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85)

71.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하 회장 아들이자 하견의 형. 죽은 그 남자한테 애가 있다고요.”

은호는 이 사실을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아니,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왜 이 타이밍에 은호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느냐다.

“그거 때문에 못 놓는 거죠, 하견을.”

은호가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그리고 내내 잡고 있던 정서의 팔을 그제야 놔 주었다.

정서가 한발 물러나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 회장에 대한 복수를 꿈꾸니 사실은 견과 같은 편이라고. 견 역시 하 회장을 증오하고 있다고.

그런 얘기를 먼저 전해야 했던 걸까?

하지만 그쯤은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하 회장과 견의 사이가 몹시 좋지 않다는 건 백영 그룹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자명한 사실이었다.

“하 회장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은 많아요. 그들 중 일부는 하견이 마치 자신을 도와 줄 수 있는 동아줄이라 믿고 있죠.”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든, 없든. 대표님은 뜻이 있기 때문에 백영에 남은 거야. 너와 같아, 그 사람. 그 사람 역시 너처럼…….”

“윤정서.”

은호가 정서를 불렀다.

정서는 저에게는 거의 처음 보이는 것이나 다름없는 그의 서늘한 얼굴과 낮은 목소리에 말을 그쳤다.

물론 은호로서는 자신이 증오하는 이의 아들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견에 대해 오해하게 둘 순 없었다.

정서가 무어라 설명을 덧붙이려는 때였다.

“같지 않아.”

“응?”

“같을 수 없어. 하견이 가진 게 어디에서 왔는데.”

“…….”

“난 당신의 거의 모든 걸 존중해. 당신이 하 회장을 도왔던 과거도, 하견 곁에 남은 지금도 부정하지 않아. 하견보다 먼저 만나지 못한 게 후회되기는 해도. 그래도 그건 아니야. 그러니까 두 번 다시 함부로 하견과 나를 같다 퉁치지 마요.”

“…….”

부끄러웠다.

남의 아픔에 대해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말자 생각해 놓고.

정서 역시 그렇게 아파 봤으면서도 그저 견과 은호가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은호가 무모하게 나쁜 일을 벌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해서 멋대로 두 사람을 동일시했다.

정서는 고개를 수그렸다.

홧홧한 두 뺨을 느끼며 말을 골랐다.

제대로 사과해야 했다.

은호는 어찌 됐든 고마운 사람이었다. 제 편에 서 준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이번 일로 화가 나 잃게 되더라도, 설령 그렇더라도.

고마운 마음만큼은 확실히 전해야 옳았다.

“미안해, 차은호.”

“…….”

정서는 누가 추라도 매단 듯 무거워진 고개를 천천히 들어 은호를 마주했다.

은호가 저를 보는 시선을 느끼고 견디며 눈을 맞췄다.

“내 생각만 했어. 이기적이었어. 네 마음도 모르면서 섣불리 말했어. 너는 나한테 고마운 사람이야. 내 결혼식에 오겠다고 선뜻 말해 준 유일한 사람. 그런 너한테 상처를 줬어. 정말 미안해.”

정서는 그렇게 말하고선 다시 시선을 떨궜다.

이제 은호가 무슨 말을 하든 겸허히 받아들일 차례였다.

고작 이런 몇 마디의 말로 그가 느꼈을 감정을 다 상쇄시킬 순 없을 테니까. 

화를 내면 들어야 마땅했고, 두 번 다시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해도 수용해야 했다.

“알겠어요.”

“……응?”

“꼭 가야겠어요, 하 회장한테?”

은호는 여상한 얼굴과 말투로 정서에게 물었다.

평소와 비슷한 표정이 되어 그녀를 보는 그의 모습을 본 정서는 잠시 멍했다.

상황을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탓이다.

“그럼 태워 줄 테니까 같이 가요. 아쉽게도 내 차는 아니고, 그래도 내 차나 다름없어요. 차 고칠 때까지 타고 다니라 준 거니까.”

“……그게 끝이야?”

“응?”

“더 화내고 따지고. 안 그래도 돼?”

“사과했잖아요.”

“말뿐인 사과잖아. 내가 저지른 무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진심이었잖아요. 나쁜 뜻으로 한 것도 아니고. 진짜 미안하면 밥 사든지, 비싼 걸로.”

“아…….”

“참고로 결혼식 뷔페는 밥으로 안 칩니다. 가요.”

은호는 가볍게 말하고 정서의 손목을 덥석 움켜쥐었다.

뿌리치지 못하고 따르며 정서는 그가 자신의 생각보다도 더 어른스럽다는 것을 느꼈다.

마음이 이상했다.

이렇게 너그럽게 굴어 주는 사람이라니.

어쩌면 그녀는 지금보다 더 은호와 친밀하고 가까운 사이가 될지도 모르겠다.

&

“제 비서에 관심을 다 가지세요, 쓸데없이.”

하 회장은 그로서는 드물게 견을 식사 자리에 불렀다.

