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4화 (74/85)

74.

“그 새끼? 누구.”

정서 대신 견이 묻자, 지훈이 짜증 난다는 듯 제 머리를 헝클이더니 견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너는 닥쳐. 너 보러 온 거 아니니까.”

“그래. 상태 보니까 나 말고 의사를 봐야겠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닥치라고, XX! 윤정서. 처음부터 너 기분 나쁘다고 생각했어. 개천에서 난 용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남자 하나 물어서 어떻게든 상류 사회에 비벼 보려고 하는 거 모를 줄 알아? 그 천박한 피가 어디 가나. 너 같은 X들은 죽었다 깨나도 몰라. 이렇게 고생하면서 사명 의식 갖고 일하는 사람 마음을. 자수성가를 억지로라도 이뤄야 하는…….”

“예. 개소리 잘 들었고요. 가던 길 가시죠, 이제.”

정서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성과에 대해 과대평가하고 오랫동안 품은 열등감을 엄한 곳에 표출하는.

“안타깝게 생각해요.”

나긋한 그녀의 말에 견이 정서를 돌아보았다.

지훈 역시 무슨 말이냐는 듯 그녀를 보자, 정서가 말을 이었다.

“성공하려고 그런 진창에 빠지셨는데, 결국 실패하고 다리만 젖었죠.”

“……뭐?”

“어떻게 해요. 이제 거기서 나올 구멍은 어디에도 없는데.”

“이, 이…… 미친, 미친 X이.”

지훈은 금방이라도 정서에게 달려들 듯이 다리를 굴렀다.

안 그래도 패 주고 싶은 이유가 차고 넘쳤는데 굳이 먼저 달려든다면 말릴 생각은 없지.

견은 그렇게 생각하며 지훈에게 다가섰다.

“뭐라고?”

“뭐야, 너는. 좀 비켜. 그 쪽한테 용건 있어서 온 거 아니니까. 저 여자가 내 자료를 훔쳐 갔다고.”

“자료? 무슨 자료. 여기 네 자료는 어디에도 없는데.”

“뭐? 웃기지 마. 똑똑히 들었어. 너희가 백영 재단에 관한 정보 빼돌렸다는 거.”

“그래? 누가 그런 말을 하는데.”

“……뭐?”

“누가 그런 말을 했냐고.”

하 회장? 아니면 수연?

두 사람 중 하나일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만약 전달한 것이 하 회장이라면 순순히 지훈을 보내 줬을 리 없다.

대가를 치르게 하겠지.

“말을 못 하는 걸 보니까 알겠다. 여길 왜 찾아왔어?”

“뭐? 그야 당연히 네놈들이 가져간 내 것을 돌려받으려고 왔지.”

“줄 거라고 생각해서 왔어? 그냥 맨몸으로 쳐들어와서 뭐라도 가져갈 수 있을 거라 믿는 거야, 순진하게? 당신 기자잖아. 남을 매도하는 기사 써서 먹고사는.”

“…….”

지훈은 아랫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 말하려는 듯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당장이라도 견에게 달려들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훈을 보던 정서가 견의 옆에 섰다.

그리고 지훈을 마주했다.

“다시 원래 얘기로 돌아가. 난 그쪽이랑 오래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없거든. 그러니까 그냥 얘기해. 그 새끼가 누구야?”

“그 새끼. 저번에 네가 전화 바꾸게 한 그 새끼. 나 병원에 입원했을 때 멋대로 쳐들어와서 너한테 전화하라던 그 새끼!”

“걔 얘기가 왜 여기서 나와?”

“그야 네가 걔를 시켜서 내 정보를 빼돌렸으니까!”

“증거 있어?”

“뭐?”

“기자가 팩트로만 말해야지. 증거도 없이 대뜸 찾아와서 이러면 곤란하지.”

“…….”

“하긴 증거가 있어도 곤란하긴 하겠네. 어디에 신고를 할 수도 없고, 설령 그걸 다시 되찾는다 해도 회장님 눈 밖에 났으니까. 타요, 대표님.”

차의 잠금을 해제한 정서가 견에게 눈짓했다.

견은 잠시 지훈을 바라보다가 아쉬움을 뒤로한 채 차에 올랐다.

정서 역시 운전석에 타 시동을 걸고 저를 죽일 듯 노려보는 지훈에게 비키라는 듯 경적을 울렸다.

주차장 인근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지훈을 향했다.

그제야 지훈은 손에 들고 있던 모자를 깊이 눌러 쓴 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아쉬워하지 마.”

“응?”

“아까부터 주먹 쥐고 있었잖아.”

“어떻게 알았어?”

“내가 너에 대해서 모르는 게 있을 것 같아?”

정서는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머릿속이 복잡했으나 견에게는 걱정 없는 얼굴을 보여 주고 싶었다.

견 역시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서인지 그저 따라 웃어 주었다.

하 회장이 자료의 원본을 회수하고 싶었다면 지훈을 시키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훈에게 비밀을 지키는 대가로 지불했던 몫은 도로 챙겼겠지.

계산은 철두철미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럼 정서를 찾아온 것은 지훈의 독단적인 판단이었을까?

정서에게 그 정보를 넘겨주면서 은호는 자신이 나중에 쓰려던 패 중 하나를 주는 것이라 했다.

기죽지 말고 잘 싸우라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이겨야 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은호가 어떤 방법을 써서 지훈에게서 백영 재단의 비밀이 담긴 USB를 빼돌렸는지는 알지 못했다.

지훈에게 남은 자료가 더 있는지, 이게 은호가 쓰려던 패 중 하나라면 다른 패는 어떤 것이 있는지.

궁금한 거 투성이었지만 차마 물어볼 면목까지는 없었다.

“……위험해질까.”

