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왜 그래.”
“…….”
“말을 해. 왜 그래.”
“…….”
“저 죄송한데 혹시 여기 찬물 좀 있을까요? 눈빛이 좀 이상한데. 날이 추운데 더위 먹은 것 같진 않고.”
정서는 대답이 없는 견 대신 옆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신부 분이 너무 예쁘셔서 그런가 봐요.”
“네?”
“아주 드물게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이렇게 뚫어져라 보시는 분들도 있거든요. 이 드레스는 넥크라인이 살짝 내려온 게 고급스러우면서도 관능적이에요. 조금 수수해 보일 수도 있지만 오히려 이런 드레스일수록 소화하기가 어렵고요. 피부가 희고 깨끗하셔서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아……. 아닙니다. 감사해요.”
정서는 제게 쏟아지는 칭찬에 부끄러워져 얼굴을 붉혔다.
웨딩샵 스태프가 연신 감탄하며 제 매무새를 정리하는 동안 견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반쯤 넋이 나간 듯한 모습이었는데. 정서가 처음 보는 모습이기도 했다.
“하견. 정신 차려, 어?”
“이걸로 할게요.”
“네?”
“아까 입었던 거랑 그 전에 입었던 거 모두 구입하겠습니다.”
“미쳤어?”
기나긴 침묵 끝 입을 열어 한다는 말이 그랬다.
그냥 기성복 쇼핑하는 것도 아니고 웨딩드레스인데, 세 벌이나 사겠다니.
사치도 이런 사치가 없었다.
“아니에요. 이 드레스로 할게요. 식장에서 갈아입으면 되나요?”
“예. 저희가 보통 옮겨 드립니다, 직접. 결혼하시는 예식장에 공간이 다 구비돼 있으셔서 저희 스태프들이 가서 전부 세팅해 드릴 거예요. 그냥 몸만 가볍게 오시면 돼요.”
“아뇨. 삽니다. 앞 두 드레스 전부.”
“왜 저래. 잠시만요.”
“네.”
스태프들이 옅게 웃으며 피팅룸을 빠져나갔다.
견이 조심스럽게 정서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쥐었다가 놓았다.
“완벽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아. 나도 다 찾아봤어. 원래 결혼식 준비하면서 웨딩드레스 피팅하면 이렇게 해 줘야 한다며. 너도 열과 성을 다해서 예비 신랑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거 전부 알겠는데. 난 이게 너무 어색하고 불필요한 소비는 하지 않는 게…….”
“무슨 소리야?”
민망함을 참고 참은 탓에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말들을 가만히 듣고 있던 견이 정서의 말을 하나도 이해 못하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정서는 견의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 듯 뒤로 물렀다.
“응?”
“난 그냥 드레스가 모두 너에게 잘 어울려서 사라고 한 거야.”
“살면서 드레스를 입을 일이 뭐가 있어.”
“이건 우리 둘의 결혼식이 아니잖아.”
“그럼 누구 결혼식인데.”
“진짜 우리를 위한 게 아니니까, 다음에 다시 해. 둘이서만 해, 그땐.”
“꼭 그런 거 안 해도…….”
정서는 내심 속이 상했다.
외출 준비 중이던 정서를 두고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며 나갔다 오더니 턱시도부터 입어 보자는 말도 싸그리 무시하고 냅다 웨딩드레스를 입혔다.
심지어 정서보다 더 열심히 고르기까지 했다.
제 옷도 이렇게는 열심히 안 고르는 견이.
오늘은 정서가 견에게 해 주는 날이었다.
견이 멋지게 턱시도를 입고 나오면 사진을 찍고 환호하고 멋지다 말하는 것이 그녀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런 계획이 무색하게 견의 반응이 너무 좋았다.
물론 기뻤지만, 기쁘고 고마웠지만.
하루 정도는 그녀가 견을 더 좋아한다는 느낌을 확연히 느낄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고등학교 때, 아주 가끔 네가 사복 입은 걸 봤어. 무늬도 없는 옷을 입는 애가 있구나. 그런 걸 처음 알았어. 우리 엄마는 요란한 옷들을 좋아했거든.”
“…….”
정서는 옷이 많지 않았다.
흰색 무지 티셔츠, 회색 후드 집업, 청바지와 면바지 서너 개.
번갈아 가면서 입었고 빨다가 닳은 부분이 발견되면 그제야 하나를 더 샀다.
최대한 무난한 것을 입었다.
눈에 띄고 싶지 않았고 큰 값을 치르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그게 부끄러운 일도 아닌데, 견이 그걸 다 눈치챘다니.
이상하게도 그건 부끄러웠다.
“좋아 보였어. 당당해 보였거든.”
“갑자기 왜 옛날이야기를 꺼내고 그래.”
“방금 드레스를 입은 널 보는데 알았어. 그 흰 무지 티셔츠 입은 네 모습을 볼 때부터 어쩌면 이 모습을 그려 봤던 걸지도 모르겠어.”
“…….”
“징그럽지?”
견이 픽 웃었다.
그러곤 정서의 모습을 다시 한번 눈에 담았다.
가두듯 담아 눈을 꼭 감는 그 모습은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서.
정서는 하는 수 없이 견의 어깨를 조금 밀어낼 뿐이었다.
“결혼식에서 제대로 봐. 화장도 하고 머리도 한 모습으로.”
