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7화 (77/85)

77.

“그동안 네 비서 뽑을 때마다 내가 누군지 전부 확인했던 건 알아?”

“……응.”

이 얘기가 갑자기 왜 나오지?

견은 정서의 허리에 두른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꼼꼼히 봤어. 네가 좀 까다롭게 굴어야지. 그러니까 몇 줄로 나열된 이수연의 정보쯤은 나도 가지고 있다는 뜻이야.”

“…….”

정서가 제 허리를 두른 견의 손을 떼어내려 손을 내렸다.

견은 쉽게 놓아주지 않으며 저항하다 그녀가 눈을 치켜뜨자 그제야 하는 수 없다는 듯 떨어졌다.

무슨 말을 할 줄은 몰라도 일단은 지은 죄가 있으니 눈치를 봐야 했다.

“하고 싶은 말 해. 다 듣고 설명할게. 그래도 화가 나면 뭐든 해. 나도 풀어 주기 위해서 뭐든 할 테니까.”

“네가 만약 이수연 선배면…….”

“응.”

“나랑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거잖아.”

“응?”

정서의 관점은 견과 달랐다.

그 부분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었다.

당황한 듯 굳어 버린 그의 얼굴을 보며 정서가 한 걸음 그에게 다가섰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따뜻한 햇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견의 속도 모르고 살랑였다.

“너는 날 계속 지켜봤다고 했고, 그럼 같은 대학 나온 줄도 알았을 텐데. 왜 나만 감쪽같이 몰랐지?”

“그건…….”

“이상하잖아, 하견. 아무리 학교가 넓고 학생 수가 많아도 너처럼 눈에 띄는 사람을 내가 한 번도 못 봤다는 게 말이 돼?”

“…….”

견이 침묵했다.

정서가 견을 빤히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즐비한 건물 숲 사이로 바쁘게 오고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정서는 조용히 가슴 속을 휘몰아치는 태풍을 잠재우기 위해 심호흡했다.

견을 잃었다 생각했다. 가져 본 적도 없으면서 견이 사라졌음에 슬퍼했다.

악착같이 살면서도 종종 무너졌다.

그 반짝거리던 것이, 멋지던 애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특별할 것 없을 자신을 그저 아버지도 밀어 버린 파렴치한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내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마음에 걸렸던 것은 학교생활을 하는 동안 어딘가에서 견이 저를 봤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졸업하자마자 지워 버린 그 기억 속에 윤정서는 늘 우중충하고 볼품없었다.

“나 유학 갔어. 알잖아. 게다가 군대도 갔고. 실제로 학교 다닌 건 일 년도 안 돼. 내가 수업 꼬박꼬박 나갔을 리도 없고.”

견은 사실에 입각한 말들을 조립해 나열했다.

물론 씨알도 안 먹힐 뻔한 눈속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실제로 학교를 성실히 다니진 않았지만 다니는 동안 정서에 대해 완전히 모르고 지냈던 것은 아니다.

먼발치에서 비슷한 사람을 보고 홀린 듯 따라간 적이 있었다.

“…….”

“뭐가 문젠데. 나랑 같은 학교 다니면서 몰랐던 거? 그게 널 바보 만드는 것 같아서 싫어? 의도하고 간 건 아니야. 제때 들어간 것도 아니고, 오래 다닌 것도 아니고. 내 성적으로 그 대학이 가당키나 해? 아닌 거 알잖아.”

“……창피해.”

정서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수그렸다.

난간에 걸친 희고 가는 팔 위로 얼굴을 파묻은 정서의 뒤통수를 내려보며 견은 잠시 침묵했다.

정서가 창피하다고 말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 역시 견이 자신의 창피함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대학 수업은 촌에서 사교육 한 번 안 받고 공부한 정서가 따라갈 수 있는 수업이 아니었다.

교양이라는 건 다년간의 생활에서 쌓이는 것들이라, 교수님이 예시로 드는 책이나 영화를 몰라 밤을 새워서 봐야 했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선 공부해야 하는데 생활비를 벌 시간도 모자랐다.

좀비, 시체, 흡혈귀.

온갖 것들을 가져다 붙여도 이상하지 않을 몰골을 하고 아무와도 어울리지 않고 피폐하게 다니던 그 시절.

정서는 저를 두고 사람들이 어떻게 불렀는지 똑똑히 기억한다.

‘독종, 미친년, 가난한 년.’

그 모습을 견이 고스란히 봤을 거라고 생각하면 창피해 죽고 싶었다.

그런 정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견이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 그녀의 뒤에 섰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등에 고개를 묻었다.

“너 피하느라 난 너 제대로 보지도 못했어.”

“…….”

“네가 창피해할 모습도 나에겐 분명 사랑스럽겠지만, 그건 틀림없지만. 네가 싫다면 잊을게. 이건 엄청 큰 마음 먹고 하는 말이야. 나는 윤정서와 함께 있던 시간을 1분 1초도 잊고 싶지 않은 사람이니까.”

부드럽고 나긋한 목소리에는 묘한 위로가 실려 있었다.

단순히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정서를 위로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었다.

그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정서는 토라진 것을 풀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건 좀 잊어라.”

“흑역사?”

“그래, 흑역사.”

뒤에 기댄 견의 머리칼을 몇 번 쓸어 보던 정서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기지개를 활짝 켰다.

좌절하는 것도 잠깐이다.

축축하고 습한 기억은 이제 볕에 말리고 앞으로 나아가야지.

