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정서는 빗소리에 눈을 떴다.
저를 꼭 끌어안은 채 잠든 견을 바라보며 시작하는 아침이라, 비가 두렵거나 힘들지는 않았다.
견은 잠에서 깬 그녀의 기척에 눈을 뜨지도 못한 채 말했다.
‘결혼식 날, 비 오면 잘 산대.’
그럴까. 잘 사는 게 뭔지, 정서는 잘 알지 못했으나 견이 그렇게 말했으므로 정말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예식장에 도착해 각자의 대기실로 들어서기 전까지 견은 내내 정서의 옆에 있었다.
신랑이 다정하니 신부님은 좋으시겠다고 말하는 스태프들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이던 그녀는 화장을 하는 내내 핸드폰을 확인했다.
파리에서 작품 활동 중이라는 중현에게서 아직 답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백영의 사람인 그녀에게 당연히 우호적인 답을 하지 않을 줄은 알았다.
그러나 적어도 제 작품인 <파멸>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백영 재단에서 운영하는 전시관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품이자, 트레이드 마크라 볼 수 있는 그 작품이 사실은 백영에게 선물한 복수는 아니었냐고.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언제든지 해 주셨으면 한다고.
“……믿을 수가 없네.”
문 쪽에서 들리는 낯익은 목소리에 정서가 뒤를 돌아보자 멀끔한 슈트 차림의 은호가 보였다.
어둡게 물들인 머리를 뒤로 완전히 넘긴 것을 처음 보았다.
그래서 그런지 평소보다 조금 더 단정해 보였다.
마냥 어리게 보이던 모습과 달리 제법 남성스러운 모습이 돋보이는 은호를 보자 자연히 정서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거 내가 할 말 같은데.”
“우선 이것 좀 드시고 하세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은호는 장난스레 말하며 스태프들에게 포장해 온 커피와 간식을 건넸다.
감사하다며 받아 드는 스태프들을 뒤로한 채 다가온 은호는 정서의 뒤에 섰다.
둘은 거울을 사이에 둔 채 시선을 맞췄다.
“뭐야, 저게 다?”
“원래 신부 친구들이 준비하는 거래. 난 친구는 아니지만, 윤정서 친구 없는 건 알고 있으니까.”
“그 말에 감동을 해야 할지, 상처를 받아야 할지 알 수가 없다.”
“감동만 받아. 좋은 날인데.”
“좋은 날 맞아?”
“그럼. 좋은 날이지. 나한테도, 윤정서한테도.”
은호는 씩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정서와 눈높이가 맞자,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옆으로 다가온 그에게선 옅은 비 냄새가 났다.
“밖에 비 많이 와?”
“조금? 오기 불편할 정도는 아니야. 뭐, 어차피 당신이 기대하는 손님은 없잖아.”
“왜 없어. 왔잖아, 너.”
“청첩장 받은 사람이 있긴 해?”
“…….”
“됐어. 내가 일당백으로 하면 되지 뭐.”
“두 분 엄청 친하신가 봐요.”
머리를 해 주던 스태프가 다가오며 살뜰히 말을 걸었다.
은호는 환하게 웃으며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그럼요. 애틋한 사이죠. 제가 많이 도움받았어요.”
“정말요? 그래서 이렇게 잘 챙겨 주시는구나. 보통 이런 거 남성분들이 하기 쉽지 않거든요.”
“제가 워낙 섬세해서.”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잇는 은호를 작게 웃으며 보던 정서가 제 앞에 놓인 거울을 보았다.
평소에 좀체 할 일이 없는 올림머리에 짙은 화장까지 한 제 모습이 너무나 낯설었다.
“남은 메이크업은 드레스 피팅 하신 후에 마무리할게요. 머리 망가지면 안 되니까 제가 돕겠습니다. 따라오세요, 신부님.”
신부님. 당연히 정서를 부르는 그 말이 어쩐지 은호는 신경이 쓰였다.
여기서는 모두 정서를 신부로, 견을 신랑으로 부르겠지.
“네, 가요. 차은호, 저거 봐.”
“응?”
“네가 받을 부케.”
“아…….”
“이따 잘 받아라, 한 번에.”
“……물론이지.”
쓰게 웃는 은호를 뒤로한 채 정서는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녀가 안으로 사라지고 신부대기실에 정적이 깃들자 은호는 손을 뻗어 부케를 한 번 쥐어 보았다.
손에 옴싹하게 들어오는 부케는 수수하고 아름다웠다. 꼭 정서처럼.
예식장부터 전부 화려하게 치장해둔 이곳에서 스스로 고른 것은 부케뿐이라는 것처럼.
그게 꼭 마음에 쓰였다.
저를 그만큼 생각하고 있다는 뜻 같아서, 동시에 완벽하게 선을 긋는 것 같아서.
지이잉.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을 내려다보는 은호의 얼굴이 어두워질 때 탈의실 문이 열리고 정서가 나왔다.
“…….”
은호는 말을 잃었다.
정서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아름다웠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걸어 나오는 그녀의 모습이, 그 찰나의 몇 초가 마치 은호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가슴에 콕 박혔다.
“……왜 그렇게 봐. 이상해?”
말이 없어진 채로 굳어 버린 은호를 본 정서의 얼굴이 덩달아 굳었다.
