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85)

73.

“대가가 뭔데.”

견이 물을 때였다.

수연이 하 회장의 자택을 빠져나오다 골목에 주차된 견의 차를 발견했다.

같이 가는 것은 자존심이 상했으나, 둘이 함께 있는 것도 보기 싫었는지 차에 다가와 굳이 운전석 창문을 두드렸다.

“잠깐만.”

견이 내려 수연을 돌려보내려 했으나, 정서가 빨랐다.

정서 역시 수연에게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내가 얘기할게.”

정서는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수연은 견 대신 내리는 그녀를 보고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 징글징글하게도 떨어질 줄을 모른다.

제 위치를 알고 주제를 알면 이럴 수는 없을 텐데.

쫄지 않고 하 회장을 대하는 것을 보니 윤정서도 보통 여자는 아닌 모양이다. 그거 하나는 인정할 수 있었다.

“대표님께서는 저와 오셨고 아직 업무 수행 중이니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회사로 복귀하신다면 타시죠.”

수연은 자연스레 뒷자리를 권했다.

자리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려는 태도는 여전했다.

“회사로 복귀하시지 않습니다. 병원에 가실 거예요.”

“그럼 더더욱 제가 모셔야죠. 처치 받으시는 동안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

“이 비서님.”

“예, 윤 변호사님.”

“왜 이 비서님이 아직 그 자리에 계신 것 같으세요?”

정서의 물음에 수연은 잠시 침묵했다.

질문에 담긴 의도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오늘 하 회장이 부른 것은 그녀가 아니다, 수연이다.

그 사실을 상기시켜 정서의 기를 눌러 주고 싶었다.

“대표님과 하 회장님께서 필요로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죠.”

“이제 숨길 생각도 없으시네요.”

“무엇을요?”

“대표님을 우선으로 생각하지 않으신다면 그 자리에 계시는 건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정서의 단호한 말에 수연은 새어 나오는 헛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지금 누가 누구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아무런 자격 없이 지난 시간 견의 옆에 있던 정서가 할 말로는 대단히 부적절하지 않은가.

“제 판단의 지표는 늘 대표님이십니다. 그건 윤 변호사님이 상관하실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아무리 결혼을 약속하셨다고 해도 이건 엄연히 공적인 영역입니다. 왈가왈부하실 일이 아닙니다. 지금 선 넘으셨어요.”

정서는 수연을 가만히 응시했다.

한동안 그녀가 아무 말이 없이 고요한 눈빛으로 수연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자, 수연은 내심 당황했으나 태연히 행동하려 했다.

맞받아칠 말이 없나 보지, 맞는 말을 했으니까.

“……예, 맞습니다.”

“?”

“제가 선을 넘었어요, 이 비서님 말대로.”

뭐지, 이건.

이렇게 쉽게 받아들이는 건 좀 이상한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정서가 걸음을 옮겨 수연에게 붙어 섰다.

가까워진 거리에 어딘가 은은하고 촌스러운 냄새가 풍긴다 생각한 때였다.

“근데 먼저 넘으셨잖아요.”

“되받아칠 말이 없으니 별 트집을…….”

“그것도 되게 세고 교양 없게 넘으셨던데. 사람 목숨이 우스우세요?”

목숨? 예상치 못한 단어에 수연이 잠시 침묵했다.

태연한 표정은 미동이 없었으나, 잠깐 떠오른 동요까지 숨기기는 녹록지 않았다.

“어째서 여기서 목숨을 운운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제게 불만이 있으시면 음해할 생각하지 말고 제가 대표님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증거를 가져오세요. 혹시 윤 변호사님을 따라다니는 그 어린 남자가 무슨 말이라도 한 거라면…….”

은호의 얘기를 꺼내는 것을 보니 의심이 확신이 되었다.

은호는 그저 수연을 조심하라 얘기했을 뿐이었으나, 사진을 찍은 이들의 정체가 기자가 아닌 흥신소 직원들이었다는 소식을 듣고 정서는 확신했다.

수연이었다.

수연이 그 일을 꾸몄다.

스캔들을 지어내 하 회장에게 환심을 사려 했겠지.

은호와 정서가 무슨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포장해 구설수를 만드는 일이 수연에겐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정서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수연이 견을 좋아하는 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저지르는 나쁜 일들의 끝이 어딜지는 뻔했다.

“뭐야, 그 기분 나쁜 웃음.”

“건드리지 말고 물러서요.”

“건드려요? 누가 누굴.”

“선을 자꾸 건드리잖아요. 지금까지는 선 지키고 있었는데 자꾸 그러면 안 참죠, 나도.”

수연이 황당하다는 듯 정서를 가만히 볼 때, 정서는 몸을 숙여 수연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직하고 다정한 음성이 따뜻하게 내려앉았다.

“곱게 자랐으면 곱게 살아. 괜히 미친 X 건드렸다가 물리지 말고.”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건가.

멍하니 보는 수연에 정서가 씩 웃어 보였다.

그리고 걸음을 옮겨 다시 차로 향했다.

멀어지는 정서의 뒤통수에 대고 무어라 외치고 싶어 입술만 달싹이던 수연이 시동이 걸리는 것을 확인하고 황급히 차로 다가갔을 땐 이미 늦었다.

