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85)

78.

“네, 제 연락처는 남겨 두었으니 잘 좀 부탁드린다고 전해 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정서가 전화를 끊고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결혼식 전에 제일 중요한 것은 뭐니뭐니 해도 피부 관리라고 신신당부를 한 미희가 타 둔 체리청에 수면제라도 든 것인지.

그녀는 유난히 저녁만 되면 졸음이 몰려와 일찍 잠들었다.

“얼굴이 좀 부었네.”

“나? 이상해?”

“이상한 게 아니라 귀여워.”

씻고 나온 견이 머리를 털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식탁 위에 미희가 올려둔 사과를 들어 한 입 베어 물며 혀를 작게 찬 그는 손을 뻗어 정서의 뺨을 쓸었다.

“아침부터 또 일? 어제도 졸리다고 잤잖아. 남편을 이렇게 독수공방시키는 아내가 대체 어딨는 건데.”

“독수공방이라니. 굳이 넓은 침실 두고 내 방에 와서 자잖아, 몸 구겨 가며.”

“그거야 네가 틈을 안 주니까. 너 자면 나 심심해.”

“심심하면 드라마를 보든지, 게임을 하든지.”

“윤정서보다 재미없어.”

실없는 소리 좀 하지 말라고 말하며 정서는 시선을 다시 노트북으로 돌렸다.

마침 메일이 왔다는 알림이 울렸다.

“출근 전엔 나 좀 보지? 나 오늘 바빠. 신혼 여행을 가는 것도 아닌데 마치 결혼하면 내가 회사 일을 전부 던져 버릴 것처럼 결재 서류를 올려, 다들.”

“그동안 믿음을 사지 못한 거잖아, 상사로서. 무책임한 소리하지 말고 업무를 끝까지 완수하세요.”

“그거 아내로 하는 말이야, 직원으로 하는 말이야? 아, 맞아. 백영 엔터테인먼트에서 계속 일할 거야? 그럼 전략기획팀 들어갈래?”

메일을 클릭하면서 건성으로 대답하던 정서가 견을 보았다.

뭔가 이상햇다.

“우리 전략기획팀 없잖아.”

“응. 없어. 너한테 제일 잘 어울리는 팀 생각해서 정했어. 팀장하면 좋겠어.”

“나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경력이 전무한데?”

“그래도 위기 대응은 전부 네가 했잖아. 고작 몇 달 동안 쌓은 커리어가 훌륭합니다. 반대하는 사람 없을걸.”

“내가 직면한 위기 중 절반 이상이 대표님께서 자초하신 건데요. 그건 대표로서의 제안이야, 남편으로서의 제안이야?”

견이 던진 질문을 다시 돌려주며 정서가 눈을 맞췄다.

제 체면을 지켜 주겠답시고 제안하는 자리라면 거절함이 마땅했다.

백영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저만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아쉽게도 이건 백영. 사심 한 방울 없이 한 선택이야. 그러니 임원들과 논의할 거고.”

“걱정되네. 임원 분들 나 안 좋아하는데.”

“그거 설마 나 때문?”

아닐 리 있나.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해 보인 정서가 메일을 다시 읽어나갔다.

저는 현직 기자가 아닙니다. 저는 오직 공익성을 위한 제보만 받고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앞서 난 기사들을 통해 백영 엔터테인먼트 하견 대표와 제보자 님의 관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제보의 공정성과 합리성이 의심스럽습니다.」

예상했던 답변이었다.

전직 기자 출신으로 현재는 백 퍼센트 후원을 받아 탐사 보도 기사를 쓰는 장태영은 그래도 회신을 주는 성의를 보였다.

“표정이 어둡네.”

“메일 답장 왔어.”

“누구한테. 장태영?”

“응.”

“솔직히 잘생긴 외모도 한몫했지? 선정하는데.”

“아니야. 어느 그룹과도 연관이 없고 화제성도 있고. 여러 면에서 볼 때 최선의 선택이야…… 어?”

