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2화 (72/85)

72.

“……거기까지만 하세요.”

견은 미동이 없는 표정을 지은 채, 고저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 밑바탕에 짙게 깔린 분노는 그 공간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각오를 했음에도 불편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견에 대한 도발을 하겠답시고 수연의 기분 따위 고려하지 않고 말을 뱉는 성미를 가진 하 회장이 원망스럽다가도, 기회를 주는 것 같아 안심이 됐다.

‘옆에 있게만 해 주세요. 지금 당장 본부장님이 그 여자와 결혼한다고 해도 저는 참을 수 있어요. 어차피 다 과정이니까요. 결과가 말해 주리라 생각합니다.’

수연이 고개를 숙이며 이렇게 말했을 때 하 회장은 어떻게 반응했던가.

회사 법인 통장 계좌, 촬영에 쓰는 소품을 모아두는 창고의 열쇠, 백영 엔터테인먼트 지분.

열심히 준비해 둔 보람이 있었다.

지금 하 회장의 앞에 나란히 서 있는 것은 수연이지 정서가 아니었다.

“불쾌함을 아는구나. 그동안 네가 하도 무례하게 굴어 그런 감정은 모르는 줄 알았다.”

“아버지께서 수치심을 모르시는 거죠. 아버지 없는 아들을 앞에 두고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스스로를 부정하실 줄 아는 겸손, 그 겸양 하나는 본받겠습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가보죠.”

견은 몸을 틀었다.

고작 이딴 도발이나 들으려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어디 건방지게 내 말이 끝나기 전에 몸을 돌려.”

“말하신 거예요? 저는 짖으시는 줄 알고.”

이에 인내심이 바닥난 하 회장이 옆에 있던 물잔을 집어 던졌다.

견은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가까스로 옆으로 비켜난 물잔은 벽을 맞고 파편이 온갖 곳에 튀었다.

“꺅!”

짧게 수연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얼굴이 파편에 닿아 길게 상처가 났다.

입가에 난 흉터의 옆으로 새빨갛고 생생한 피가 흘러내렸다.

띵동.

그때였다.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황급히 뛰어온 비서가 입을 열었다.

“……저, 회장님.”

“누구냐.”

“윤정서 씨가 찾아왔습니다.”

정서의 이름을 들은 견의 눈빛이 흔들렸다.

두 사람이 여기 왔다는 사실을 안 정서가 무슨 생각을 할지 걱정이 됐다.

모멸감이나 불쾌함은 온전히 제 것이었는데, 그걸 정서에게까지 주고 싶지는 않았는데.

“돌아가라고 해.”

하 회장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더니 발소리가 들렸다.

구두를 신은 듯 또각또각 울리는 발소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지고 곧 정서가 모습을 나타냈다.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들어온 그녀는 얼굴에서 피가 흐르는 견을 보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다 하 회장을 보았다.

“회장님, 저 왔습니다.”

“들어오라 허락하지 않았는데.”

“죄송합니다. 급해서요.”

“오지 마, 아래 깨진 유리 조각 있어.”

신을 신었어도 다칠 수 있으니까.

정서는 견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분한 움직임으로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견에게 건넸다.

견은 그 손수건을 받아 든 채 정서에게 붙어 섰다.

수연이랑 함께인 것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 걸 보면 수연이 동행한 것을 정서는 이미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부부가 안하무인인 게 꼭 닮았군. 이래서 없이 태어난 것들은…….”

정서는 빠르게 분위기를 파악했다.

두 사람의 식기가 놓여있었지만 손댄 흔적이 없는 걸로 보아 식사 자리에 초대된 뒤 자리에 앉지도 않았다.

그러기 쉽지 않았을 텐데. 자리에 없는 정서까지 생각하고 내려 준 판단인 것 같아 고마웠다.

“백영 식품 인수 실패하셔서 기분이 많이 안 좋으시죠?”

“…….”

돌연 정서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야기에 하 회장은 입을 다물었다.

아까까지 견과 정서를 질책하던 눈빛은 사라지고, 그것을 너 따위가 어떻게 아느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 회장은 악독하고 비열했으나, 머리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특히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뭐든 하는 사람이었으니 백영에 관한 일이라면 크든, 작든 틀림없이 민감하게 받아들일 터였다.

“하종훈 대표님한테 당하셨더라고요, 제대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아세요? 사건의 전말 뒤에 누가 있는지.”

“…….”

핏줄이 터져 붉게 달아오른 눈자위에 의문이 담긴다.

예상대로 종훈은 은호의 존재까지는 하 회장에게 알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동안 은호를 이용해 하 회장의 약점을 야금야금 모은 것을 들켰다면 아마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쫓겨났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종훈은 대표직에서 사임하게 되었지만, 해외로 나갈 자금 정도는 확보했다.

그게 하 회장의 마지막 자비였다.

“예전에 저에게 부탁 하나 하셨었죠.”

“부탁? 내가 너 따위에게?”

“전지훈 기자를 찾아달라고 하셨을 때. 왜 사회부 기자 하나를 찾지 못하셔서 안달이셨는지 궁금했어요.”

“결국 내가 먼저 찾았지. 너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네 무능과 무쓸모를 증명한 셈이었다.”

