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그래도 생각보다 오래 걸리셨네요. 그것보단 먼저 떠올려 주실 줄 알았는데.”
실수하지 말자, 괜히 분위기 망치지 말자.
그렇게 생각하면서 수연은 태연하려 노력했다.
어쩐지 감격스러워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기도 했지만, 고작 그런 감정으로 이 순간을 망치기엔 지금이 너무 소중했다.
지금까지 견이 정서를 애틋하게 여겼던 건 그가 저를 알아보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수연과 견은 정서 못지않은 추억을 가지고 있었다.
이 뒤에 이어질 일들이 수연은 무척이나 기대됐다.
견이 조심스레 수연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다가 그대로 손을 내려 그녀의 턱을 어루만졌다.
숨이 멎을 것 같은 느낌에 수연이 온몸에 힘을 주자 그가 가볍게 웃었다.
“긴장했어?”
“…….”
다정하고 나긋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자 수연의 아래에 뜨겁고 뭉근한 기운이 감돌았다.
탄탄한 가슴팍에 고개를 기대고 싶다가, 저 두터운 허벅지 사이에 감기고 싶다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수연의 목덜미를 스치는 손이 이상하게도 찼다.
오싹한 느낌과 함께 등허리를 타고 소름이 돋아올랐다.
“그래, 확실히. 그때랑 달라졌어. 그땐 요령도 없었고 누가 나쁜 말을 한다고 기가 죽어 있었지. 안타까웠던 것 같기도 해.”
견은 수연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 눈동자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둡고 차가웠다.
그때 그 말을 했던 건 그의 어머니가 생각나서였을 뿐이라고.
애를 싸질러 놓고 책임질 줄 모르는 그 한심한 남자보다 수연이 비난받는 상황이 납득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런 말을 뱉었다는 사실도, 수연이라는 여자애가 있었다는 사실도 그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최근에나마 다시 알게 된 것은 그래서 행운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이렇게 달라졌네.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내고 요령도 있지. 나도 회장님이 집으로 부를 때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했는데 이 비서는 금세 초대됐잖아, 맞지?”
“…….”
“그래서 나는 궁금해. 이 비서가 무엇까지 할 수 있고,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그게 무슨 말인지…….”
견이 고개를 수그렸다.
수연과 숨결이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견이 슬쩍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리고 수연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그러나 또렷하고 묵직한 목소리를 내어 말했다.
“내가 말했던가?”
“…….”
“사랑이 전부인 양 목매는 여자는 딱 질색이라고.”
“대표님. 아니, 선배님.”
“우리 후배님께서 나한테 품은 감정이 뭐든 궁금하지 않아. 알고 싶지도 않고. 근데 그 감정 하나 간수 못 하고 멋대로 휘두르면 곤란하지. 좋아. 무엇이든 가지려고 달려드는 그 성미. 아주 인상적이었어.”
“윤정서는 다른가요? 윤 변호사는 자기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선배님한테…….”
“이수연.”
부풀었던 기대가 꺼졌다는 사실을 수연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저를 알아봤다면 이럴 수 없었다.
모두가 저를 흉보고 우스꽝스럽게 여겼을 때 유일하게 편을 들어 줬던 견이 이러면 안 되는 거였다.
수연의 가장 큰 약점이자 과오를 알면서도 그것을 태연히 넘긴, 약점 잡지 않은 남자.
그래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이래서는 안 됐다.
“뭔가 대단히 착각하고 있네.”
“…….”
견의 큼지막한 손이 가는 수연의 목덜미를 스쳤다.
당장이라도 목을 쥘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스산한 손길에 수연이 반사적으로 걸음을 뒤로 무르자, 견이 그녀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겨 안았다.
“윤정서에게 목매는 건 나야.”
“왜요. 대체 왜. 선배한테 그 여자가 뭐길래. 그 특별한 것도 없는 여자가. 그렇게 애틋하고 불쌍하세요? 나도 그렇잖아. 나도 불쌍하잖아. 선배 눈에 난 안 보여요?”
억울한 마음이 쏟아졌다.
이해할 수 없었다. 납득할 수도 없었다.
시련과 고난이라면 수연도 겪을 만큼 겪었다.
견의 비서가 되겠다고 했을 때 그녀의 집안 사람들은 모두 웃었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눈 밖에 난 자식이었으니까.
윤정서란 여자가 있는데 그 사람 말만 듣는다더라.
그러니까 그녀를 최대한 따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조언도 들었다. 시험 삼아 그렇게 하면서도 우스웠다.
그 여자가 뭐라고.
그 여자에게는 없는 애틋함이 견과 자신 사이엔 있었다.
그렇게 믿었었다.
“보여.”
“근데 왜…….”
“그러니까 치우려고.”
“예?”
“오늘부로 해고입니다.”
“아니, 갑작스럽게 이런 식으로 통보하실 순 없어요. 지금 흥분하셔서 이러시는 것 같은데 대체 뭐가 문제인 건지 얘기라도 해 주세요. 뭘 잘못했다고 제가 관둬요.”
견이 수연을 안고 있던 손을 놓았다.
휘청거리던 수연이 겨우 벽을 짚으며 균형을 잡자, 견이 상자 하나를 그녀의 발치로 던졌다.
