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화 (82/85)

82.

비서와 경호원들이 일제히 하 회장에게 달려갔다.

당황한 인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왕좌왕하는 사이 스태프가 드레스 자락을 놓쳤는지 정서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무릎을 바닥에 찧고 웅크린 정서의 머리 위로 떨어지려는 얼음 조각 장식을 잡은 것은 은호였다.

“정신 차려요.”

“……차은호.”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든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요. 따라와요.”

“그게 무슨 말…….”

은호는 얼음 장식을 바로 세우고 그녀를 일으켰다.

당황한 정서가 황망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사이 앞길을 막았던 인파 때문에 움직이지 못했던 견이 다가왔다.

“손 치워.”

“여기 있을 때가 아니시죠. 보는 눈도 많은데 쓰러진 아버지 팽개치고 여기 오게요?”

은호의 말에도 견의 시선은 정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가자, 정서야.”

“응.”

정서는 은호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견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발목이 시큰거렸으나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그 모습을 보던 은호가 손을 뻗어 정서의 어깨를 쥐었다.

“혼자 가세요.”

“뭐?”

“지금 회사로 누가 찾아온 줄 압니까?”

“무슨 말이야. 똑바로 말해.”

“백영 엔터테인먼트 비자금 조성 문제와 관련해서 검찰이 출두했습니다. 하필이면 결혼하는 날, 모두가 형식적인 이 결혼을 축하하겠답시고 자리를 비운 오늘 검찰이 들이닥쳤다고요. 지금쯤이면 부수고 들어가서 서류 쓸어 담기 시작했겠네요.”

“그게 무슨 소리야.”

정서가 놀란 듯 은호를 보았다.

비자금 조성이라니. 이전의 대표가 만들어둔 비자금은 퇴직 처리를 하며 모조리 정리했다.

견이 대표직에 오른 뒤로 투명한 경영을 위해 힘썼다.

그런데 비자금 조성 문제라니.

대표직에 오른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문제가 불거지다니. 

복잡한 정서의 머릿속과 달리 특별한 대꾸 없이 침묵하던 견이 은호의 옆에 섰다.

그리고 그의 손아귀에서 정서의 손목을 빼내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나랑 가, 윤정서는.”

“얼마나 이기적이고 볼품없는 놈이 되려고? 기회를 줄 때 놔 줘. 윤정서는 처음부터 이 일과 무관했잖아.”

“내가 무슨 놈이든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야. 그러니 놔.”

견과 은호 사이로 서늘한 긴장감이 흘렀다.

여러 사람의 시선이 그들을 향했다.

신부 하나를 두고 두 사람이 서로 대립하고 있는 모습은 세간의 눈초리를 사기에 충분했다.

“신랑님, 보호자로 같이 가셔야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견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마지못해 돌아섰다.

돌아서기 전 짧게 마주친 눈빛에서 정서는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잠잠하고 고요한 눈동자 속에 제 모습이 온전히 담길 때 생각했다.

처음부터 고운 길이 아닐 거라는 것 알고 있었다고.

징그럽게 이어진 핏줄이 쉬이 끊어지지 않아 나락으로 처박히는 경험에 대해서라면 그녀는 겪을 만큼 겪었으니 두려울 것이 없다고.

그냥, 네 옆에만 있으면 돼. 나는.

그거면 돼.

“윤정서.”

견을 따라 걸음을 옮기려는 정서를 은호가 붙잡았다.

걱정이 담긴 표정도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은호가 찾아냈던 하 회장의 약점이 이 일과 관련이 있을까.

은호는 당황하지 않았다. 

어쩌면 알고 있었는데도 이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 뒀을지도 모른다.

“여기.”

정서는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졌던 부케를 쥐었다.

은호의 복수를 응원하며 만들었던 그 부케를 건네주며 모든 미안한 마음을 이제는 잊기로 했다.

원망하진 않았다, 그러나 더 응원할 수는 없었다.

“가지 마요.”

“…….”

“가지 마, 윤정서.”

“은호야.”

“…….”

처음이었다.

정서가 자신을 이렇게 다정하게 불러주는 것은.

그게 기뻐야만 했으나, 기쁘기도 했으나.

“너는 네 복수를 해.”

“……윤정서.”

“나는 내 복수를 할게.”

“…….”

정서는 신고 있던 구두를 벗었다.

높은 굽이 거추장스러웠다.

맨발로 땅을 디디며 앞으로 나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은호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동시에 꽃잎이 후두둑 아래로 떨어져 발치를 굴렀다.

&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확인했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처럼 황폐하게 쓸린 자리를 눈으로 좇던 정서의 앞에 슬리퍼가 놓였다.

그녀는 식장에서 벗어나 곧장 택시를 타고 회사로 향했다. 

덕분에 엉망이 된 드레스 자락을 손으로 움켜쥔 채 바닥에 떨어진 서류 몇 개를 주워 책상에 올린 정서가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숙인 박 실장과 김 비서 뒤로 말끔히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아, 죄송합니다. 통화가 길어져서.”

“영장이 발부된 건가 보죠, 이렇게 허락도 구하지 않고 들어오신 걸 보면.”

“예. 영장 승인되자마자 바로 뛰어왔습니다. 결혼식 진행하시는 동안 조용히 왔다 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어 유감입니다. 하 회장님 상태는 좀 어떠신가요.”

“확실한 증거 없이 영장 발부 안 되는 것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백영 그룹 계열삽니다. 아무런 언질도 없이 이렇게 불쑥 찾아오시는 건 아니라고 생각되는데요.”