제 모습이 우스꽝스러운가 걱정이 됐기 때문이었다.
저 역시 어색하게 느끼고 있던 찰나라서 자신이 없었다.
견에게 걸맞은 신부로 보여야 하는데 염려가 앞섰다.
“이상해요.”
“어디가? 머리? 아니면 드레스? 어깨가 너무 딱 맞나.”
“이상할 만큼 아름다워요.”
“…….”
“내 게 아닌 게 이상할 만큼.”
“어?”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은호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정서가 눈을 찌푸렸다.
다시 한번 설명해 주길 바라는 눈치였으나, 은호의 말은 사진기를 들고 신부대기실로 들어오는 사진사에 의해 끊겼다.
“신부대기실에 몇 분 정도 오실 것 같으세요? 손님 받기 시작하면 찍으려고 하는데.”
“저는 괜찮습니다.”
“예?”
“올 사람이 없어서요, 사진 찍을 필요…….”
“저 찍어 주세요.”
은호가 난처한 기색으로 손을 흔들며 사진사에게 거절의 뜻을 내비치는 정서의 옆으로 가 섰다.
자연스럽게 그녀를 이끌어 자리에 앉히고 그 뒤에 선 그는 자연스럽게 어깨에 손을 얹었다.
따스한 응원이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예. 그럼 찍겠습니다. 신부님 좀 더 웃으세요. 활짝.”
늘 사진 찍는 게 어색한 정서는 한쪽 입꼬리만 들어 올려 웃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은호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웃어요, 얼른.”
“아, 아파.”
덕분에 경직된 얼굴이 조금 풀린 그 찰나 반짝하고 플래시가 터졌다.
웃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생겼다.
“잠깐 기다려요. 바깥 분위기 좀 살필게요.”
“응.”
정서는 나가는 은호의 뒷모습을 보다 신부대기실로 들어오는 손님들을 맞이했다.
김 비서와 박 실장이었다.
이런 곳에서 보니 반가운 얼굴들의 모습에 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린 듯 그녀가 싱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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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쾌하네. 이런 곳에서 네 얼굴을 다 보고.”
“내가 제일 불쾌한 건 아닐 텐데. 이 결혼식에 오는 하객 중 절반이 역겨운 인간들 아닌가.”
견은 신부대기실에서 나오는 은호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하객 맞이에 한창이어야 할 그는 어쩐지 건성이었고 실제로 도착한 하객들 역시 그에게 인사치레만 건넬 뿐 곧장 하 회장을 찾았다.
그의 손님이 아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기자는 얼마나 왔어.”
“글쎄. 열댓 명? 기삿거리 제공해 줄 거면 저 앞에 가서 해.”
“요새도 묻나?”
“뭘.”
“이 결혼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는지.”
“…….”
“지금 말하세요. 아니면 영원히 침묵하세요. 그런 멘트였지, 아마?”
“영원히 침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데. 마침 말 잘했네.”
“빨리 시작해라. 지루하다.”
견의 시선이 신부대기실의 입구로 향했다.
아무래도 찾아올 사람이 없는 정서가 너무 외롭게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신랑은 결혼식 전에 신부 보는 거 아니래.”
“네가 무슨 참견인지 모르겠네.”
“오늘 결혼식 무사히 진행할 수 있겠어?”
“그건 또 무슨 오지랖일까.”
“아무 반발 없이 너무나 순진하게 하 회장을 믿는 게 아닌가 해서. 아버지라서 그런가?”
“…….”
은호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다시금 울리는 핸드폰에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견은 제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는 남자에게 건성을 손을 내밀며 시선으로 은호의 뒤를 좇았다.
기분 나쁜 말이었지만 논리가 있었다.
은호가 아는 사실을 자신이 모르고 있는 거라면.
하 회장이 너무나 순순히 대표의 자리를 내어 주고 결혼까지 허락한 게 단순히 제 손주가 다 클 때까지 견을 앉혀두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신랑분, 이제 준비하셔야 합니다. 곧 식이 시작될 거예요. 이쪽으로 오세요.”
“신부는요?”
“신랑분이 입장하시고 나서 바로 입장하실 겁니다.”
곧 결혼식장에 예식이 시작된다는 안내가 울려 퍼졌다.
견은 하는 수 없이 걸음을 옮겨 식장 안으로 향했다.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신랑이시죠. 백영 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자, 이제 어엿한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주실 신랑 하견 대표님을 모십니다.”
조명이 견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찬찬한 걸음을 옮겨 단 위에 오르자 입구로 다시금 조명이 향했다.
“이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님, 윤정서 님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큰 박수로 맞아 주세요.”
스포트라이트 아래로 천천히 걸어들어오는 정서의 모습이 보였다.
견은 그제야 조금 웃을 수 있었다.
저렇게 긴장한 모습은 처음 본다고 생각하며.
그때였다.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견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높은 구두를 신어 흔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준 채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오려는 정서의 얼굴에도 그늘이 깃들었다.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 전에 견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차은호. 은호가 보이지 않았다.
역시 네가 무슨 짓을 꾸몄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당황한 듯 걸음을 멈춘 정서에게 견이 직접 다가가려 할 때였다.
쿵하고 큰소리가 나더니.
“회장님!”
하 회장이 바닥에 고개를 찧으며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