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은호는 어묵 국물이 든 컵을 들어 홀짝였다.
정서가 그 모습을 보며 복잡한 머릿속을 유영하는 생각들을 정리했다.
하 회장은 사람을 힘으로 구분하는 것에 도가 튼 사람이다.
자존심이 세고 독단적인 그가 아무것도 갖지 못한 은호가 자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런 짓을 벌였다는 것을 알면 가만히 둘 리 없었다.
“저번에 전지훈 기자 일도 그렇고. 여러모로 위험한 거 알고는 있어? 그 사람은 자신을 건드린 사람에게는…….”
“자비도, 용서도 없다고?”
“……응.”
“오히려 고맙지. 그런 성미라서 스스로의 약점을 스스로가 만들고 돌아다녔으니.”
은호는 정말 하 회장을 끌어내릴 만한 강력한 무언가를 손에 쥐었을까?
백영 재단에서 일어났던 비리와 압박보다 더 치명적인 비밀이 있는 것이라면, 심지어 사법 기관의 심판까지도 이끌어낼 수 있을 만한 비밀이라면 하 회장에게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히는 것 역시 가능할지 몰랐다.
“뭐예요, 그 얼굴.”
“그냥…….”
“설마 복수는 하견이 해야 한다, 뭐 이런 생각으로 나 방해하려는 건 아니죠?”
은호는 가볍게 물으며 떡볶이를 집었다.
제법 매웠던 모양인지 입술이 살짝 부풀어 오른 채로 오물오물 떡을 씹는 그를 보며 정서가 눈살을 찌푸렸다.
“사람을 뭘로 보고.”
“뭘로 보긴 사람으로 봤지. 오히려 그게 자연스러울 수도 있죠. 당신이 나를 응원했으면 좋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바람일 뿐이니까요.”
“널 응원해, 나는.”
정서는 한참 은호를 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이번에는 그가 그녀를 바라볼 차례였다.
생각지 못한 정서의 말에 잠시간 당황한 듯 그녀의 얼굴 위를 배회하던 그의 시선이 마찬가지로 살짝 부푼 입술에 닿았다.
“날 응원해, 윤정서가?”
“응원하지. 응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뒤집으면 응원할 이유도 없어 보이는데.”
“언제까지 비밀로 할 거야?”
툭, 정서가 물음을 던졌다.
태연한 얼굴, 단정한 가르마와 곧은 눈썹과 콧대.
얇은 쌍꺼풀 아래 투명하고 깨끗한 눈동자에 비친 또렷한 자신의 모습.
은호는 그것을 들여다보며 숨을 골랐다.
“앞뒤 다 자른 물음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날 만났다고 했었잖아. 병원에서, 이수연을.”
“아……. 기억력도 좋으셔라.”
“수국을 선물할 사람은 뻔하지. 그때 둘이 무슨 얘기 나눴어?”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한데요?”
은호는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두었다.
정서는 그 모습을 보며 남은 음식이 아깝다 중얼거리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만 원짜리 다섯 장을 꺼내 가지런히 테이블 위에 내려두었다.
“잠깐 걷자. 커피는 네가 사. 여기 옆 자판기 커피맛이 죽여 줘.”
“너무 달아서 취향 아닌데, 그거.”
“그럼 넌 블랙으로 마셔.”
“그렇게 독단적으로 굴 때 매력적으로 보이는 거 알아요?”
“알아.”
정서를 따라 분식집을 빠져나온 은호가 주머니에서 동전을 찾아 꺼냈다.
커피가 나오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정서는 어느덧 낙엽을 떨구고 있는 나무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쓸쓸한 계절에, 꼭 이만큼 추울 즈음에 견은 정서를 떠났던 것 같다.
“여기요.”
“이제 대답해, 시간 충분히 줬잖아.”
“만나서 뭘 물었겠어요. 사진 찍은 거 어디에 쓰려고 하나 했죠.”
“그게 전부야?”
“나 못 믿네.”
서운함이 담긴 목소리였으나 그에 넘어갈 정서가 아니었다.
전지훈이 은호를 찾아왔다면 은호가 먼저 그녀에게 연락을 했을 것이다.
혹시 전지훈이 찾아오지 않았냐고, 그리하여 곤란하거나 위험하지 않았냐고.
하지만 그런 연락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지훈이 은호를 찾지 않았다거나, 누군가 먼저 귀띔해 줘서 은호가 지훈을 만나도 놀라지 않았다는 뜻이었고.
그렇게 귀띔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정서가 아니라면 견이 유일했다.
견이 은호를 만났을 때 둘은 분명 수연에게 관해 얘기했다.
그 대화가 갑작스러운 수연의 퇴사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추론 역시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
정서의 곧은 눈빛에 은호는 곤란한 듯 제 눈썹뼈 부근을 매만지더니 손을 내렸다.
먼저 나온 커피를 후 불어 정서에게 건네더니 제 몫의 커피를 뽑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짜 못 당해내겠다, 당신을.”
“너만 못 믿는 거 아냐. 너랑 얘기했을 하견도 못 믿어.”
“아무도 못 믿어요?”
“둘 다 나에게 숨기는 게 있는 상황에서는, 적어도.”
“쉽지 않네. 말 안 하면 이유가 어련히 있겠거니 하고 넘어가 주면 안 돼?”
정서는 은호에게 다가섰다.
그의 몫으로 나온 커피를 꺼내 쥐여주며 그녀가 그를 올려본 채로 나긋한 음성을 냈다.