그러나 첨부하신 파일을 확인해 본 결과, 제보가 사실이라면 반드시 보도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보하신 이유에 관해 듣고 싶으니 괜찮으시다면 시간과 장소를 정해 뵙기를 청합니다.

“왜.”

“만나재.”

“뭐?”

견은 들고 있던 사과를 내려두고 정서에게 다가왔다.

뒤에 선 채 메일을 확인하던 그가 낮게 신음했다.

“사진을 봤네.”

“뭐?”

“네 사진 보고 만나자는 거야, 이 자식.”

“그럴 리가 있어? ……벌써 여덟 시다. 출근 준비하시죠. 나도 답장만 쓰고 옷 갈아입을게.”

“너 지금 신났어.”

“아닌데.”

“진짜 신났어.”

“아니라니까.”

견의 의심스러운 눈빛을 뒤로한 채 정서는 곧장 회신을 쓰기 시작했다.

&

“본부장님 지금 미팅 들어가셨는데. 박 실장님께서도 따라 들어가셨어요.”

“아, 알아요. 김 비서님 잠깐 뵈러 온 거예요.”

“저를요?”

김 비서는 정서의 말에 놀란 듯하면서도 그녀가 건네주는 그린티 프라푸치노를 보고 활짝 웃었다.

마침 당이 떨어지던 참이었다.

“잠깐 티타임 괜찮죠?”

“네, 물론이죠. 공고에 쓸 문구 고민 중이었어요, 안 그래도.”

“공고요? 아, 이 비서님 사직하셨다고 했죠.”

“네. 너무 급작스러워서 놀랐다니까요. 그것도 자의로 사직한다니, 너무 이상하잖아요. 평소에 대표님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던 사람이. 아, 제가 또 말실수를.”

뒤늦게 제가 말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든 김 비서가 황급히 입을 다물자, 아니라는 듯 정서가 고개를 저었다.

어쩌다 관두게 된 것인지 자세한 내막을 견이 말해 주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듣는 편이 나았다.

“저도 알고 있었는데요, 뭘. 그래도 오래 버텨 줘서 다행이었죠.”

“문제는 그날 그렇게 돌아가서 아직도 짐을 가지러 안 온다는 거예요. 반납해야 할 것들도 있는데.”

“사원증 말하는 거죠?”

“사원증, 법인 카드, 보안코드……. 한두 개가 아니에요.”

“연락은 해 보셨어요?”

“물론이죠. 못 해도 스무 통은 걸었는데 꿈쩍도 안 해요. 대단하죠. 일할 때도 독하단 생각은 했는데.”

“그럼 사직서도 내지 않은 거네요?”

“그건 대표님이 그냥 형식상 절차라고 처리하셨어요.”

“그랬구나.”

김 비서는 조심스럽게 녹차 프라푸치노에 손을 뻗어 쭉 들이켰다.

그냥 물러설 수연이 아니다.

견에 관한 문제라면 비이성적인 집착까지 보였던 사람인데 순순히 갔다는 게 이상했다.

둘이 무슨 얘기를 나눴던 걸까.

대체 무슨 약점이 잡혔기에 좋아하는 견의 곁에서 물러난 걸까.

하 회장.

순간 번뜩하고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견에게 버림 받은 수연이 유일하게 기댈 곳이 있다면 하 회장뿐이었다.

두 사람이 따로 연락하고 만나는 것 같았으니, 수연은 하 회장에게 자신이 아직 쓸모 있다 증명하고 싶을 게 분명하고.

그렇다면 수연이 가져갈 수 있는 카드는 뭐가 있지?

견의 비서 역할을 하며 얻었을 정보들, 계좌 내역이나 회사 내부 기밀 사항들.

그리고 은호.

사진까지 찍어갈 정도였으면 정서와 은호의 연결고리를 어떻게든 더 깊숙이 얽고 싶을 것이다.