이는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를 집으로 부른 것도 모자라, 식사까지 대접할 생각을 하다니 말이다.

밥을 같이 먹어서 식구라 했던가.

그렇게 치면 견은 하 회장과 결코 식구가 될 수 없었다.

다른 자리에 초대돼 같이 밥을 먹어야 하는 경우가 아니면 절대 견을 식사 자리에 부르지 않았다.

어린 마음엔 식욕을 떨구지 않아도 되니 오히려 고마웠지만.

어차피 견의 입엔 미희가 해 준 음식이 아니고서야 다 비슷비슷하게 느껴졌으니 크게 불쾌할 일도 아니었지만.

“……앉아라.”

“예.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짜 불쾌한 것은 따로 있었다.

하 회장의 맞은편에 세팅된 두 자리 같은 것.

한 자리라면 견은 기꺼이 앉았을 것이다. 

설령 독이 든 음식을 내온다고 해도 먹는 시늉이라도 했을 것이다.

하 회장은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이전에 정서가 집에 왔을 때 어떻게 대했던가.

그녀가 겪은 모욕을 생각하면 그가 이 식사 자리에 자연스레 응하는 것은 기만이었다.

“대표님.”

견이 앉지 않고 가만히 하 회장을 바라보고 있자, 수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순진한 표정을 짓고 초대에 응하려 의자를 빼는 모습이 우스웠다.

견은 하 회장을 보며 입을 열었다.

“여자 취향 바뀌셨어요?”

탁.

숟가락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매서운 눈빛이 번뜩이며 그를 훑었다.

“그럼 이쪽이 아니라 회장님 옆에 수저를 두셨어야죠.”

말의 의미를 깨달은 수연의 귓바퀴가 달아올랐다.

수치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견은 일말의 동정심조차 느끼지 않았다.

그녀가 정서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품위 없이 짓밟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으니까.

“상스러운 말씨 좀 고쳐.”

“제 입에서 좋은 말을 기대하고 부르신 거 아니잖아요. 용건만 간단히 전달하세요.”

“네 앞에 수저가 놓여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구나. 이리 어리석어서야 무슨 큰일을 하겠다고.”

“제가 배려해드리잖아요, 지금. 피차 얼굴 마주하고 밥 먹고 싶진 않을 테니까.”

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수연은 꼿꼿이 서 있었다. 

마치 제가 이 공간에 있는 것이 타당하고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긴말 안 하마. 결혼하면 윤 변호사는 백영의 모든 업무에서 배제시켜라. 새로 가정을 꾸리면 할 일도 많아질 테지. 자고로 집안을 잘 건사해야 일이 풀리는 법이다. 내조에 힘쓰라는 넓은 뜻이다.”

“갑자기 왜 남의 집안에 훈수를 두고 그러실까.”

“윤 변호사의 일은 이제 이 비서가 도울 거다.”

하 회장은 그렇게 말하며 내려두었던 숟가락을 다시 들었다.

앞에 놓인 허여멀건 국을 떠먹고서는 앞에 놓인 회를 들었다.

아무것도 찍지 않은 날생선의 살점을 입에 넣고 오래 씹으며 하 회장은 견의 답을 기다렸다.

보아하니 단단히 하 회장의 마음에 든 모양이다.

영악한 점, 목표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는 점, 흠잡을 곳을 딱히 두지 않고 깔끔한 점, 집안이 든든한 뒷받침이 되어 주는 점.

마음에 들 구석이야 적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수연이 무언가 하 회장의 구미를 당길만한 것을 손에 넣은 것이 분명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회장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니에요. 이 비서는 애초에 제 수행비서일 뿐입니다. 몇 달 쓰다 갈아치우는, 그런 자리. 아시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데려다 쓰라는 거다.”

“…….”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 어떻게 확신하지? 네 그 같잖은 마음도 결혼하고 몇 달이 지나면 사라져. 그럴 때 가져다 쓰라고 옆에 두는 거다.”

“회장님께서 그러셨다고 제가 그러실 거라 생각하는 건 오만이죠. 그리고 이 비서는 제 취향이 아닙니다.”

제 버릇 개 못 준다더니.

견이 작게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하 회장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여자 앞에 두고 취향을 따지려거든 힘이 있어야지.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자식이 입만 살아 나불거리는구나.”

하 회장의 노여운 목소리에 온몸에 불쾌한 것을 뒤집어쓴 듯 느껴지는 모욕감을 꾹꾹 내리누르던 수연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뻔뻔하게 나가기로 한 것, 눈치 볼 것도 없었다.

여기까지 하 회장이 자신을 불렀다는 건, 그리고 제 몫의 식사를 챙겼다는 건 수연을 인정했다는 뜻이니까.

“회장님. 저는 지금 제 자리에도 만족합니다. 수행 비서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손과 발이 되는 존재입니다. 대표님을 위해서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겠다라.”

하 회장은 수연의 말을 곱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견과 수연을 번갈아 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게 설령 아버지 없는 자식을 낳는 일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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