정서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어쨌든 지훈이 찾아 헤매는 것은 은호였다.

은호가 약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궁지에 몰린 사람은 때때로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인 행동을 저질렀다.

지훈 역시 무슨 행동을 우발적으로 저지를지 몰랐다.

“걱정돼?”

“응?”

“걱정되냐고, 그 자식.”

견의 물음에 정서는 그제야 제가 무심코 생각을 중얼거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작게 스스로를 책망하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는 사이, 견이 작게 한숨을 쉬더니 핸드폰을 들었다.

“걱정 마. 걔 그 정도로 물렁하지 않아. 그랬다면 복수고 뭐고 그냥 주저앉았겠지. 하종훈 대표가 걔 배신했을 때 관뒀어야지.”

“역시 배신당한 게 맞아?”

견 역시 정서처럼 곧장 후회했다.

그 자식을 연민할 계기를 주고 싶지 않았는데. 걱정하는 게 마음이 쓰여 괜한 말을 해 버렸다.

“몰라. 걔한테 관심 꺼.”

“관심 가진 적 없어. 그냥 나 때문에 전지훈한테 무슨 일 당할까 봐 걱정돼서 그러지.”

“그것도 관심이야. 게다가 왜 그게 윤정서 때문이야? 자기가 훔쳤잖아.”

“하견. 마음을 좀 넓게 써. 네가 걔 미워할 이유 없잖아.”

정서가 타이르듯 말했다.

견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입술만 툭 내밀었다.

&

“……뭐야. 왜 그쪽이 나오지?”

“그럼 뭘 기대했는데.”

“그야……. 됐다. 나 커피 마셔도 되죠?”

은호는 견이 대답하기 전에 걸음을 옮겨 커피를 주문했다.

견의 몫까지 두 개를 시키고서 창가 자리에 턱하니 자리를 잡는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맞은편에 앉은 견이 은호의 앞에 무언가를 내려두었다.

“이게 뭐지?”

“다음 학기 등록금.”

“그걸 왜 네가 주는데.”

“이제 네 통장에 하종훈이 돈 꽂아 줄 일은 없으니까?”

“어차피 학교 다시 돌아갈 생각도 없었는데, 자퇴를 하라 고사를 지내 주네.”

“자존심이 밥 먹여 줘? 노력해서 좋은 학교 갔으면 끝까지 다니고 졸업해.”

두 사람 앞에 커피 두 잔이 놓였다.

은호는 손을 뻗어 견이 내려둔 봉투를 집어 들었다.

안을 확인하자 오만 원짜리 지폐 다발이 보였다.

“좀 더 넣어 주지, 기왕 줄 거면.”

“더 넣었어.”

“이거 먹고 떨어져라?”

“응. 윤정서한테 준 정보 값으로 후하게 쳐준 거야.”

“누구 기준으로? 다른 여자랑 아버지께 인사 올리러 갔으면 나 이렇게 마주 볼 면목은 없어야지 않나? 그날 윤정서가 어떤 기분으로 거기 갔을지 너는 죽어도 모를 텐데.”

“모르지. 근데 너라고 그 기분, 감정 알 수는 없잖아.”

“…….”

견과 은호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은호는 정서를 걱정하고 있었고 그 사실이 견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가벼운 마음이 아니라는 뜻이었으니까.

잠깐 불붙었다 사라질 흥미 정도라면 신경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전지훈이 널 찾고 있어.”

“하 회장이 직접 연락했대? 늙은 호랑이는 이빨이 빠진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아무리 궁해도 고작 그딴 놈한테 회수하라고…….”

“아니. 이수연.”

“뭐?”

“이수연이 말했을 거야. 저번 사건부터 이수연이 계속 얽혀 있으니까. 하 회장은 고작 이런 일로 연락하지 않아. 설령 연락했다고 해도 전지훈이 가진 것을 빼앗는 선에서 그쳤겠지. 걘 영문도 모르고 다 빼앗겼을 테고. 그래서 내가 너한테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해.”

견이 손을 뻗어 커피잔을 쥐었다.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것을 뜨겁지도 않은지 몇 모금 삼키고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묻기 전에 뜸을 들이는 모양새가 퍽 보기 싫다 생각하며 은호는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빛을 느꼈다.

견의 얼굴에 상처가 났는데 정서는 괜찮을지.

지훈이 정서를 괴롭히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됐다.

“그것도 이수연 짓이야?”

“…….”

“사진 말고. 순진한 윤정서는 거기까지가 이수연 짓이라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내 생각은 다르거든.”

“왜 묻는 건데? 무슨 답이 듣고 싶어서. 너 때문에 윤정서가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그런 대답이 돌아오면 어쩌려고 그러는데.”

“됐어.”

“뭐?”

견이 몸을 일으켰다.

자신의 용건은 끝났다는 듯 가려는 그를 따라 은호가 일어났다.

“뭐 하는 거야?”

“그거면 답이 됐어, 충분히.”

견의 말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은호는 견이 왜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구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려는 건데. 이수연은 그냥 과정일 뿐이야. 그 끝에 있는 건.”

“알아, 누군지. 누구겠어, 뻔하지.”

정서에게 겁을 주려고 한 것인지. 다치면 오히려 고맙다고 생각했을지.

하 회장을 기쁘게 하려 수연이 움직였음은 자명했다.

그래서 은호는 견이 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하 회장의 몰락이 저와 무관할 거라는 오만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그 복수의 끝에는 견의 몰락 역시 예견돼 있었다.

“값은 내가 치렀으니 윤정서 건들지 마.”

“받겠다는 말 안 했는데.”

“나 괜찮아 보여?”

“뭐?”

“턱시도 입으려는데 어울리려나 모르겠네.”

견은 그 말을 끝으로 카페를 빠져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