“그래도 윤 변호사님과 결혼 발표하시고 나서 대표님도 업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셔서 이번에 새로 구할 비서는 오래 일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럴 거예요, 분명. 김 비서님께서도 오래 일해 주세요.”

“물론이죠. 저는 배경에 뼈를 묻을 겁니다!”

결연히 말하는 김 비서에게 웃어 보인 정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는 거냐 못내 아쉬워하는 김 비서에게 또 오겠다 말한 그녀는 곧장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며 로비로 향했다.

― 웬일이에요. 먼저 날 다 찾고?

“밥, 지금 사도 돼?”

― 오후 세 시에 밥을 사시겠다. 웬만한 식당은 다 브레이크 타임인 이 시간에?

“맛있는 거 사 줄게.”

― 엄청 맛있는 거야 할 거예요.

“응, 엄청 맛있는 거야.”

확신에 찬 미소로 대답한 정서는 그로부터 정확히 삼십 분 뒤 가게로 들어오는 은호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리다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의자를 뺐다.

“맛집이라면서요.”

“맛집 맞는데?”

“검색해도 안 나와서 근처에서 헤맨 거 알아요?”

“그게 맛집이라는 증거지. 사장님, 여기 떡볶이랑 순대, 주먹밥 주세요.”

“튀김은 왜 빼요?”

“다 먹을 수 있어?”

“물론이죠. 튀김도 주세요, 여기.”

허름한 가게의 내벽엔 낙서가 가득했다.

주로 커플들이 남긴 낙서였는데 군데군데 연예인의 얘기나 시험 합격을 기원하는 이야기도 적혀 있었다.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는 은호의 앞에 어묵 국물을 담은 종이컵을 탁 내려 준 정서가 입을 열었다.

“여기 나 학교 다닐 때 자주 왔어.”

“낙서도 남겼어요?”

“…….”

“어? 그냥 한 질문인데 왜 대답을 못 해요. 진짜로 낙서 남겼어요?”

“아무튼 여기 떡볶이 진짜 매운데. 너 매운 거 잘 먹어? 어려서 못 먹는 거 아냐?”

“몇 살이나 차이 난다고 애기 취급이에요.”

“날만큼은 나지. 나 궁금한 거 있어.”

“그냥 밥 사 주는 건 절대 안 하지. 난 용건 있을 때만 보죠?”

어쩐지 조금 툴툴거리는 말투에 정서는 잠깐 말이 없었다.

앞에 차례로 놓이는 음식을 보며 은호에게 포크를 챙겨 주고서 저도 떡볶이를 콕 찍어 입에 가져갔다.

“매운맛은 통각이래, 감각인 거지. 대학 시절의 나는 거의 아무것도 못 느꼈거든? 그래서 살아있는 걸 느끼고 싶을 땐 여기 왔어.”

“콧물 흘리면서 먹고 난 살았다 실감하고?”

“응. 우습지. 그땐 혼자 다니느라 늘 마감 전에 와서 먹었거든. 괜히 아는 사람 마주치기 싫어서.”

“갑자기 마음 약해지게 그런 말을 해요. 와, 이거 진짜 맵다.”

정서는 떡볶이를 씹다 급하게 튀김을 집어 입에 넣는 은호를 보고 피식 웃었다. 

그러곤 튀김이 담긴 그릇을 은호 앞에 놓아주었다.

“은호야, 이수연 만났어?”

“……아, 질문이 더 맵네.”

“무슨 말 나눴는지 알려 줄 수 있어?”

정서의 질문에 은호는 제가 수연에게 건넸던 쪽지를 떠올렸다.

“내가 누군지 궁금해해서 알려 줬어요.”

“이수연은 하 회장이랑 각별한 사이야. 네가 누군지 알리면…….”

“응. 전하겠죠, 분명히.”

“그런데도 말해 줬단 말이야?”

“이제 때가 됐거든요.”

“너……. 뭔가를 확실히 손에 넣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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