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쿵하고 심장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너무 고통스러운 기억은 잊으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던데.
정서도 그랬나 보았다.
태영이 이 얘기를 꺼내기 전까지는 그 사건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 일을 끝으로 백영으로 가셨다죠?”
“……예. 맞습니다.”
“직접 목격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현장을. 이쯤 되면 제가 왜 이 사건을 화두로 올리는지 의문을 가지실 것 같은데 맞습니까.”
정서는 커피가 든 유리잔을 내려다보았다.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 구르는 것을 손으로 닦아 보았다.
서늘한 냉기가 또렷이 전달되었고 다소간 손이 시렸으나 아리지는 않았다.
“아뇨, 의문스럽지는 않습니다.”
정서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태영을 마주했다.
과거는 부정할 수 없다. 그녀가 저지른 죄는 오롯이 그녀의 것이었다.
설령 그것이 아버지를 피하려 했던 행동이라고 해도 정당화될 수는 없었다.
“굳이 결혼을 앞둔 이 시기에 백영에 대한 제보를 한 의도가 의심스러우실 수 있고, 그 의심을 풀기 위해 꺼낼 수 있는 화두라 생각합니다.”
“……의연하시군요. 당연하다 생각하십니까? 변호사로서 누군가를 변호하는 일은 응당해야 할 일이고 의뢰인의 권익 보호에 앞서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태영은 피하지 않고 저를 마주한 정서를 살피듯 들여다보았다.
그는 정서를 시험하고 있었다.
그녀가 제보한 내용들의 진위 여부를 따지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그녀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백영 재단에 대해 제보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아뇨. 그 사건은 아무도 맡고 싶지 않았던 사건이었습니다. 승소할 확률이 적었고 설령 승소한다고 해도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사건이었으니까요. 대표님이 해당 사건을 맡는 대가로 큰 수임료를 제안하셨습니다.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 돈이 필요했거든요. 오만하기도 했습니다. 승소한 기억보다 크게 남은 보상액이 피해자 분을 보호해 줄 수 있으리라 믿었어요.”
“대단히 솔직한 이유네요. 그러나 역시 윤정서 씨를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앞서 말하셨듯 손익에 따라 움직이는 분이시라면, 지금 이 제보로 인해 얻으실 이익이 무엇일지 가늠이 되지 않거든요.”
여기서부터는 정서가 예상한 방향이었다.
적당히 지어낸 대답으로 둘러댈 수도 있었겠지만, 그리고 운이 좋다면 그럴듯하게 속여넘길 수도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 사건을 맡고 나서 변호사 생활을 접고 백영을 위해 일하게 된 것은 하곤 회장 때문이었습니다. 크고 작은 일을 했지만 옳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변호사란 직업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물론 하곤 회장만이 부도덕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곤 회장의 아들인 하견 씨와 결혼을 앞둔 이 시점에 굳이 이 사건을 밝히려는 이유 또한 이상하게 느껴지실 수 있단 거 알아요.”
“예. 이상합니다. 이제와 양심에 찔려 솔직한 고백을 하시겠다는 말씀은 솔직히 믿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개인적인 원한에…….”
“밝힐 수는 없습니다만, 약점이 잡혀 있었습니다. 사는 동안 내내 제 약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었고 최근에서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에 특화된 사람입니다. 저는 영웅도 아니고 열사도 아니에요. 그냥 단순히 복수심 때문에 시작한 일이지만, 적어도 제보할 내용들을 보는 내내 느낀 참담함은 진실입니다. 막고 싶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단순하고 간단명료한 이유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날것을 정돈하지 못하고 전달해 변론으로 치면 최악이었을 그 말들을 태영은 조용히 곱씹었다.
그리고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보호해드리지 못할 겁니다. 결혼식 다음에 정리된 내용으로 전달되면 오히려 공격받기 쉬운 표적이 되실 테죠.”
“알고 있습니다.”
“혹 협박받아서 결혼하시는 겁니까?”
태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번엔 명료한 답을 줄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아닙니다. 원해서 하는 결혼입니다.”
“……하곤 회장과 하견 대표의 사이가 좋지 못하다더니 그건 사실인가 보군요. 하견 대표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서 이런 일을 벌이는 건 아닙니까.”
“궁극적으로 보면 그럴 수 있겠지만. 아시다시피 백영의 직원들도, 그리고 대중도 하견 대표님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백영 그룹이 넘어올 일은 없을 거예요.”
단호한 정서의 말에 태영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견의 화려한 과거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고 견이 지키고 있는 자리 역시 하 회장이 부여한 자리였으니 그렇게 보는 편이 타당했다.
“여기, 제가 가진 자료를 드립니다. 추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제가 도울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이 사건을 듣고 백영 재단 장학생 중 가장 유명한 장학생일 이중현 작가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이전에 뉴욕에서 개인전을 열 때 한 번 뵀던 적이 있었거든요. 백영 재단 얘기를 듣자 연락이 두절됐습니다. 혹 이에 관해 아는 것 있으십니까.”
“……아뇨. 하지만 알아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아직 완전히 응한 것은 아닙니다. 일단 조사를 시작해 보겠다는 소리예요.”
“감사합니다.”
정서는 인사를 하고 몇 마디 더 나눈 뒤 조심스레 카페를 빠져나왔다.