거칠고 투박한 몸짓은 수연이 설령 그 상자에 맞게 되더라도 눈 하나 깜짝 안 했을 거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유까지 설명해 줄 만큼 우리 사이가 가까웠던가? 다른 비서들과 마찬가지로 그냥 잘리는 겁니다. 사유를 대자면 끝도 없겠지만, 설명하기 귀찮으니까 불합리하다 생각되면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하든 뭐든 해 보세요.”
“저를 자르신 걸 알면 회장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겁니다.”
수연은 최후의 보루를 꺼냈다.
그녀가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결혼하셔야죠. 회장님 귀에 이 말이 들어가면 승낙해 주셨던 것도 취소하실 게 분명합니다. 잘 생각하세요. 순간의 충동으로 이렇게 하시는 거, 이제는 그만하실 때가 됐습니다.”
“아, 그런가. 승낙 취소하려나.”
“…….”
“그건 그거대로 재밌겠네. 어차피 그 양반 말 어기는 재미로 사는 거거든, 내가.”
견은 그렇게 말하며 손수 걸음을 옮겨 대표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밖에 있는 비서진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고마웠습니다, 이 비서. 덕분에 대표의 자리도 오르고. 많은 걸 해낼 수 있었어요.”
“…….”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이 비서에게 모두 박수 쳐 주시기 바랍니다. 공고는 천천히 올리세요, 박 실장님.”
“예? 예. 알겠습니다…….”
어안이 벙벙한 박 실장의 모습을 보니 박 실장조차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나 보다.
수연은 제 발치에 떨어진 상자를 노려보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굴이 화끈거리다 못해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견은 제 옆을 지나쳐 대표실을 빠져나가는 수연의 어깨를 두어 번 부드럽게 두드렸다.
그리고 속삭였다.
“후배님,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결혼식 화환은 정중히 거절할게. 이미 받은 것 같거든, 네 선물은.”
“아뇨. 준비해서 제대로 찾아올게요, 선배.”
수연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꾹꾹 눌러 담아 말했다.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그대로 비서실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비서진들은 숨을 죽였다.
“박 실장님, 바쁘시겠지만 이후 일정은 직접 챙겨 주셔야겠습니다.”
“아닙니다. 그게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인걸요. 그런데 저, 대표님…….”
“뭡니까?”
어쩐지 박 실장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수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게, 아까 윤 변호사님께서 잠깐 들르셨습니다. 뭐 줄 게 있다고 하셔서. 이 비서님과 얘기 중이시라고 했더니 그럼 잠깐 뭐 하나만 묻고 가겠다고 가셨는데. 문 앞에서 잠깐 서 계시더니 그냥 돌아가셨어요.”
“……그게 언젭니까?”
“글쎄요. 한 십 분, 십오 분 전쯤인데.”
젠장.
견은 작게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꺼냈다.
정서의 번호를 찍고 통화 버튼을 누르자 신호음이 갔다.
“어딨어.”
복도를 두리번거리다 비상계단의 문을 연 견이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윤정서 자리가 아직 법무팀에 남아 있던가?
아니, 이참에 자리를 다시 줘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신호음은 고저 없이 평범히 울렸다.
“왜 안 받아.”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고작 그런 모습을 보고 오해할 정서가 아니란 것은 알았지만.
알았어도 불안했다.
수연이 하는 모욕스러운 말을 들었다거나, 딱 붙어 선 두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거나.
어느 경우든 최악이었다.
차라리 들어와서 묻지, 왜 그러고 있냐고.
괜히 마음 여린 정서가 혼자 오해하고 상처받았을까 마음이 다급했다.
법무팀이 있는 층에 들어서서 빠르게 걸음을 옮기자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급히 고개 숙이며 인사하는 이들을 스쳐 지나가 문을 열자 빈 정서의 자리가 보였다.
“윤 변호사 어딨습니까.”
“예? 변호사님 이제 여기 안 계세요. 아마 일 층 카페에 계실 텐데. 거기서 주로 업무 보시는 것 같더라고요.”
자리 뺀 줄도 모르고 있다니.
남의 자리 뺄 때가 아니었다.
견이 다시 비상계단으로 걸음을 옮기다 멈춰 섰다.
그러고 보니 내내 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의 신호음이 멈췄다.
“……여보세요?”
― 나 지금 옥상인데.
“거길 왜 갔어.”
― 어? 건물에만 있기 답답해서. 대표실로 내려갈게. 금방 가.
“됐어. 내가 가.”
견은 전화를 끊고 단숨에 계단을 올랐다.
옥상 문을 열자 난간에 기대서 바깥을 보고 있는 정서의 모습이 눈에 들었다.
빠르게 걸음을 옮겨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자 은은한 꽃향기가 풍겼다.
“빨리도 왔네. 숨 안 차?”
“왜 그냥 갔어.”
“응?”
“내가 설명할게, 그러니까…….”
“왜 몰랐지?”
“응?”
견은 갑작스러운 정서의 물음에 말을 멈추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놀람이나 당혹스러움이 없이 순수한 호기심이 떠오른 투명한 눈동자가 그를 담았다.
“나만 모른 거지? 또 바보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