“맞아요. 제가 늦었어요. 무능했죠.”

정서는 손에 들고 있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견의 몫으로 앞접시에 그것을 올려두었다.

은색의 조그마한 USB에 붙은 견출지에 ‘백영’이라 적힌 것이 보였다.

“기자는 찾으셨지만, 파일까지는 폐기시키지 못하셨나 봐요.”

“그럴 리가. 분명히…….”

하 회장의 시선이 비서를 향했다.

비서는 당황한 듯 황급히 USB를 거둬오더니 제가 들고 있던 태블릿에 연결해 작동시켰다.

그리고 곧 사색이 됐다.

비서의 반응을 확인한 하 회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모든 사람과 상황을 제 통제 아래 두고 쓸모에 따라 쓰고 버리는 것이라 자부해 왔던 그가 드물게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백영 재단의 장학생들. 왜 그렇게 유학을 좋아하는지, 한국에선 전시회도 갖기 싫어하는지 궁금했어요. 그 이유가 거기 담겨 있던데요.”

“……원하는 게 뭐냐. 재벌가 며느리 정도면 네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 아니냐.”

하 회장이 사나운 눈빛으로 정서를 노려보았다.

정서는 처음으로 하 회장의 약점다운 약점을 잡았다.

열세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꼿꼿한 하 회장의 태도는 가히 본받을 만 했으나, 감흥은 없었다.

“그게 하 대표님의 옆자리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제가 전지훈 기자에게 악감정이 있습니다. 전지훈 기자가 독점으로 이 기사를 쓰기 전에, 다른 신문사에서 단독으로 보도하면 어떨까. 그런 생각도 잠깐 하게 되네요.”

“윤정서.”

“처음이에요. 회장님께서 저를 이렇게 불러 주신 거. 그리고 제 말을 끊지 않고 다 들어 주신 거.”

정서는 견을 보았다.

견의 상처를 살피던 정서가 다시 고개를 돌려 하 회장을 마주했다.

수연은 마치 그 공간에 있지도 않은 듯, 의식하지도 않고선 또렷이 말했다.

“다음부터는 제 남편을 함부로 대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 파일은 참고로 복사본이에요. 원본은 따로 보관 중이니 차분히 보시고 연락 주세요.”

“이런 고얀…….”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정서가 견의 손을 찾아 쥐었다.

견은 정서의 뒤를 따르며 제가 쥐고 있던 손을 내려 깍지 끼었다.

나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던 하 회장의 표정이 더없이 어두워졌다.

비서는 바짝 고개를 숙여 사죄했고, 수연은 태블릿에 꽂힌 USB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저 누구인지 알 것 같습니다, 회장님.”

“뭘.”

“저 USB를 누구에게 받았는지. 누가 회장님을 노리고 있는지.”

“……네가?”

믿지 못하는 하 회장에게 수연은 고개를 끄덕여 보인 뒤 무릎을 굽혀 앉았다.

주위에 떨어진 유리 조각이 신경 쓰였으나, 크게 개의치 않았다.

대범하게 굴어야만 신임을 얻을 수 있다.

“저 한 번만 믿어 주세요. 제가 책임지고 원본도 폐기시키겠습니다. 또 제가 짐작하는 사람이 맞다는 것도 밝혀내겠습니다.”

“저번에 사고를 일으킨 것도 너지.”

“……사고는 우연이었습니다. 저는 그저 전달드린 사진을 보여드리려 했을 뿐입니다.”

“윤정서에게 남자가 있든 없든, 그깟 애들 소꿉놀이에 나는 관심 없다.”

“알고 있습니다. 주의하겠습니다.”

하지만 섣불리 구는 것은 금물이다.

가지고 있는 패를 다 보이면 금방 버려질 테니까.

&

“병원 가자. 벨트 매.”

정서는 주차된 견의 차 운전석에 올라타며 말했다.

견은 얌전히 조수석에 앉더니 차 문을 닫자마자 그대로 정서를 끌어당겨 안았다.

정서는 당장 가야 한다 말하면서도 그를 뿌리치지는 않았다.

“미안해, 윤정서.”

“뭐가. 내 허락도 없이 다친 거?”

“…….”

“그거 아니면 네가 사과할 건 아무것도 없는데.”

견은 정서의 어깨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생각보다도 단단하다.

그가 좋아해 온 그녀의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볼 때마다 놀라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늙어서 노망났나 봐. 요새 부쩍 헛소리를 한다.”

“믿는 구석이 아직 있으신 모양이니 조심해야지. 그래도 혼수 챙겨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야.”

정서가 흰 고양이 캐릭터가 그려진 USB를 꺼내 보였다.

백영 재단의 비밀이 담긴 장치치고 너무 깜찍한 디자인이었다.

“네 거야? 언제 저런 취향이 생겼지.”

“사실 내 건 아니고……. 도움을 좀 받았어.”

차은호. 또, 차은호.

견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그 모습을 본 정서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전지훈 기자한텐 둘 다 맺힌 게 좀 있어서. 그냥 받은 거 아니야, 대가로 나도 뭔가를 지불 했어.”

“뭐?”

견은 정서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 음험한 자식이 정서에게 대가까지 요구했다니. 

불안함이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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