“전지훈한테 가져온 자료에 나온 이야기들을 취재해 줄 기자를 찾고 있어. 믿음직한 사람이어야 하고, 파급력도 있어야 하니까 준비할 게 한두 개가 아니야.”

“또 카페 가게? 법무팀에서 자리 뺐다며. 불편하면 진즉 말하지 그랬어.”

“내가 불편해서 그런 거 아니야. 다른 직원이 불편해서 뺀 거지. 상사와 결혼할 여자랑 사무실 같이 쓰는 게 편할 사람이 어딨어?”

“……나 방금 되게 꼰대 같은 말할 뻔 했어.”

“잘 참았네.”

정서가 견의 배를 툭 친 뒤 옥상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왜 껴안았는데?”

“어?”

“둘이 거의 한몸이던데?”

계단을 내려가는 정서의 발소리가 울렸다.

낭패였다, 여러모로.

&

“그날 기다리지 않고 먼저 간 건 그쪽이면서 날 왜 불러내지? 내 연락처는 또 어떻게 알았고.”

“그런 소모적인 질문할 거면 다른 얘기로 넘어가지.”

은호는 제 앞에 앉아 있는 수연을 빤히 보았다.

눈이 살짝 부은 것이 운 것 같았다.

견이 결국 수연이 무슨 짓을 벌인 것인지 알아낸 모양이다.

“무슨 얘기요.”

“오해를 마치 사실인 양 전하면 곤란하지.”

“말에 빈칸이 너무 많네. 비싼 거 마셔도 되죠? 여기 바틀도 주문돼요?”

“나 너랑 놀려고 여기 온 거 아니야.”

“저도 놀고 싶어서 온 거 아닌데. 그쪽이랑 내가 같이 노는 건 웃기잖아.”

어두운 조명에 낮게 깔린 재즈 음악.

이런 곳에  자주 온 듯 위화감이 없는 상대의 태도 같은 것들.

이런 고급스러운 바에 좀체 올 일이 없는 은호였으나, 대충 돌아가는 분위기는 파악하고 있었다.

굳이 여기까지 저를 불러낸 건 기를 죽이기 위함이겠지.

수연은 공간이 주는 위압감을 통해 기선을 제압하고 돈이든 권력이든 제가 가진 수를 들이밀 것이다.

재벌이라는 사람들은 생각이 천편일률적이라 좀 지루한 감이 있었다.

“정체가 뭐야, 그쪽?”

“핸드폰 번호를 알아낼 정도면 그 정도는 쉽게 파악하지 않아요?”

“아니, 백영 그룹과 무슨 관련이 있냐고.”

“관련 없는데.”

“그럼 고작 윤정서 하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군다고?”

“당신이 할 말인가 그게? 남자에 미쳐서 사람 죽이려고 했어.”

“목소리 안 낮춰?”

수연이 은호의 팔뚝을 움켜쥐며 비명을 지르듯 말을 내뱉자 그가 피식 웃었다.

잡힌 손을 빼내며 손을 들어 자연스럽게 위스키 한 잔을 주문하고서 그녀의 얼굴을 살피는 은호의 얼굴이 여유로웠다.

“부정할 생각도 안 하나 봐요, 이제.”

“네가 바라는 것과 내가 바라는 것은 같아. 윤정서랑 하견이 헤어지는 거. 아니야?”

“뭐, 그렇게 납작하게 표현하시겠다면 비슷한 구석도 있죠.”

“그럼 날 도와야지. 이대로라면 둘이…….”

“결혼하겠죠?”

은호는 제 앞에 놓인 잔을 들어 빛에 비춰 보았다.

정서의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다.

드레스는 안 어울리는데, 정서는 청바지와 티셔츠가 어울리는데.

구두보다 운동화가 어울리는 사람이 그날은 또 얼마나 피곤하게 사람들에게 맞추고 있을까 생각하면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쿨한 척하는 게 미덕인 세상인 건 알겠는데, 지금 그럴 때가 아니지.”

“쿨해 보여요?”

“전지훈 어떻게 찾았어?”

“그게 누군데요.”

“모르는 척하지 말고. 백영 재단에 관한 정보 네가 빼돌린 거잖아. 그것만 가지고 있는 거 아니지?”

“이수연 씨.”

코너에 몰린 사람에게는 다른 수가 없었다.

주먹을 휘둘러야 했다. 이판사판이었다.

결국 견은 하 회장의 말을 들을 것이다.

가진 것을 전부 포기하고 정서에게 갈 수는 없을 테니까.

정서 역시 모든 걸 다 잃은 견을 사랑할 리 없었다.

“제가 윤정서에게 목매고 있다면 그런 걸 생판 남인 당신에게 말하겠어요? 아, 쓰다. 이거 도수 얼마나 돼요? 목이 타들어 갈 것 같네.”

“똑바로 말해. 아무것도 없는 너 따위가 윤정서 잡으려면 나랑 손잡는 수밖에 없을 테니까.”

“왜요?”

“뭐?”

“그쪽이 나한테 뭘 줄 수 있는데?”

“적절한 정보를 주면 그에 상응하는 사례를 줄게. 네가 평생 수학으로 애들 가르쳐도 가질 수 있을까 말까 한 것들을 말이야.”

“아……. 아주 뒷조사를 안 한 건 아니구나? 그럼 그냥 능력이 부족했네.”

은호가 잔에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꺼낸 꼬깃한 종이를 수연의 앞에 내밀었다.

“내가 베풀 수 있는 호의는 딱 여기까지. 다음엔 불러내지 마요.”

수연은 멀어지는 은호의 뒷모습을 보며 종이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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