“역시 비정한 며느리네. 법정에서도 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었나.”

이 검사는 정서가 신기하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제 눈가를 쓸었다.

옅은 담배 냄새가 나는 손에 끼워진 반지가 형광등 불빛을 반사해 반짝이며 정서의 눈을 부시게 했다.

반지를 고른 건 견인데. 견이 그녀의 사이즈를 알고 있을까?

헐렁하면 헐렁한 대로 잘 끼려고 했는데.

그런 생각이 든다는 건 정신을 못 차렸다는 증거다.

정서는 쥐고 있던 드레스 자락을 놓았다.

“똑바로 말씀하세요, 비자금 조성과 관련해 수사를 벌이시려면 누군가 제보를 했다는 뜻입니다. 적어도 제보의 근거가 있었겠죠.”

“미술품 좋아하십니까?”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정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미술품이라니. 

그런 말을 던진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릴 때쯤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마무리됐습니다!”

“어, 금방 나가.”

이 검사는 짧게 답을 하고 지갑에서 자신의 명함을 꺼내 정서에게 건넸다.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정서가 일하던 로펌에서 몇 번 들어본 적이 있는 검사로 주로 굵직한 기업의 경제 사건을 담당했다.

“백영 재단에서 제법 큰 역할을 하고 계셨더군요, 하견 씨가. 미술품에는 관심도 없게 생겨서 왜 그랬나 하고 봤더니 비자금을 죄 작품으로 했더라고요. 계좌에서 돈이 나간 타이밍과 일치하니 빠져나갈 구멍이 통 보이지 않습니다만. 뭐, 훌륭한 변호사를 와이프로 뒀으니 얘기가 달라지려나. 기대하겠습니다, 그럼. 아, 남편분께는 제가 곧 따로 연락드리겠다 전해 주세요.”

정서는 마지막으로 봤던 백영 재단 갤러리의 모습을 떠올렸다.

작품 몇 개가 사라져 물었더니, 리뉴얼 준비 중이라는 대답을 들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니.

그럼 그 작품들을 어디에 보관했길래?

견이 소유한 부동산은 지금 두 사람이 지내고 있는 집 하나뿐이었다.

견의 이름으로 된 개인 금고가 있을 리도 없고.

무엇보다 견이 굳이 백영 엔터테인먼트의 돈으로 비자금을 조성할 이유가 없었다.

누군가가 전부 꾸며냈다. 

백영의 자금을 손댈 수 있고 재단 소유의 작품들도 움직일 수 있는 사람.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정서는 우선 명함을 책상에 내려두었다.

그 모습을 본 이 검사가 피식 웃으며 대표실을 빠져나갔다.

다리에서 힘이 풀렸으나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요, 저희…….”

김 비서가 코를 훌쩍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박 실장이 얼른 자리를 옮겨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무언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윤 변호사님,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확인해 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 백영 엔터테인먼트 이름으로 발급된 모든 계좌의 입출금 내역 부탁드려요. 그리고 김 비서님, 휴일에 이런 부탁드리기 죄송하지만 백영 엔터테인먼트 사유지, 건물 목록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스튜디오 모두 포함해서요.”

“알겠습니다.”

씩씩하게 눈물을 닦은 김 비서가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정서는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골랐다.

그리고 비서실을 빠져나와 복도로 향했다.

“…….”

핸드폰을 꺼내 견의 번호를 눌렀으나 통화 버튼을 누르는 일이 쉽지 않았다.

하 회장의 상태가 위중하다는 언론 기사가 방금 나온 참이었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분명 하 회장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 이 타이밍에 하 회장은 쓰러졌다. 모든 죄를 견에게로 돌리려는 듯이.

“여기서 뭐 하세요?”

“…….”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보이는 것은 수연이었다.

수연은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은은히 웃으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왜 여기 왔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 싶어서 온 것이다.

결국 결혼하지 못한 윤정서를, 이 엉망이 된 폐허를.

그러니까 제 손으로 만든 폐허를 보러 수연은 여기까지 왔다.

“결혼식에 못 간 거 죄송해요. 갔다면 좋은 구경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여러모로 저도 아쉽고요. 대신 제때 반납하지 못한 출입증…….”

짝.

정서의 손바닥 아래로 홧홧한 통증이 느껴졌다.

멍하니 제 뺨을 움켜쥔 수연이 한참 만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정서와 눈을 맞추니 그녀의 내면에서 일렁이는 분노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싸울 맛이 나지.

수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제 목에 걸려 있던 사원증을 조용히 뺐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선 채 눈을 맞췄다.

“이 모든 일을 초래한 게 너야.”

“…….”

“네가 이러지만 않았어도 나도 이러지 않았어. 그러게 왜 가지지도 못할 걸 넘봐서 험한 꼴을 봐.”

수연의 눈이 희번덕하게 빛났다.

수연은 곧 소환되어 조사받을 것이다.

조사 과정에서 모든 것이 견의 지시로 인해 이뤄졌다고 고백할 테고.

하 회장은 자연스럽게 견을 쳐낼 것이다.

모든 일이 너무 순조로웠다.

다시 한번 정서가 손을 들었다.

이번에도 제 뺨을 때릴 것이라 생각한 수연이 먼저 손을 들어 그녀에게 뻗었을 때, 정서의 손끝이 수연의 사원증을 낚아챘다.

“박 실장님! 시큐리티 팀 불러주세요. 여기 불청객이 왔네요.”

정서는 목소리를 높여 크게 외친 뒤 미련 없이 돌아섰다.

수연이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그녀가 제일 잘하는 것은 받은 만큼 돌려주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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