차가 옆을 쌩하니 지나가 수연은 황급히 피해야 했다.

그 탓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알 수 없는 수치심을 곱씹는 것도 온전히 그녀의 몫이었다.

&

“왜 말을 안 해 줘?”

“어때요? 괜찮나요?”

“예. 다행히 남은 파편은 없고요. 아마 잘 관리하시면 흉터도 남지 않을 겁니다. 입가에 난 흉터는 제법 오래돼 보이는데 지우지 않으셨네요. 저희 병원에서 시술받으시면 말끔히는 아니더라도 거의 보이지 않게 지울 수 있을 겁니다.”

“괜찮습니다. 영업력은 좋으시네요.”

의사는 못내 아쉬운 듯 견에게서 떨어졌다.

정서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뺨에 반창고를 붙인 견을 데리고 수납을 완료했다.

견은 정서에게 바짝 붙어서는 연거푸 물었다.

“차은호한테 대가로 뭐해 줬냐니까.”

“그게 왜 그렇게 궁금한데.”

“그야 불안하니까 그렇지.”

“질투나? 별거 아니야. 궁금한 게 있다고 해서 알려 줬을 뿐이야.”

“뭘 그렇게 궁금해했냐니까, 그 자식이.”

연고까지 야무지게 챙긴 뒤, 차로 향하던 정서는 제 손을 움켜쥐며 흔드는 견의 행동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멈춰 서서 그와 눈을 맞췄다.

“우리 어떻게 만났냐고.”

“뭐? 그게 다야? 다른 게 아니라 첫 만남을 물어봤다고?”

“응. 왜 청첩장 받으면 으레 하는 질문들 있잖아. 어디서 만났냐, 어떻게 좋아하게 됐냐. 그런 낯간지러운 질문 같은 거.”

생각보다도 황당한 녀석이다.

견은 안도하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어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

“뭐라고 하긴. 그냥 들려줬지. 처음 만났던 얘기.”

“새 얘기?”

“…….”

“네가 죽은 새를 가방에 넣어 둬서 내가 그 가방에 그 녀석 머리를 처박아 줬다는 얘기?”

“아니. 네가 전학 왔고 키가 커서 눈에 띄었다는 얘기.”

“고작 그거? 잘생겨서도 아니고 키가 커서?”

견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정서는 피식 웃음이 새려는 것을 가까스로 막고 태연하게 눈썹을 까딱이며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이런 아이 같은 면이 있어 귀엽다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무슨 소리야. 누가 죽은 새를 가방에 넣어둬.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네가 그랬잖아. 너 되게 이상한 애였잖아.”

“내가? 나 되게 모범생이었는데.”

“모범생은 무슨. 나랑 똑같이 별종이었으면서. 얼른 인정해, 윤정서. 얼른.”

“왜 이러세요, 대표님. 저는 대표님과 달리 아주 착실한 학생이었습니다.”

아까에 비해 견의 기분이 풀린 것 같아 다행이었다.

하 회장이 그와 수연을 불러 무슨 얘기를 했을지 궁금했으나, 물을 수 없어 아쉬웠다.

먼저 말하기 전까지 그 얘기는 꺼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정서는 주차된 차로 향했다.

“내일 점심시간에 잠깐 시간 돼?”

“점심시간?”

“응. 우리 갈 곳 있는데.”

“어디? 먹고 싶은 거 있어? 윤정서가 웬일로.”

“밥은 간단히 먹고, 그전에 옷 입어 보자.”

“옷……? 설마 드레스?”

“보고 싶다며. 같이 고르고, 서로 봐주자. 그래도 기왕 하는 결혼인데 모양새가 그럴싸하면 좋잖아. 사는 동안 그런 옷 입을 일이 몇 번이나 있다고.”

“원하면 몇 번이고 입혀 주지.”

“그거 무슨 말이야? 재혼하라는 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느릿하게 깜빡이는 정서의 모습에 견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뺨에 입을 맞췄다.

정서는 곁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 놀라 그를 냉큼 떼어냈다.

“뭐 해. 사람들이 봐.”

“결혼식에선 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볼 거야. 식순에 키스도 있지?”

“미쳤나 봐.”

“새삼스럽다.”

“……그러게.”

어깨동무를 한 채 제법 다정하게 차로 향하는 정서와 견 앞에 누군가 섰다.

처음엔 그저 차를 구경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상대가 눈에 익자, 견이 정서의 앞을 막았다.

“전지훈?”

정서의 물음에 지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소영의 자작극으로 사건이 마무리되고 기사가 난 다음에 지훈은 신문사에서 잘렸다.

그러고도 멀쩡하고 뻔뻔하게 ‘신경쇠약 여 배우의 몰락’이라는 제목으로 유튜브 영상을 올렸던 그였다.

먹고 살려면 뭐든 하는 지독한 사람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또 정서에게 지훈이 했던 짓을 생각하면 자료 훔친 것쯤은 하나도 미안하지 않았다.

다만 지훈이 자료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눈치챘다는 게 의외였다.

훔쳐 간 사람을 정서로 확신하는 것 역시.

“윤정서.”

“그거 내 찬데. 좀 비키지?”

견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정서를 뚫어져라 보던 지훈이 입을 열었다.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가 볼썽사나웠다.

“그 새끼 어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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