국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갖고 자라게 될 것이다.
하 회장의 바람대로 자라난다 하더라도 하 회장을 존경하지도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닥쳐. 내 아들은 너와는 달라. 너는 천박한 핏줄을 타고났어.”
“그쯤 하시죠.”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그렇게 화사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꼭 그녀 같은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던 정서는 어느새 검은 양복 차림에 피로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견은 그를 지켜 주려는 듯 앞을 막아서는 그녀를 한 품에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겨우 내리눌렀다.
“뭔데, 그쪽은.”
“아직 하 회장님께서는 의식이 없으십니다. 이 이상 소란을 피우시면 병원 밖으로 모실 수밖에 없습니다.”
“뭐? 너 내가 누군 줄 알고…….”
“김 비서님.”
마침 소란을 듣고 병실 밖을 살피러 나온 하 회장의 비서를 정서가 불렀다.
비서의 낯익은 얼굴을 알아챈 듯 인사를 건네는 여자 앞에서 정서는 단호히 말했다.
“집으로 좀 모셔 주시죠. 아이가 많이 놀란 것 같으니.”
“……예, 알겠습니다.”
“김 비서님, 저 모르세요? 아니, 이 여자는 대체 뭔데 저한테 이래라저래라하시는 건지.”
“하 회장님의 며느리 되시는 분입니다.”
“며느리요? 며느리면 저…… 아, 오늘 결혼한다던 그?”
“맞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아니, 잠시만. 결혼식도 못 치른 게 무슨 며느리예요. 지켜도 여긴 제가 지키는 게 맞죠. 김 비서님, 안 그래요?”
“목소리 낮추세요.”
김 비서는 주위에 있을 취재진을 의식한 듯 경호원 여럿을 불렀다.
여자는 자신을 끌어내는 손길에 버둥거렸으나 결국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윤정서, 내 신부.”
견이 손을 뻗어 그제야 정서를 품에 안았다.
정서는 주위에 선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면서도 견을 밀어내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몸을 돌려 마주한 채 등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오래 기다렸지.”
“응. 지루해 죽는 줄 알았어.”
“아버지 면회 온 사람이 할 말로는 적절하지 않은데?”
“곧 검찰에 잡혀들어갈 사람이 할 말로도 적절하진 않지.”
견은 정서를 놓아주며 피식 웃어 보였다.
무거워 보이면 정서가 걱정할 게 뻔했으니 최대한 가볍게 말하는 듯했다.
그 마음을 그녀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질책하는 대신 어울렸다.
“소품 창고에서 백영 재단 장학생의 작품 열세 점이 발견됐어. 그중 세 작품은 백영 엔터테인먼트 계좌에서 구입된 것이 확실하고 나머지 작품들은 아직 드러난 바가 없어.”
“누구 짓인지 묻지 않아도 알겠네.”
“이 비서는 지금 참고인 조사로 불려 갔어. 아마 그다음 차례는 너일 테고.”
“요새도 설렁탕 시켜 주나? 난 설렁탕보다 순댓국이 더 취향인데.”
“변호사니 내가 동행해. 곧 기사가 나갈 거니까 동요하진 마. 홍보팀에서 막으려고 최선은 다해보겠지만 한계가 있을 거야.”
“하 회장은 이 난리통을 기가 막히게 빠져나갔네. 드러눕는 유서와 전통이 깊은 수법으로.”
“우리가 너무 물렀어. 제대로 해야 된다는 생각에 장태영 기자 설득할 생각만 했지. 이렇게 빨리 공격해 올 줄이야.”
자책하는 듯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견은 쉽게 위로를 건네는 대신 그녀의 손을 찾아 쥐었다.
“신랑이 먼저 식장을 나와서 어떻게 해?”
“그날 비가 왔잖아.”
“응.”
“나 비 오는 날 안 좋아해, 밝은 날 다시 결혼해.”
“좋아.”
정서는 견의 대답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기적처럼 기다리던 회신이 왔다.
&
“제가 직접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중현 작가님께.”
태영은 정서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사진과 자료를 차례로 내려두었다.
“생각보다도 더 악질이더군요.”
정서는 빠르게 자료를 훑었다.
태영이 손을 들어 정서 대신 음료를 주문한 뒤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중현은 정서에게 답을 하는 대신 태영에게 곧장 메일을 썼다.
장학생들이 성과를 내기까지 가해지던 압력과 차별.
차등적으로 주어지던 기회들과 하 회장의 별도 작품 지시까지.
그림 공장이 되듯 찍어내야 했던 작품들과 암암리에 대신 그려 줬던 재벌집 자제의 수행평가까지, 담담하게 그러나 명확하게 담아낸 메일은 태영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오해할만한 상황이지만 이 일과 하 대표님은 무관합니다. 하 회장님께서 하 대표님을 견제하기 위해 벌인…….”
“사정이 어려운 건 알고 있습니다만 창고에서 발견된 작품들의 출처를 안 이상 아주 무관하다 회피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다만 그동안 억지로 작가로서 고평가받는 장학생을 상대로 억지로 작품을 팔도록 압박한 것은 확실히 기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충분해요, 우선은.”
“정리되는 대로 기사는 내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수사가 진행 중인 사건인 만큼 발행될 포스트 이외의 내용에는 침묵할 예정입니다.”
정서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제 앞에 놓인 차가운 커피를 들어 입으로 가져가다 문득 태영과 눈을 맞췄다.
“이중현 작가님께서 다른 말씀은 혹시 없으셨나요?”
“다른 말씀이요?”
“백영 재단 갤러리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기자님도 아시겠지만, 파멸이에요. 어쩐지 그걸 볼 때마다 작가님께서 꼭 그림으로 말하고 있던 것 같았거든요.”
“무엇을 말입니까.”
“백영 재단에게, 그러니까 하 회장에게 선물하고 싶은 파멸을요.”
태영은 정서의 말이 흥미롭다는 듯 잠시 웃더니 노트북 화면을 돌려 정서에게 내밀었다.
그 안에 담긴 중현의 메일에 적혀 있었다.
「복수 같은 관념적인 말은 믿지 않습니다.
그림을 그린 이유는 살기 위해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동일합니다.
유일하게 자발적으로 돈 한 푼 받지 않고 선물한 작품이 있습니다.
그 작품이 하 회장에게 부를 가져다주지 않길 바랍니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이제 변호사님은 변호사님의 일을 하세요. 아, 그리고…….”
“네?”
“결혼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