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전 그냥 백영 건설 데스크에서 받아서 배달만 했을 뿐입니다. 이 안에 든 게 뭔지도 몰라요.”
“그래요. 그쪽은 그러겠지. 근데 이거 배달하고 나서 뭐 하라는 말 따로 안 들었나?”
“예?”
견이 다가가 남자의 앞주머니에 꽂힌 핸드폰을 낚아챘다.
동시에 남자의 얼굴이 당황으로 일그러졌다.
견은 그대로 핸드폰의 렌즈를 빤히 들여다보다 다시 남자에게 내밀었다.
“잠금.”
“원래 고가의 물건을 운반할 때는 배달 과정에서 도난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과정을 전부 기록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게 고가의 물건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예?”
“그냥 풀어요. 내가 그쪽한테 짜증 내는 건 에너지 낭비잖아. 피차 피곤한 일 만들지 말자고.”
남자는 낭패라 생각하면서도 하는 수 없이 핸드폰의 잠금을 풀었다.
촬영 중이던 화면을 닫고 통화 목록을 살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가고 곧이어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 전달했습니까?
견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떠올리듯 견이 침묵하자 상대도 더 말을 잇지 않았다.
곧 전화가 끊겼다.
“머리는 좋네.”
핸드폰의 주인이 건 전화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는지 금방 끊어 버리는 상대의 태도가 싱거웠다.
그리고 비로소 목소리의 주인을 떠올렸다.
자주 들은 목소리인데도 떠올리는데 한참 걸렸던 건 그동안 주의를 기울인 적이 없어서겠지.
“가져가요, 다시. 이 비서, 아까 온 상태 그대로 돌려놓을 수 있죠?”
“아…… 노력해 보겠습니다.”
“이런 선물을 줄 땐 직접 찾아오라고 전해 주세요. 그래야 감사한 마음을 나도 전달할 수 있잖아.”
“대표님, 이러시면 곤란한데. 꼭 제대로 받는 거 보고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 밥벌이인데 이러시면…….”
“어차피 퀵 배달 몇 개 더 뛰시면 되잖아. 잘리면 말해요. 우리 쪽에서 쓰는 업체에 이력서는 잘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대표실로 걸음을 옮기는 견을 보던 박 실장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황급히 대표실로 따라 들어갔다.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며 옷매무새를 가다듬던 견이 박 실장을 보자, 박 실장이 견에게 붙어 섰다.
“부탁하신 건 알아봤습니다. 트럭을 운전하던 남성은 43세의 김영천 씨로 현재는 음료 배달 종목으로 개인 사업 중이라 합니다.”
“음료? 그럼 그때도 배달 중이었나?”
“예. 다른 특이 사항은 없었습니다. 최근 갑자기 큰돈이 들어온 내역도 없고요.”
“통화 기록은.”
“그게. 딱 그것만 걸리는데…….”
“응.”
“통화한 사람 중에 신경호 씨의 번호가 있습니다.”
신경호?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견의 입매가 굳었다.
전에 신경호가 정서에게 함부로 굴었다는 소식을 듣고 견은 신경호의 위치를 수소문했다.
외국으로 출국하려던 공항에서 자신을 알아본 사람들 때문에 호흡곤란 증세를 겪고 실려 간 소영의 옆에 있다고 했나.
용케 기사는 틀어막았으나, 그때 소영이 욕설을 내뱉는 영상이 찍혀 자연스레 정서의 사건도 재조명됐고 관련 기사는 하 회장 선에서 전부 잘렸다.
이미 충분히 망가졌다고 생각해 응대할 가치를 못 느꼈다.
물론 한 번 문 건 놓을 줄 몰랐던 견에게는 대단히 드문 일이었다.
정서에게 정신이 팔린 탓에 저지른 실수인가.
쉽게 주먹을 휘두르고 상대를 굴복시키던 성미를 발견할 때마다 하 회장이 생각났다.
받은 만큼 되갚아 주던 정서는 천박하지도, 폭력적이지도 않았는데.
그런 정서의 옆에 서려면 하 회장과 닮은 자신은 도려내야 한다 생각한 탓에 물러진 것일지도 몰랐다.
“최근 신경호 행적은.”
“배우 장소영 씨의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아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기 시작했고 자주 병문안을 온다는 것 말고는 없습니다. 회사도 출근하지 않은 지 오래라 사실상 신경호 씨 아래에 있던 상무가 회사 일을 다 본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현재 위치 파악됩니까?”
“알아보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 그리고 장소영이 있는 병원은?”
“경기 외곽에 있는 한 정신병원입니다.”
“내 이름으로 꽃 보내요.”
“혹시 원하시는 꽃 종류라도…….”
“글쎄. 수국? 그게 좋겠네, 흰 수국.”
알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나가는 박 실장이 문밖에 무언가를 발견한 듯 뚝 걸음을 멈췄다.
“……이 비서?”
“마침 노크하려는데 나오시네요.”
“무슨 일 있습니까?”
견이 문틈으로 모습을 드러낸 수연을 보았다.
내용을 엿들으려 서 있었나?
그렇게 허술하게 군다고? 이제 이판사판이라 이건가.
“백영 그룹 하 회장님께서 데스크로 연락을 주셨습니다.”
“회장님이? 데스크로? 직접? 비서 통해서가 아니라?”
“예. 직접 연락 주셨습니다.”
놀란 박 실장이 펄쩍 뛰듯 물었다.
수연은 태연한 표정으로 대답하더니 박 실장의 옆을 지나 대표실 안으로 들어왔다.
견과 두어 걸음 떨어진 자리에 멈춰 서서 견을 보는 수연의 얼굴에 웃음이 어렸다.