“날 지키는 사람은 나야, 차은호.”
“…….”
“네 상냥함은 고마워. 날 위한 마음도 조금은 들어있다는 걸 알아, 그속에. 근데 그걸론 안 돼. 나 역시 나만의 싸움을 하고 있어. 너만큼은 아니어도 하 회장에게 갚아 줄 일이 있고 그건 이수연에게도 마찬가지야. 날 존중해 줘. 만약 누가 너에게 그렇게 굴었다면 나는 망설임없이 너에게 전했을 거야. 설령 그게 너를 다치게 하더라도, 너를 믿으니까. 네가 이겨낼 수 있다는걸.”
하…….
은호는 고개를 수그렸다. 매끈한 입술 사이에서 헛웃음이 샜다.
승소율이 좋은 변호사라더니,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이렇게 영리한 사람이 어째서 은호의 마음만 못 알아채는 건지. 그거야 말로 정말 억울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사고를 낸 트럭 운전사, 이수연이랑 아는 사이예요.”
은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정서와 눈을 맞추며 답했다.
조금 놀랐으나, 아주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크게 난 사고가 아니었고 트럭 역시 대형 트럭은 아니었다.
정말 죽이려 했다면 그보다 깔끔한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죽이려는 게 아니면? 겁이라도 주고 싶었던 걸까.
고작 그런 걸로 물러설 것처럼 보였을까.
정서가 옅게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반응인가 싶어 저를 살피는 은호의 호기심 담긴 시선을 받아내며 그녀는 생각했다.
자존심이 너무 상하는 일이라고.
수연이 자신을 얕잡아 봤어도 너무 얕잡아 봤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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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영이 택한 만남의 장소는 한적한 곳에 위치한 소담한 카페였다.
동네 주민인 것 같은 손님 두엇이 각자의 자리에 앉아 책을 읽거나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카페 주인은 그가 누구인 줄 아는 기색인데도 특별히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서 그가 이 카페에서 보자고 한 이유를 알 법도 했다.
“아닙니다. 무엇으로 드시겠어요? 커피 맛이 나쁘지 않습니다. 차도 괜찮고요.”
“아이스 아메리카노면 될 것 같은데…….”
“뜨거운 걸 못 드세요?”
“그건 아닌데 입에 잘 맞지 않아서.”
“화가 많으시군요?”
태영은 강직한 인상을 가진 미남이었다.
아나운서 제의를 몇 번이나 받은 기자다웠다.
농담을 하는 발음과 음성이 하도 좋아 하마터면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제가 주문하고 오겠습니다. 잠시 앉아 계세요.”
“아, 제가 대접해드려야죠.”
급하게 일어나려는 정서에게 고개를 저어 보인 태영이 자연스럽게 카운터로 다가갔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던 정서는 결국 바로 앉고선 옆에 내려둔 가방을 들었다.
가방을 열자 안에 담긴 흰 서류 봉투가 보였다.
그 안에는 지훈이 가지고 있던 자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백영 재단 장학생들의 인터뷰와 백영이 그들의 작품을 어떻게 구입해 비자금을 조성하였는지.
상세하게 서술된 자료는 아니었지만, 그 사이 사이를 연결하기에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태영 같은 훌륭한 기자가 보강 취재를 해 준다면 충분히 신뢰감 있는 기사가 나올 것이었다.
“여깄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서는 제 앞에 놓인 음료를 보고는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보았다.
태영이나 정서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아무래도 기밀 사항을 얘기하기엔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오는 길에 혹 저를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지 몇 번이나 확인을 했음에도 그랬다.
“불편하세요, 자리가?”
“아닙니다. 다만 나눌 이야기가 좀…….”
“민감한 얘기라고 생각해 걱정하시는 거군요.”
“네. 장태영 기자님께서는 워낙 유명하신 분이셔서.”
“그래서 저를 고르셨잖아요.”
태영은 여유롭게 웃어 보이고는 찻잎이 우러나는 양을 잠시 지켜보았다.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는 정서 역시 그 모양을 따라 보자 태영이 입을 열었다.
“이런 일을 좋아해요. 딱히 쓸모는 없지만 누군가를 홀리기엔 충분한 것들을 지켜보는 일.”
“…….”
“진실은 꼭 이런 단순한 것들에 숨어 있는 것 같거든요.”
“기자다운 말씀이시네요.”
“변호사로서 활동하셨을 때부터 저는 윤정서 씨를 알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훅 들어온 말이었다.
정서는 당황했다.
태영이 문제 삼을 것이 백영 그룹과 그녀의 관계일 줄 알았던 탓이다.
실수였다.
태영이라면, 꼼꼼하고 냉철하기로 유명한 태영이라면 그녀 삶 전반을 관심 갖고 훑을 수도 있었다.
“인상 깊었습니다. 열악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반드시 승리를 쟁취하시더군요. 특히 수임료가 클 것 같은 사건만 맡아서 하셨고요. 다른 변호사가 꺼릴 만한 일도 도맡아 하셨죠. 무슨 약점을 크게 잡히셨길래 그러셨을까. 그런 생각도 간혹 했습니다. 기사로 쓰진 않았습니다만, 언젠가 만날 수 있다면 만나 보고 싶었죠.”
“……열심히 일했죠. 영광이네요, 저에 대해 알고 계셨다니.”
“특히 그 사건.”
“…….”
“변호사로서 맡으셨던 마지막 사건이 인상 깊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