카페가 있는 골목길을 나오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런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언제부터 저를 기다렸는지 담벼락에 기대고 서서 눈을 조금 감은 채 햇볕을 쬐고 있는 견이었다.
천천히 눈을 뜨자 그녀가 보였는지 이쪽으로 다가오는 걸음이 빨랐다.
정서는 그가 걱정하지 않도록 몸을 세웠다.
그리고 다가온 견을 끌어안았다.
“고생했어.”
너른 품은 따뜻했다.
&
“윤정서.”
“응?”
“긴장했어?”
견의 물음을 들은 정서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매무새를 다듬고 또 다듬었음에도 어색하고 긴장되는 건 미희에게 정식으로 이렇게 인사를 하는 게 처음이라서겠지.
이미 다 본 사이면서 뭘 그러냐 묻는 견이 얄미웠다.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는 낮은 클래식 음악이 흘렀다.
내일 있을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을 미희를 위해 두 사람은 조촐하게 결혼 전 파티를 준비했다.
결혼식 전에 신경 쓰이는 게 많지 않냐며 거절하던 미희도 정서가 꼭 같이했으면 좋겠다 부탁하자 마지못해 알겠다 대답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정서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견은 그런 그녀를 보고 작게 웃으며 따라 몸을 일으켰다.
곧 문이 열리고 평소보다 조금 더 붉은색 립스틱을 바르고 검은색 단정한 원피스를 입은 미희가 안으로 들어왔다.
“정서 씨!”
“오셨어요. 시간이 시간이라 차가 좀 막히셨죠.”
“아니에요. 왜 저번보다 살이 더 빠졌어. 얘가 또 마음 고생 시켜요?”
“아뇨. 드레스 예쁘게 입으려고요.”
이제 농담 같은 너스레도 떤다.
그 모습이 신기했는지 눈을 크게 뜬 견이 안내한 종업원에게 코스 준비해달란 말을 전했다.
문이 닫히고 따뜻한 찻잔을 앞에 둔 채 마주 앉자 정서는 준비한 선물을 꺼냈다.
“저……. 뭘 좋아하실지 잘 몰라서, 제가 워낙 이런 쪽에 문외한이기도 하고. 고민 끝에 고르긴 했는데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어요.”
“뭘 이런 걸 다 준비했어요. 결혼 준비만도 빠듯했을 텐데.”
“그간 잘 챙겨 주셨는데 어떻게 그래요.”
정서가 내민 쇼핑백에는 총 세 개의 상자가 담겨 있었다.
중간 크기의 상자부터 연 미희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이건…….”
“그래도 조카 결혼시킨다고 하면 아무래도 주윗분들이 물어보실 것 같아서. 가장 무난한 예물이 가방이라고 해서…….”
고급 브랜드의 로고가 박힌 가방이었다.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것에 당황한 미희가 조심스럽게 가방을 이리저리 보다 다음 상자로 손을 뻗었다.
가방보다 작은 상자는 붉은 끈으로 리본이 묶여 있었다.
포장된 끈을 풀러 상자를 열자 상자 안에 담긴 것은 목걸이였다.
목걸이에 달린 물방울 모양의 다이아몬드가 영롱하게 빛났다.
“데이트하실 때 하고 나가시면 좋을 것 같아서……. 디자인은 무난한 것을 골랐어요. 혹시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것으로 바꾸셔도 돼요.”
“아니, 딱 마음에 들어요.”
미희는 곧장 제 목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를 풀고 목걸이를 걸었다.
그리고 핸드폰에 제 모습을 비쳐 보며 웃었다.
“너무 예쁘다.”
“잘 어울리세요.”
“이모,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너는 좀 빠져. 나 지금도 너무 과분한데 남은 상자 열면 기절할지도 몰라요.”
미희는 환히 웃으며 다음 상자로 손을 뻗었다.
정서는 긴장한 듯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은 견이 그녀의 손을 찾아쥐었다.
“세상에…….”
마지막 상자를 연 미희가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가렸다.
놀란 듯 떨리는 눈동자에 담긴 것은 작은 캔버스가 담긴 액자였다.
미희는 그것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아직 대학에서 보관하고 있더라고요, 다행히도. 과제로 제출하셨던 작품을 부탁해서 가지고 왔어요.”
미희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액자의 표면을 쓸었다.
손가락 아래로 견의 엄마가 제 그림에 남기던 시그니처가 비쳤다.
“작품이 너무 아름다웠는데 제목을 보고 그 이유를 알았어요.”
눈물 한 방울이 툭 미희의 뺨을 가르고 떨어졌다.
철도 없고 겁도 없이 그림 같은 걸 그리겠다고 하던 그녀의 동생이 그린 그림의 제목이 <미희>라는 것을 그녀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견이 씨, 잘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게 따뜻함을 선물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이 은혜는 두고두고…….”
덥석.
미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서를 끌어안았다.
대뜸 안긴 정서가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다 천천히 미희를 마주 안았다.
“바보 같긴.”
그 모습을 보던 견은 생각했다.
피가 섞인 저보다도 더 애틋하게 닮은 저 두 사람을 지키기 위해선 뭐든 하겠다고.
그게 설령 목숨을 걸만큼 위험한 일이라고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