“가시죠, 대표님.”
“……이해가 되게 설명했으면 하는데.”
“하 회장님께서 직접 선물을 전달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근데 왜 이 비서가 내 앞에 서지?”
“같이 오라고 하셨으니까요.”
싱긋 웃는 얼굴이 밝았다.
악의란 없는 저 얼굴로 또 무슨 짓을 벌였을지.
바라는 것이 있는 사람은 갖은 악행을 저지르고도 지치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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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내일 갈 수 있나 해서요. 추천해 주신 드레스 다 확인했습니다. 전엔 제가 시간이 안 돼서 못 갈 것 같았는데 그래도 입어 봐야 수선할 수 있다 말씀 주신 게 생각나서. 아. 예비…… 신랑도 가요. 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자 두 뺨이 뜨거웠다.
그런 낯간지러운 단어를 직접 뱉다니.
괜히 뜨거운 뺨을 손등으로 식혀 보던 정서는 제 앞에 남은 마지막 서류의 검토를 마치고 결재 파일에 넣었다.
이런 걸 해 본 적이 있어야 알지.
턱시도 입은 모습을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미리 생각해놨다.
보통 드레스를 입고 나오면 감탄하고 사진도 찍어 줘야 한다던데 견에게도 똑같이 하면 되겠지?
무슨 옷을 입든 잘 어울리겠지만. 오히려 그런 표현이 어울리는 것은 견이겠지만.
그럼에도 정서에게 늘 예쁘다 해 주는 것이 새삼스레 고마웠다.
“윤 변호사님!”
“박 실장님, 김 비서님. 안녕하세요.”
“몸은 좀 어떠세요?”
정서는 가져온 결재 서류들을 대신 들어 주는 박 실장에게 고맙단 눈인사를 건네며 수연의 자리를 눈으로 훑었다.
수연은 자리에 없었다. 어디를 나간 것인지 외투도 자리에 있지 않았다.
“괜찮아요. 멀쩡해요.”
“사고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에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대표님 안에 계시죠.”
“아, 그게…….”
박 실장이 난감한 얼굴로 머뭇거렸다.
예상하지 못한 그 반응에 의아함을 느끼던 정서가 상황을 파악했다.
자리에 없는 수연과 당황하는 박 실장. 그래, 뻔하지.
“나가셨군요?”
“예. 하 회장님께서 연락을 주셔서요.”
“하 회장님이요?”
“사실 아침에 대표님께 퀵이 하나 배달됐는데 그걸 보낸 사람이 하 회장님이셨나 봐요.”
“직접 안 주시고 퀵으로요?”
“예. 그래서 직접 주겠다고 부르셨는데…….”
불렀는데. 그 자리를 수연과 갔다는 거지.
비서니 자연스레 따라간 것일까.
견은 하 회장을 만날 때 기사도 두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
수행 비서가 있을 때에도 정서만 데리고 다니는 경우가 허다했으니, 하 회장을 만나는 자리에 그의 뜻으로 수연을 데려갔을 리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이 서류는 책상 위에 올려 둘게요.”
“네. 이따 봬요.”
자연스럽게 걸음을 돌렸으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 회장과 수연이 이미 서로를 알고 만났다는 것부터 신경 쓰였다.
수연은 하 회장의 마음에 들 정도의 여자일지도 모른다.
수연을 보고 정서가 필요 없다 생각할지도 모른다.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은 큰일을 할 수 없는 법이지. 그러니 네가 길들여라. 그리고 내가 신호를 주면 같이 사라져 주는 거야. 아이가 클 때까지만이다.’
지금껏 하 회장이 정서를 그나마 사람 취급이라도 해 줬던 건 견의 옆에 그녀를 두었을 때 쓰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쓰임을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결혼 이후 잡음을 몇 번이나 냈던 그녀에게 연락조차 하지 않던 하 회장의 모습이 생각났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요?”
건물을 빠져나와 곧장 택시를 잡으려던 정서의 앞에 은호가 나타났다.
은호는 어쩐 일인지 슈트를 갖춰 입고 있었다.
밝게 탈색됐던 머리칼도 검게 물들여 자칫 잘못하면 못 알아보고 지나갈 뻔 했다.
“너 뭐야?”
“결혼식 얼마 안 남았잖아요. 스타일 변화를 줘 봤어요. 벌써 이렇게 돌아다녀도 돼요?”
“응. 그냥 간지럽기만 하고 아프지도 않아. 진통제도 먹고 있고. 근데 너 그러니까…….”
“진짜 멋있다고?”
“…….”
“번호라도 드려요?”
너스레를 떠는 은호의 모습이 어처구니없어 웃음이 났다.
정서는 은호에게 다가서서 비뚤어진 넥타이를 바로 매 주었다.
“이 정도는 스스로 해야지 어른이지.”
“이렇게 가깝게 다가와도 돼요?”
“뭐?”
은호는 제게 붙은 정서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조금만 움직이면 콧등끼리 부딪칠 것 같이 가까운 거리에 정서가 몸을 뒤로 빼자, 은호가 손을 뻗어 그녀의 팔꿈치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제 쪽으로 다시 당겼다.
“뭐 하는 거야, 차은호.”
“가지 마요.”
“응?”
“지금 가려는 그 자리, 가지 말라고.”
“……내가 어디 가려는 건 줄 알고.”
“하 회장 만나러 가잖아요.”
“네가 그걸 어떻게…….”
“난 다 알아요.”
“우선 이것 좀 놔.”
“하 회장한테 손자 있죠.”
정서의 눈이 크게 뜨였다.