“지금처럼 예쁘진 않을걸.”
“뭐?”
“아, 방금 말은 실수.”
짓궂게 장난치며 긴장을 풀어 주는 것까지, 정작 완벽한 것은 견이었다.
모델 같다며 연신 칭찬하는 스태프들 사이에서 정서는 견의 턱시도를 좀체 골라 주지 못했지만 그마저도 예상한 듯 스스로 무난한 디자인을 고르고서,
“그날 주인공은 따로 있거든요.”
이런 말까지 덧붙이면.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
“벌써 일주일도 채 안 남았네요.”
박 실장은 달력을 들여다보다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수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차은호.
그 남자를 찾아야 했는데.
누가 귀띔이라도 해 준 것처럼 자취를 감췄다.
휴학한 학교에 나타나지도 않고, 간혹 아르바이트했다던 식당 근처에도 나타나질 않았다.
주민등록증상 거주지는 살지 않는 것인지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고.
빌어먹을 전지훈은 도움이 하등 되지 않았다.
초조했다.
예정된 결혼이었고 하 회장은 결혼한 다음에도 기회가 있을 거라 그녀에게 말했지만.
그래도 막을 수 있는 결혼이라면 막고 싶었다.
견에게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윤정서라는 흠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수연 씨?”
“네,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기에 불러도 못 들어요.”
“아, 죄송합니다. 뭐 시키실 일 있으세요?”
“아니. 대표님께서 찾으셔서.”
“저를요?”
그날, 하 회장의 집에 둘이 같이 갔던 날.
그 이후로 견은 수연을 아예 없는 사람처럼 대했다.
수행 비서로 꾸역꾸역 옆에 붙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어쩌다 살갑게 말을 붙여 봐도 대꾸가 없었다.
주위 사람들이 먼저 냉기를 느끼고 혹시 무슨 일 있었느냐 물어올 정도였다.
그랬던 견이 먼저 저를 불렀다니.
심경의 변화라도 있는 걸까?
“……다녀오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대표실로 들어가는 그 짧은 순간이 꼭 억겁 같았다.
노크를 한 뒤 답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짧게 심호흡을 마친 수연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책상에 기대선 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환해지는 그 얼굴.
처음으로 그녀에게 지어 보이는 웃음.
수연은 믿기지 않았다.
어째서 저를 그런 얼굴로 보는지, 이런 얼굴을 갖고 있었음에도 왜 그토록 냉담하게만 굴었는지.
“내가 어제 연락을 하나 받았어요. 나는 기억도 안 나는데 대학을 같이 나왔다더라고? 뭐, 내가 공부에 뜻이 있어서 간 게 아니란 건 알 테고. 그냥 백영에서 자리 하나 잡으려면 학위 필요하니까 다녔지. 경영학과 동창이라는데 지금은 상무라더라고. 그리고 묻더라.”
“…….”
“수연이는 잘 지내지?”
수연은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분명 기억 못 할 거라 생각했는데. 당연히 수연이 그 수연일 거라 생각 못 할 거라 믿었는데.
언젠가, 나중에. 더욱 친밀한 사이가 되면.
정말로 견의 마음을 얻게 되면 그때 먼저 말하려고 했었다.
‘쟤도 참 뻔뻔하다. 자퇴 안 하나?’
수연은 그때 사귀던 남자가 있었다.
일류 기업 임원의 아들이었고, 또래 답지 않게 정숙했으며 매너가 좋았다.
시험 기간 때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수연을 위해 족보도 구해 주고 일부러 인적이 드문 카페까지 데려가 함께 공부를 했다.
영원할 줄 알았다.
아이가 생긴 것을 알았을 때 그래서 쉽게 말했을 것이다.
순진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지. 그와 결혼해 행복하게 사는 상상을 했다니.
이제 보지 않았으면 한다는 함께 전달된 돈.
수연은 그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모멸감을 느꼈다.
그녀에게도 돈은 충분히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꾸역꾸역 돈을 쥐여 줬다는 건 두 번 다시 연락하지 말라는 경고였고, 설상가상으로 유산한 수연을 병원에서 목격한 사람이 있는지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지고 싶지 않아서 휴학하지 않았는데.
그녀를 두고 험담하는 것이 그리 재밌는지, 어딜 가나 그림자처럼 뒷말이 들러붙었다.
‘여자애 하나 가지고 잘들 논다. 싸질러 놓은 새끼에 대해선 한마디를 안 하면서.’
무심히 들려온 그 말.
그 말이 왜 그렇게 위로가 됐는지.
누군지도 몰랐던 그 학생의 이름이 ‘하견’이며 백영 그룹 회자의 아들이라는 건 뒤늦게 알게 됐다.
언젠가 고백해야지, 벼르던 것을 이루지 못했던 건,
견이 돌연 유학을 간다며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년 뒤. 겨우 마주했다.
역시 견은 수연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수연이 전부 기억하니까.
“그 말을 들으니 어렴풋이 기억이 나더라고. 이력서 받아서 읽어도 기억 안 나던 게 그제야 나더라고.”
“…….”
“무려 같은 과 후배인데 내가 너무 무심했던 것 같아서. 만회를 좀 할까 하는데.”
견이 천천히 수연에게 다가왔다.
손을 들어 다정히 수연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던 그의 손목을 수연이 조심스레 쥐었다.
그리고 눈을 맞췄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